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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순조. 왕 노릇을 똑바로 못하고 세도정치를 방관해서 조선이 망하는데 스타트를 끊은 암군

by 사탐과탐 2022. 6.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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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할아버지 영조, 아버지 정조와는 다르게 왕 노릇을 똑바로 못하고 세도정치를 제어하지 못해 조선을 망국으로 접어들게 한 순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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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만한 아들 없다'라는 말이 있죠

현대에 와서는 주로 유명한 운동선수의 2세들이 아버지와 같은 종목을 선택했을 때 기대만큼 결과를 내지 못하면 이러한 비난을 받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한 나라의 군주들이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경우 뒤를 이어받은 후계자들이 이와 비슷한 고통을 겪었다고 하는데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순조 또한 아버지 정조대왕의 뒤를 이어 나라를 잘 다스려보고 싶어 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하게 되죠

조선의 23대 국왕인 순조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순조는 1790년 정조와 현목수빈 박씨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죠

당시 후계자가 없음을 걱정하고 있던 정조는 아들이 태어나자 크게 기뻐했다고 하는데요

그는 나이 11살이 되던 1800년 1월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불과 5개월 뒤에 부왕인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조선 역사상 2번째로 어린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당시 순조의 나이가 너무 어렸던 탓에 영조의 계비이자 당시 조선왕실에서 가장 큰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죠

정조 시기에는 정조의 탕평책을 지지했던 시파와 탕평책을 반대했던 세력인 벽파가 있었는데 정순왕후는 이중 벽파와 뜻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벽파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이후 이들은 정조 때 집권 세력이었던 시파를 숙청하는데 주력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수렴청정 기간 동안 정순왕후와 벽파는 천주교와 그 교리에 대하여 사학(주자학이 아닌 거짓된 학문) 취급을 하면서 신유박해 등의 천주교 박해사건을 일으켜 정조의 이복동생이었던 은언군과 은언군의 아내인 상산군부인 송씨까지 천주교를 통해 역모로 몰아서 죽이기도 했죠

안 그래도 이미 몰락해 소수만 남아있던 남인은 이 사건들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었고 남아있던 시파세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하네요

 

이후 영조와 정조대에 이어졌던 탕평이 실패하고 붕당정치가 약화되면서 권력이 특정가문에 집중된 채로 국정이 운영되는 정치형태인 세도정치가 등장하게 됩니다

순조의 장인이자 한때 정조의 충신이었던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점점 조정을 장악하며 세도정치의 시작을 열었죠

이로 인해 순조 시기부터 헌종과 철종에 걸쳐 60여 년간 왕의 외가와 처가일족들이 나라를 쥐고 흔들었습니다

 

1803년 대왕대비 김씨가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과 그 일파에 의해 물러나면서 수렴청정을 끝내게 되는데요

이후 형식상으로는 순조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게 됐지만 권력의 핵심은 김조순을 비롯한 안동김씨 세력이 장악했죠

또한 그때까지 최고 정치기구였던 비변사가 세도정치 시기에는 권력의 핵심기구로 떠오르면서 왕권을 제약하게 됩니다

 

이후 안동김씨들은 비변사의 중요한 자리를 비롯해 중앙과 지방관리의 인사권을 모두 장악한 채 조선을 자신들 마음대로 쥐고 흔들기 시작했죠

여기까지만 보면 순조는 그저 무능한 허수아비 왕으로만 보이지만 그라고 해서 처음부터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아닌데요

순조는 정통성에 있어서도 딱히 흠잡힐 곳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만 해도 권한이 강한 편이었으며 정치적인 판단 능력도 뛰어났다고 하죠

 

그리고 수렴청정을 받던 재위 초기 3년 정도까지는 선왕 정조가 했던 것과 최대한 비슷하게 나라를 다스리며 나름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론 벽파를 숙청하는데도 앞장서는 등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모습을 보였는데요

하지만 평안도 일대에서 발생한 대규모 농민반란인 홍경래의 난이 터진 이후부터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비변사에 국정의 대부분을 맡겨버리면서 세도 가문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나마 김조순이 살아있던 시절까지만 해도 김재찬 등 순조의 영향력이 통하는 대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컨트롤할 수 있었지만 김조순이 죽은 이후 김조순의 아들과 조카들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안동 김씨들의 세상이 돼버리면서 우리가 아는 방식의 세도 정치가 되었다고 하죠

전대의 왕들 중 영조는 완론 탕평을 통해 그리고 정조는 준론 탕평을 통해 정치적인 균형을 유지해왔는데요

 

하지만 순조는 이전의 왕들과 달리 신하들의 권력 흐름에 대해서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재위했던 기간에는 안동김씨로 대표되는 세력들을 중심으로 하나의 당이 독재를 하는 형태가 돼버렸습니다

영조와 정조 시절에는 비록 권세가 강한 신하들이 나오더라도 왕이 그때그때 선 넘는 신하들을 컨트롤해가면서 적당히 왕권과 신권 사이의 균형을 유지해왔었죠

 

하지만 순조대에 이르러서 왕이 신하들을 관리하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손을 놓아버리자 세도 가문들의 고삐가 풀려버리면서 이후의 조선 정계는 권력을 장악한 일부 가문들끼리의 각종 암투와 비리가 난무하는 개막장으로 변해버리게 됩니다

가뜩이나 조정이 엉망인 상태에서 건강까지 나빠지자 나랏일에서 손을 떼다시피했던 순조였지만 그래도 그에게는 아직 한줄기 희망이 남아있었는데요

 

바로 그의 아들인 효명세자였습니다

효명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매우 영특한 모습을 보이면서 순조가 그에게 큰 기대를 걸게 되었고 이후 순조는 신하들 앞에서 몇 번이나 자신이 무능한 임금이라 주장하면서 영특한 세자에게 양위를 하려 시도했다고 하죠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대부분의 왕조에서 국왕이 양위나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선언하면 온 나라가 뒤집혀서 명을 거두어달라고 난리를 쳤는데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때는 모든 신하들이 순조의 명에 대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영조 시절 순조의 아버지 정조가 대리청정을 하는 것을 격렬히 반대하다 죽은 홍인한이 떠올라서 자신들은 홍인한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순조가 정말로 나라를 다스리는데 별 의욕이 없다는 것을 신하들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죠

 

그때까지 순조가 보여준 모습들을 봤을 때 그는 자신의 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에 비해서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욕심이 많은 왕은 아니었기 때문에 적당히 은퇴하고 좀 쉬고 싶어 했던 마음을 읽은 것이라 짐작된다고 하네요

그리고 한편으로 순조는 당시 조선의 조정이 세도정치를 거치며 안동 김씨에게 권력이 집중돼있던 상황 속에서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김으로써 왕권을 강화해 보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효명세자 또한 부왕의 뜻을 알아채고 세자빈의 친정인 풍양 조씨와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했으며 권력에서 멀어져있던 소론 계열 인물들까지 등용했죠

이후로도 효명세자는 뛰어난 일 처리 능력으로 무너져 가던 조선을 바로잡을만한 성군의 자질을 보여주면서 신하들과 순조의 기대를 한 몸에 샀지만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불과 3년 만에 효명세자가 병에 걸려 일찍 죽어버리면서 작게 피어오르던 희망의 불꽃은 다시 사그러들고 말았습니다

 

순조 말년에는 안동 김씨들이 평소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노론 벽파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시작했는데요

그러자 순조는 "우리가 정치를 하는 이유는 백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인데 어째서 나는 매일같이 누군가를 죽이거나 탄핵했다는 소식 말고는 들은 것이 없는가?"라고 탄식하기도 했죠

그리고 안동김씨들의 횡포를 보다 못한 순조는 자신의 왕권을 이용해 감옥에 갇혀있거나 귀양가있는 안동 김씨의 반대파들을 풀어주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작은 일탈에 불과했을 뿐 그 후로도 안동 김씨의 세상은 계속됐죠

순조 33년에는 한양에서 쌀폭동이 일어났다고 하는데요

한양의 쌀 상인들이 뻔히 가져다 놓은 쌀이 있음에도 자신들이 원하는 만큼 쌀값이 오르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쌀을 팔지 않는 등의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한양의 쌀값이 끝없이 치솟게 되자 분노한 한양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켜 싸전(쌀가게)들을 약탈해버린 사건이었죠

 

당시 한양 백성들의 분위기가 워낙에 살벌했기 때문에 순조는 폭동을 일으킨 주동자 7인을 처벌한 것뿐만 아니라 폭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제공한 상인 2명까지 처형한 후에야 겨우 성난 민심을 달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효명세자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조의 두 딸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말년의 순조는 거의 웃음을 보이는 일이 없었다고 하죠

 

자식들이 연달아 사망한 충격 탓인지 다리에 난 종기가 악화되면서 순조 또한 4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순조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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