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한 사야가는 훗날 김충선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을 정도로 수많은 공을 세웠으며 이후로도 계속 조선의 무인으로써의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592년 5월 왜군들이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 땅을 침범한 이후 1598년에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조선의 백성들은 참혹한 전쟁 속에서 무수히 많은 고통을 받아야만 했죠
그런데 임진왜란 동안 수많은 왜군들이 조선의 병사들과 백성들을 학살하고 있을 때 조선의 편에 서서 침략자들을 상대로 싸웠던 왜군 장수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사야가 김충선입니다
사야가가 직접 집필한 모하당문집에 따르면 사야가는 다른 일본인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유학에 심취해 있었고 조선과 중국의 문화를 동경했으며 상대적으로 비루한 일본의 현실에 수치심을 느꼈다고 하죠
그는 몰락한 일본 유명가문의 후계자였는데 그의 가문을 몰락시킨 사람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습니다
조선을 침략할 마음을 먹은 도요토미는 사야가에게 "조선으로 가서 싸우지 않으면 네 아내와 딸이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협박을 했고 사야가는 어쩔 수 없이 일본을 떠나게 되죠
얼마 후 그는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을 맡아 30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조선에 상륙하게 되는데요
전쟁이 진행되던 어느 날 사야가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하는 조선인 모녀를 보게 됩니다
그는 그 모녀를 보면서 자신의 아내와 딸을 떠올렸고 아무 명분도 없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왜군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죠
때문에 이후로는 부하들에게 약탈을 금지할 것을 명령했고 주위의 조선 백성들에게도 자신은 조선을 침략할 뜻이 없음을 계속해서 알렸습니다
이후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저는 불행하게도 문화가 꽃 핀 땅에서 태어나지 못했다는 이유로 오랑캐 나라에 태어나서 오랑캐로 살다 죽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한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이 사실 때문에 때로는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잠도 자지 못한 채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조선의 예절과 풍속을 아름답게 여기고 예의를 아는 나라의 백성이 되고 싶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 조선의 편에 서고 싶다는 뜻을 밝히고 이후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500명과 함께 항복하게 되죠
선조는 그의 투항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그의 무예를 시험해 본 후 곧바로 벼슬을 내려주고 조선을 위해 싸우도록 했습니다
그는 영남 지방에서 3천 명의 부하를 이끌고 싸우게 되었는데 당시 조선군의 무기 상태가 너무나 부실한 것을 보고 각 지역에 있는 조선군에게 조총을 만드는 법과 조총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게 되죠
이후 사야가는 경상도 지역의 의병들과 함께 힘을 합쳐 일본군과 여러 번의 전투를 벌였는데 그 과정에서 곽재우와 연합해 일본군을 상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동안 무려 78회의 전투를 치렀으며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정3품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죠
1597년에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손시로 등의 항복한 왜군 장수들과 함께 의령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이어진 울산성 전투에도 참여해서 울산왜성에 농성 중이던 가토의 1군을 섬멸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이때의 공으로 종2품 가선대부까지 승진한 사야가는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의 추천을 받아 선조로부터 김충선이라는 조선 이름을 하사받게 되죠
김충선에 대한 기록 대부분이 그가 직접 쓴 모하당문집에 나와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록이 모두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종2품의 벼슬까지 받은 기록을 봤을 때 그가 임진왜란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당시의 조선 조정 역시 이를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항복한 왜군 장수에게 벼슬을 내린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겠지만요
기록을 봤을 때 조선의 조총을 각지로 보급한 것은 이순신 장군이지만 당시 김충선과 이순신 장군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김충선이 "이미 조총을 개발하여 훈련하고 있다."라고 한 기록이 있는 걸로 봤을 때 조총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작업은 김충선이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일본에서 서양으로부터 조총을 먼저 도입한 사이가 지방 출신이었던 데다가 그의 집안 자체도 대대로 각종 무기들을 만들었을 만큼 무기 제조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며 애초에 김충선 본인도 일본에서 조총 부대의 지휘관 출신이었다고 하죠
일본의 조총 개발 역사와 아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조총에 대한 구조와 제조기술에 매우 밝았죠
그는 단순히 조총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화포와 화약의 개량에도 관여했으며 일본의 조총을 이용한 전술까지 가르쳤습니다
또한 사격과 검술에도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병사들의 총술과 검술 훈련까지 시켰다고 하죠
임진왜란 이후에는 북방 이민족들의 침입이 자주 일어나자 자진해서 북방의 변경 방어에 나섰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10년 동안 북방 변경 수비를 한 공로로 정2품 정헌대부의 벼슬을 받게 됩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괄 군에 항복한 왜군 출신들이 많이 가담했었는데 그중 서아지라는 인물은 무예가 워낙 뛰어나 조선의 병사들이 그를 상대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하죠
그때 김충선이 서아지를 만나 그의 잘못을 꾸짖은 후 치열한 결투 끝에 그의 목을 베어버렸다고 합니다
김충선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이괄의 반란군에 항왜들이 많이 가담해서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항왜들을 배은망덕한 놈들이라 여기며 분노했고 같은 항왜출신인 김충선에게까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기 때문이죠
똥줄이 탄 김충선 입장에서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반란군과의 전투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김충선은 그 후 병자호란 때 쌍령 전투에도 참전해서 청나라군 500기를 전멸시켰으며 끝내 인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소리 내어 통곡하면서 대구의 녹리라는 곳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했다고 하네요
앞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까지 남아있는 그와 관련된 기록들 대부분이 김충선 본인이 직접 쓴 모하당문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기록들을 100퍼센트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역사가들도 모하당문집은 그 뼈대가 사실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세부 사항들은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죠
먼저 사야가가 조선과의 전쟁 자체를 못마땅하게 생각해서 조선 땅에 상륙하자마자 항복을 했다는 부분입니다
임진왜란 초기의 조선군은 항복하는 왜군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마구 죽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항복을 한다 해도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죠
그리고 애초에 허를 찌르는 기습작전이 성공하면서 엄청난 기세로 진군을 거듭하던 개전 초기의 일본군이 조선에 항복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봐야 했습니다
실록에서 사야가 등 항복한 왜군에 대한 대우를 어떻게 할지 정하는 논의가 나오는 장면도 명나라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일본군에게 크게 불리해지고 난 후인 1593년 무렵이 돼서야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요
때문에 사야가가 실제로 투항했던 시점이 상륙 직후인 임진년이 아니라 상륙하고 나서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일본군이 불리해진 이후인 1593년이었을 것으로 짐작되죠
그리고 그가 항복한 진짜 이유는 단순히 목숨을 건지기 위한 것이거나 어차피 일본으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도요토미의 지배 아래에서는 제대로 된 생활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추측하는 의견들이 많다고 합니다
일본의 유명 소설가인 시바 료타로 같은 사람도 이런 의견에 동의하며 "당시 전국시대의 상식에 비추어 보면 적군에 항복한 무사가 어제까지의 아군에게 활을 쏘는 것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사야가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라고 말했죠
또 함께 조선으로 귀화한 인원수도 모하당문집에서 주장하는 500명이 아니라 혼자서 항복했거나 소수의 부하만을 데리고 항복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물론 이처럼 그와 관련된 기록 중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조선에 귀순한 이후에는 죽을 때까지 조선에 충성하며 수많은 공을 세운 것 또한 기록에 남아있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지금까지 조선의 편에 서서 싸운 왜군 장수 사야가 김충선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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