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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숙번. 1,2차 왕자의 난때 가장 큰 공을 세운뒤 태종의 총애를 업고 하늘높은 줄 모르고 설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남자

by 사탐과탐 2022.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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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킬때 절대적인 공을 세웠고 그덕에 강력한 권세를 누리다 한방에 훅 가버린 인물 이숙번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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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나라의 역사속에서 군주를 도와 큰 공을 세운 공신들을 보면 선을 넘지 않고 적당히 자신을 낮추면서 오래도록 권세를 누리는 경우도 있는 반면에 왕의 총애를 믿고 온갖 패악질을 부리다 비참한 말로를 맞는 사람도 있죠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이숙번 또한 이방원의 측근으로서 큰 공을 세워 왕이 된 태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온갖 패악질을 부린것도 모자라 왕에게 간접적으로 대들기까지 하다가 결국 모든것을 잃게 된 인물입니다

 

이숙번은 21살 되던 해인 1393년에 조선의 개국이래 처음으로 실시된 과거시험에 합격했는데요

이후 이방원의 처남인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의 소개로 이방원을 만나게 되죠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방원이 자신을 도와 큰일을 도모해 보겠냐는 제안을 하자 "그런것쯤은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입니다"라며 패기있는 대답을 했고 이방원은 자신감이 넘치는 이숙번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고 합니다

이후 지안산군사(안산군의 지사)벼슬을 하고 있던 이숙번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를 지키라는 명을 받아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에 들어오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398년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정도전이 요동을 정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자들의 사병을 모두 중앙군으로 보내버렸기 때문에 이방원에게는 거사를 치를 병사들의 수가 몹시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이숙번이 신덕왕후 강씨의 능묘를 지키던 병사들을 데리고 이방원이 일으키는 쿠데타의 주축 역할을 하게 되죠

 

그는 경복궁 주변에 병력을 출동시켜 한성부를 점령하고 세자 이방석과 그의 형인 방번을 제거한 후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정도전과 남은, 심효생등마저 제거하며 사실상 그들이 노리던 핵심인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큰 공을 세웠는데요

이때의 공으로 그는 정사공신 2등에 봉해지고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우부승지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후에도 이숙번은 이방원의 충실한 수족으로서 이방원의 형 이방간이 일으킨 2차 왕자의 난과 이성계가 함흥의 사병들을 동원해 이방원을 제거하려 했던 조사의의 난을 진압하는데도 많은 공을 세웠죠

박포라는 인물이 평소 이방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방간을 충동질해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숙번은 하륜 등과 함께 군사를 동원해 이들을 진압한후 박포를 처형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륜과 함께 정종을 찾아가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죠

태종 2년인 1402년 조사의의 난 당시에는 반란군에 맞서는 주력부대를 직접 지휘해 성공적으로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자신이 모시던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한 후부터 이숙번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며 막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워낙에 태종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으니 권세를 누리는것은 어느정도 당연한 일이지만 실록을 보면 이숙번은 자신의 공이 큰 것에 자만하고 다니면서 워낙 횡포를 많이 부렸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숙번은 이방원의 쿠데타에 큰 기여를 한 상으로 돈의문(서대문) 옆에 엄청난 규모의 집을 상으로 받았는데요

 

그런데 한양의 큰 성문 옆에 살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와 짐을 끄는 말과 소의 소리가 들리는게 당연했지만 이숙번은 이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돈의문을 아예 틀어막아버렸다고 하죠

500년 조선 왕조 역사상 많은 권세가들이 있었지만 고작 시끄럽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성의 대문을 틀어막은건 이숙번이 유일하다고 합니다

 

때문에 한양의 백성들은 이숙번의 집을 색문가(성문을 막은 집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손가락질했다고 하네요

날이 갈수록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조정에서는 새로 성문을 만들어서 그들의 불편을 덜어주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그 새로운 문도 이숙번의 집 근처에 지어질 예정이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이숙번은 어처구니없게도 태종의 형이자 선왕인 정종의 궁인 인덕궁 옆에 새로 문을 만들면 되겠다는 주장을 했고 그렇게 이숙번의 의견대로 인덕궁 옆에 서전문이 지어졌습니다

그곳이 상왕 집근처든 나발이든 내 집 앞이 조용할수만 있다면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인 것인데요

 

이 사건은 현 국왕의 형이자 상왕인 정종도 무시할만큼 무례했던 이숙번의 성품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런 미친짓을 실행에 옮길 정도로 이숙번의 권세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종 14년에는 설을 맞아 태종이 형이자 상왕인 정종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후 함께 궁내를 걷고 있는데 풍악을 올리며 놀고있던 이숙번과 하륜 등이 국왕에게 예를 갖추지 않으며 사간원의 비판을 받는 일이 발생했죠

 

사간들은 신하로서 있을수 없는 일이라며 이숙번과 하륜에게 벌을 주라고 간청했지만 태종은 그들이 미처 자신을 보지 못해서 그랬을 것이라며 너그럽게 그들을 용서해 줬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이숙번과 화륜은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자신들을 비판한 사간들을 처벌하려고 했는데 이숙번의 상관이었던 영의정 성석린과 우정승 남재 등이 그들이 국왕에게 무례했음을 인정하며 사간들의 처벌을 반대했죠

 

하지만 하늘높은줄 모르고 건방을 떨던 이숙번은 그날밤 자신의 상관인 성석린의 집과 남재의 집을 찾아가서 사관들을 처벌하라는 상소장에 서명할 것을 협박했는데요

이렇게 날이 갈수록 이숙번이 도를 넘는 행패를 부린다는 사실은 태종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그때까지도 태종은 이숙번을 옹호했습니다

 

하지만 태종이 이숙번을 감싼것은 아직 그의 능력이 필요해서였을뿐 자신의 형인 정종에게까지 오만불손하게 구는 이숙번을 좋게 봤을리는 없었죠

훗날 이숙번을 숙청하고 난 후 세종에게 절대 이숙번을 복귀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는 기록이 그 증거입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처남들까지도 죽인 태종에게 훗날 경험이 부족한 어린 왕을 쥐고 휘두를 수도 있는 이숙번이 결코 곱게 보일리는 없었을 것이라 짐작되네요

이후에도 이숙번은 계속해서 태종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어느날 앞을 보지 못하는 중이 사대부 가의 과부와 간통을 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온 조정의 신료들이 중과 과부를 모두 참수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이숙번만이 법에 따라 곤장만을 치고 목숨만은 살려줘야 한다고 주장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여론은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고 결국에는 둘 다 참수형에 처해졌는데요

이에 불만을 품은 이숙번은 궁궐에 나오지 않고 태종의 부름조차 무시하면서 태종의 심기를 심하게 건드렸습니다

이후 세자인 양녕대군을 찾아가서 여론에 밀려서 억울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런 일이 있을수가 있냐며 큰소리를 냈다고 하죠

 

예전에 자신이 멀쩡한 돈의문을 틀어막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친것은 생각도 못한채 말입니다

조정에서 내린 결정을 비판하면서 이숙번이 간접적으로나마 최종 결정권자인 태종또한 비난하게된 꼴이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게된 태종의 심기는 점점 더 불편해져갔죠

 

그렇게 세상무서운줄 모르고 설치던 이숙번의 부귀영화도 결국에는 끝을 맞게 됩니다

태종의 총애를 믿고 다른 관료들에게 무례한 태도들 보이는 이숙번의 행태를 참다못한 대간들이 여러차례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것인데요

위기감을 느낀 이숙번은 태종에게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자신의 별장이 있는 황해도 연안에 가서 살기를 청했고 태종도 이를 허락했습니다

 

그렇게 이숙번은 상황을 모면해보려 했지만 그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상소가 계속 올라오자 결국 이숙번은 가지고 있던 관직을 빼앗기고 공신으로서 누리던 혜택까지 모두 잃게되죠

태종 말년 조선에 큰 가뭄이 닥치면서 백성들이 고통받자 태종을 비롯한 조정의 신료들은 이사태에 대해서 크게 걱정하며 매일 대책을 찾기 위해 의논하느라 바쁜 상태였는데 그와중에 이숙번은 병을 핑계로 몇달동안이나 궁궐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이숙번의 무례와 불충함을 꾸짖으라는 상소가 줄지어 올라왔고 태종 또한 이런 신하가 있으니 하늘이 어찌 비를 내리겠냐며 크게 화를 냈죠

매번 이숙번을 감싸줬던 태종이었지만 이번에는 단호하게 이숙번을 지방으로 유배보내버렸는데요

 

그것만으로는 처벌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긴 대간들은 아예 이숙번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종은 끝내 이숙번의 목숨까지 빼앗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유배를 보낸 이숙번을 죽을 때까지 다시는 찾지 않았다고 하죠

심지어 태종은 죽기 전 세종에게 "이숙번은 내가 죽더라도 절대로 유배를 풀어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한 후에야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후 그는 죽을때까지 다시 조정에 복귀하지 못한채 세종 22년인 1440년에 사망하게 되죠

지금까지 태종 시대의 권신 이숙번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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