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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효명옹주. 옹주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씨의 처'라는 칭호로 불리게된 여인

by 사탐과탐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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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와 귀인조씨 사이에서 태어나 훗날 남편과 시할아버지가 반역죄를 쓰고 죽은 뒤 자신도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한 김씨의 처 효명옹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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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체높은 왕족들의 경우 주변에서 워낙에 떠받들어주는 사람이 많다보니 위아래도 모르는 개차반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볼수있습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효명옹주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하는데요

 

평소 오만하고 남을 배려할줄 모르는 모습을 자주 보였던데다가 역모사건 및 왕실저주 사건에까지 관련되면서 조선 최악의 왕녀라 평가받는 그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효명옹주는 1637년 조선의 16대 국왕인 인조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악녀중 하나라 불리는 귀인조씨 사이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의 홍타이지에게 크나큰 굴욕을 당한 인조에게 늦둥이이자 유일한 딸인 효명옹주는 큰 기쁨이 되어줬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효명옹주를 낳기 전 인조는 이미 인열왕후와의 사이에서 낳은 세명의 아들이 모두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효명옹주가 아무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온갖 비법을 다 동원했다고 합니다

악귀들을 물리친다는 이유로 옹주가 입을 배냇저고리의 목주변 옷깃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가 하면 옹주의 손톱과 발톱도 그냥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모아 두었다가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부적으로 잘 싸서 보관하는 등 하나뿐인 딸을 위해 할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썼다고 하죠

 

하지만, 아버지 인조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사랑을 쏟아부은 탓이었을까요

아무런 부족함없이 자란덕분에 효명옹주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때 필요한 예절과 개념을 주입받지 못했습니다

하루는 궁내에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연회자리에서 누가 상석에 앉을것인가를 두고 효명옹주와 그녀의 이복오빠인 인평대군의 아내 복천부부인 오씨사이에 격렬한 말다툼이 벌어지게 되었죠

 

효명옹주 입장에서는 옹주인 자신이 부부인보다 높으니 자신이 상석에 앉는것이 맞다는 주장을 할수도 있지만 인평대군은 효명옹주보다 15살이나 많은 이복오빠이고 왕비소생의 적통 대군이었기 때문에 그 아내인 오씨에게 자리를 양보할수도 있었던 일이었는데 효명옹주에게 손윗사람에 대한 배려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일이 커지면서 그 사실이 인조에게도 알려지자 딸바보 인조는 어김없이 효명옹주의 편을 들면서 딸이 며느리보다 윗자리에 앉도록 했다고 하네요

이 일 이후로 효명옹주는 다음 왕이 될 효종과 인평대군 등 왕실의 주요인물들과 극도로 사이가 나빠지게 되죠

옹주의 나이 11살이 되던해에 인조는 옹주의 신랑감을 간택하게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 귀인 조씨는 자신의 딸을 세도가인 김자점의 손자 김세룡과 혼인시키기 위해 김자점의 동의하에 김세룡의 사주팔자를 조작했고 그 결과 김세룡은 옹주의 부마가 되었습니다

 

인조는 딸의 혼인에 기뻐하며 혼수로 쓰이는 옷과 물건들을 최고로 호화스럽게 준비해줬다고 하죠

본래 왕의 딸은 결혼을 하게되면 궁밖으로 나가서 살아야하는것이 법도였지만 인조의 많은 사랑을 받으며 지냈던 효명옹주는 혼인을 한 후에도 2년간이나 궁에서 계속 살았다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런데 왕과 왕자들 그리고 내관들을 제외한 남성들은 궁에서 밤을 보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의 남편인 김세룡은 웃어른들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올때에나 궁궐에 들어올 수 있었으며 궁중에서 자는것또한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결혼은 했지만 사실상 남편과는 따로 지냈던 효명옹주는 결혼한지 2년이 지나서야 출궁을 했다고 하죠

 

효명옹주가 출궁한지 한달후에 병석에 드러누운 인조는 왕세자인 효종을 불러 귀인조씨의 자식들을 벌하지 말고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였던 김자점에게도 대우를 잘해주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청나라에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김자점과는 달리 반청적인 성향을 보이던 효종은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마자 김자점을 나락으로 보내버렸는데요

 

효종은 인조가 승하한지 6일 만에 대간들이 김자점을 격렬히 탄핵하자 "자점은 아바마마가 승하하실 때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멀뚱히 서있었다 충성심이 부족할 따름이다"라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홍천으로 귀양보내버렸습니다

홍천으로 귀양을 가게 된 김자점은 이왕에 이렇게 된거 그냥 다같이 죽자는 마음을 먹은것인지 갑자기 청나라에 사람을 보내서 효종이 김상헌 등과 함께 북벌을 할 계획을 짜고 있다며 고자질을 해버렸죠

 

이에 청나라는 조선과의 국경에 군대를 배치한후 사신을 보내 어떻게 된 일이냐며 조선 조정을 추궁하기 시작했는데요

다행히 영의정으로 있던 이경석이 목숨을 걸고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조선은 간신히 청의 침공을 피할수 있게 됩니다

이후 나라를 위기에 몰아넣은 죄가 발각되면서 김자점은 광양이라는 지역으로 다시 귀양을 가게되죠

 

김자점이 몰락하면서 그와 한배를 탔던 귀인조씨 또한 같은 운명을 맞게 됩니다

조귀인이 인조의 계비였던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인데요

평소 며느리인 숭선군부인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조 귀인은 효명옹주를 모시던 여종 영이를 자신의 큰아들 숭선군의 첩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이에 숭선군부인은 이모인 장렬왕후를 찾아가 억울함을 호소했고 분노한 장렬왕후가 영이를 잡아들여 추궁하자 겁에 질린 영이가 뜬금없이 "평소 조귀인이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다"라는 자백을 해버린 것이죠

이후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 일에 관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효명옹주 또한 옷소매 속에다 사람의 뼈가루를 담아서 인평대군의 집에다 뿌리고 흉한 물건을 궁궐 주변에 묻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야사에 따르면 효명옹주는 왕위에 오른 효종이 자신을 멀리하자 시할아버지인 김자점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세손빈이 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고 하네요

진상을 알게된 사람들은 효명옹주와 남편 김세룡을 국문하라고 요청했지만 효종은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만 국문했다고 합니다

이후 효종은 자신을 노렸던 귀인조씨의 목숨은 빼앗았지만 그녀의 자식들에겐 별다른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목숨만은 살려주려 나름 노력을 했다고 하죠

 

남편 김세룡과 시조부 김자점이 사지가 찢기는 형을 받고 목숨을 잃게된 후 효명옹주 역시 옹주의 작위를 박탈당하고 김처(김씨의 처라는 뜻)라는 다소 모욕적인 칭호로 불리게 됩니다

그녀는 이후 강원도 통천으로 유배를 갔다가 1652년 통천은 지내기에 너무 날씨가 춥다는 이유로 다시 경기도 이천으로 보내졌다고 하죠

 

이후 그녀의 남동생들인 숭선군과 낙선군은 나름 왕실어른으로 대우를 받았지만 효명옹주는 시댁인 김자점 일가가 역적의 혐의를 받고 박살이 난데다가 그녀 자신도 어머니 귀인조씨의 저주사건에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평생을 감시속에서 살다가 1700년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지금까지 효명옹주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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