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의 신임을 받아 파격 승진에 거침없는 개혁 정치를 하지만 결국 버림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조광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의 11대 국왕인 중종 시절의 정치가였던 조광조는 34살의 나이로 관직에 들어와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초고속 승진을 통해 조선 조정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럽게 자신을 믿어주던 지지자이자 개혁 파트너이기도 했던 중종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요
조광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왕인 중종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과연 조광조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조광조는 성종 13년인 1482년에 한양 조씨 조원강과 여흥 민씨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498년 조광조의 아버지인 조원강이 압록강 근처 평안북도 희천의 찰방으로 부임하였을 때 무오사화가 일어났고 얼마 후 김종직의 제자였던 유학자 김굉필이 그곳으로 유배를 오게 되죠
당시 17살이었던 조광조는 아버지에게 간청해서 김굉필의 밑으로 들어가 학문을 배웠다고 합니다
김굉필에게 배운 유학은 이후 조광조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조광조는 중종 10년인 1515년 34살의 나이로 증광문과에 합격해서 본격적으로 조정에 출사를 하게 됩니다
조광조가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가라고 불리는 이유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후 당시 관료사회가 별 탈 없이 안정적인 정치생활을 하기 위해 너도 나도 몸을 사리기만 하던 시절이었는데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조광조가 4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이뤄내기는 어려워 보였던 큼직큼직한 개혁들을 이뤄냈기 때문이죠
조광조가 처음 파격적인 개혁을 시도한 것은 그가 사간원에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는데요
당시 그는 중종에게 골 때리는 상소 하나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바로 "제 상사들하고 직장 동료들 전부 잘라주세요"라는 것이었습니다
항상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상식적이고 올바른 의견을 내야 할 사간원과 사헌부의 대간들이 올바르지 못한 태도를 보이자 조광조가 일침을 날린 것이었죠
이후 조광조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하는 관료들도 있었으며 반대로 조광조를 비난하는 반정 공신들을 비롯한 세력이 있었는데 왕인 중종에게는 조광조의 이런 모습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이후 조광조는 3년이라는 짧은 시간 만에 정6품 사간원 정언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는데요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이 3년 만에 장관이 된 파격 출세를 하게 된 것이죠
왕의 신임을 등에 업게 된 조광조가 이후 추진한 것은 현량과라는 인재 추천 제도였습니다
학문과 덕행, 재주가 뛰어난 인재를 추천하게 한 후 왕이 직접 면접을 봐서 관료로 임명하는 것이죠
과거시험의 문제점은 글재주만 있는 사람이 선발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행실이 어떤지 알기가 힘든데 추천제를 실시하면 이런 단점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종 13년 6월부터 추천제가 시행됐지만 조정에서 반대하는 세력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큰 성과를 보지 못한 채로 있다가 다음 해가 되어서야 마침내 28명의 인재를 선발하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숨어있는 인재들을 찾아낸다는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합격자들은 명문 귀족 출신의 자제들로 정부에 연줄이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더욱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들이 모두 조광조와 같은 '사림'이었다는 것이죠
과거제도만으로는 인재를 뽑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 내내 고민되어 온 부분이기 때문에 중국 한나라의 옛 제도를 부활시켜 지금 제도와 병행하려 한 현량과는 발상 자체는 나쁘지 않은 시도였지만 의욕만 앞섰을 뿐 현실적으로 제대로 뒷받침할 수 있는 토대가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에 결국 대실패로 끝나게 되며 반대세력과의 갈등만 깊어지는 결과를 남겼습니다
그 무렵 조광조가 시도했던 또 하나의 개혁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던 소격서를 폐지하자는 것이었죠
태조 이성계는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 도교에 상당한 관심을 보여 태백금성에게 제를 올리기도 했는데 왕으로 즉위한 후에는 신하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한 곳을 제외한 제사 장소를 모두 폐쇄시켰죠
그렇게 유일하게 남은 곳이 바로 소격서였습니다
이후 유교국가인 조선과 도교식의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는 맞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소격서에서 제사를 지낸 것은 오랜 관습이므로 그냥 놔두자는 분위기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었는데 중종 13년에 조광조가 소격서를 폐지하자는 주장을 한 것이죠
태종 시절부터 이어져내려온 소격서를 폐지하기를 망설이는 중종에게 조광조는 "세상을 규범 하는 것은 오직 성리학뿐이며 다른 이단을 모두 혁파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하며 중종이 소격서 폐지를 망설이는 것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이후 거의 한 달 동안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우의정까지 모두 나서서 소격서를 폐지할 것을 주장했지만 중종은 계속 그들의 청을 거부했죠
하지만 조광조가 강력히 반발하면서 계속해서 중종을 비판한 끝에 결국에는 중종이 한발 물러서며 소격서 폐지에 대한 논쟁이 끝납니다
소격서 폐지에 성공하게 된 것은 조광조의 성과라고 볼 수 있는 일이지만 반정공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를 끌어들였던 중종 입장에서는 자신이 키워준 조광조가 자신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음에 분노했고 결국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세력을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으로까지 이어졌죠
현량과 제도를 추진하면서 공신세력과의 불화가 깊어지고 소격서를 철폐시키면서 중종과의 관계도 삐걱대기 시작했지만 조광조는 멈출 줄을 모르는 폭주기관차와도 같았습니다
중종 14년 10월 25일에 조광조는 중종반정을 일으키는데 공을 세웠던 정국공신 117명 중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별다른 공도 없이 공신이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죠
홍문관 부제학 김구를 비롯해 대간들과 승정원에서까지 공신들을 다시 선정할 것을 독촉했지만 중종은 이들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대간들이 전원 사직을 요청하며 중종을 압박했다고 하죠
이에 중종은 한발 물러나며 19명을 공신 명단에서 제외했지만 어쩔 수 없이 대간들의 뜻에 따르는 것일 뿐이며 자신은 이를 반대한다는 사실을 끝까지 밝혔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519년 11월 15일 밤 마침내 기묘사화가 일어났죠
공신들의 명단을 일부 수정하며 조광조의 뜻을 들어주는듯했던 중종이 갑자기 조광조 일당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새벽 5시 무렵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전달한 중종에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이 "전하께서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들에게 죄를 묻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라며 항의했죠
중종은 자신이 그런 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그런 것이라며 발뺌했지만 정광필은 "모든 사람들이 전하께서 그를 처벌하라 명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모두 전하의 뜻입니다"라며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중종은 크게 화를 내며 일이 이지경이 된 것은 모두 대신들이 잘못한 것이니 빨리 조광조에 대한 형이나 결정해 올리라며 억지를 부렸죠
그리고 이후 신하들과의 면담을 거절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입니다
흔히 기묘사화가 일어난 원인이 주초위왕사건때문이라고 아시는 분들이 많죠
주초위왕 조씨가 왕이 된다는 글자를 꿀로 나뭇잎에 써서 꿀이 발라진 부분만 벌레가 먹게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네 글자를 본 중종이 조광조가 역모를 꾸민다고 믿게 됐다는 것인데요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건은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을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우선 과학적 근거를 보자면 KBS 역사스페셜팀이 실제로 실험을 해봤는데 실험 결과 벌레는 꿀이 발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잎을 마구 갉아먹었다고 하죠
특정 글자만 남도록 원하는 부분만 파먹게 하기는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즉, 주초위왕은 근거가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다른 원인이 있다는 것이죠
애당초 중종은 개혁 자체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그저 정국의 안정을 위해 사림을 중용했을 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들이 추구하는 개혁을 지지하고 따르기는 했지만 점점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조광조와 사림세력들을 믿지 못하게 되죠
그런 와중에 중종은 남곤과 송질, 김전의 집에서 "무사 30명이 조광조 등을 제거하려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소식을 전한 홍경주라는 신하는 중종에게 "무사들의 불만이 심상치 않으므로 이를 진정시키려면 조광조를 죽여야만 합니다"라고 말했죠
무사들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조정의 대신을 죽이는 것은 쿠데타를 의미하는데 이를 왕에게 통보하듯이 얘기한 것은 노골적인 쿠데타 위협이었습니다
중종은 연산군이 제거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으므로 무사들의 이런 반란 조짐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요
게다가 중종을 비롯한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도 무인들을 통제할 만한 수단이 없었고 이들의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무력도 없었던 상태였습니다
결국 중종은 무관들을 대표하는 반정 공신들의 의견대로 조광조를 처형함으로써 이러한 쿠데타가 일어나는 사태를 진정시키고 싶어 했던 것이었죠
조광조는 이후 능성으로 유배되었고 1달 만에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중종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그것은 헛된 희망에 불과했죠
지금까지 조광조와 기묘사화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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