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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중종. 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왕으로 세워진 우유부단함과 이중적인 모습의 왕

by 사탐과탐 2022. 6.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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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반정으로 신하들에 의해 세워진 왕 중종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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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대놓고 왕을 폐위시킬 목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바꾼 사건을 반정이라고 부릅니다

500년 가까운 조선의 역사속에서도 반정은 단 두번밖에 없었기 때문에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중종과 인조 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인물이 되었죠

 

오늘은 그중에서도 우유부단함과 이중적인 모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종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중종은 1488년 조선의 9대 국왕인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494년 진성대군으로 봉해진 그는 이후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와 혼인을 했고 13살이 되던 해에 궁에서 나가 살게되죠

1506년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하면서 그는 19살의 나이로 조선의 11대 국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중종은 정상적으로 왕위를 이어받은것이 아닌데다가 자신이 주도한것도 아닌 신하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인해 왕위에 오른것이기 때문에 왕이 신하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상황에 처해있었죠

반정을 주도한 권신들은 반정당시 공을 세웠던 공신이 누구였는지 그리고 누가 더 많은 공을 세웠는지조차 자신들 마음대로 정했으며 심지어 그런 자신들의 태도를 본 중종이 태클이라도 걸려하면 중종또한 언제든 갈아치울수 있다는 태도를 간적접으로 드러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연달아 왕을 2번이나 갈아치우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들에게도 큰 부담이었을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이미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우왕과 창왕, 공양왕을 줄줄이 왕위에 올렸다가 다시 폐위시켰던 과거를 보면 알수있듯이 왕권이 땅에 떨어지면 임금이 어떤 취급을 당할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이미 있었죠

하지만 중종이라고 해서 언제까지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공신들의 힘이 너무 커지자 위기감을 느낀 중종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을 등용하며 상황을 바꿔보려 노력했죠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후 당시 조선의 관료사회는 권세가 강한 공신들의 눈치만 보며 너도나도 몸을 사리기만 하던 시절이었는데 갑자기 중종의 신임을 등에 업고 등장한 조광조는 다른 관료들과는 달리 거침없는 개혁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중종또한 조광조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보여주던 시기도 있었죠

하지만 중종과 조광조가 비록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 뜻을 같이 하고는 있었지만 서로가 꿈꾸는 궁극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달랐는데요

 

중종은 공신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사림을 등용하면서 공신들을 제치고 보다 강력한 왕권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조광조는 왕과 관리들이 도덕과 학문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해야한다는 도학 정치를 실현하는것이 목적이었는데요

 

조광조는 도학정치가 펴지길 꿈꿨고, 중종은 힘센 군주가 되기를 원했던것이죠

조광조는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를 펼치기 위해서는 임금 역시 한 사람의 선비가 될 것을 중종에게 끊임없이 권유했고 시간이 지날수록 중종은 이런 조광조의 모습에 점점 피로를 느낌과 동시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세력의 급진적인 정치개혁을 보던 공신 세력들 또한 자신들의 권력을 침범하는 그들을 곱게 보지 않고있었는데요

 

그런 와중에 조광조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관청이었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중종반정 당시 세운 공에 비해 지나친 공을 받은 가짜 공신들을 명단에서 삭제하자는 주장을 하면서 조광조 일파와 훈구대신들간의 갈등이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리고 1519년 11월 15일밤 마침내 기묘사화가 일어났죠

공신들의 명단을 일부 수정하며 조광조의 뜻을 들어주는듯했던 중종이 갑자기 조광조 일당을 모두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린 것인데요

 

새벽 5시무렵 조광조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전달한 중종에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영의정 정광필과 좌의정 안당 등이 "전하께서 그들을 등용하고 그들의 청을 들어주었는데 이제 와서 그들에게 죄를 묻는것은 말이 안 됩니다"라며 항의했죠

이에 중종은 자신이 그런것이 아니라 조정에서 그런 것이라며 발뺌했지만 정광필은 "모든 사람들이 전하께서 그를 처벌하라 명하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는 모두 전하의 뜻입니다"라며 반발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중종은 갑자기 크게 화를 내며 일이 이지경이 된것은 모두 대신들이 잘못한 것이니 빨리 조광조에 대한 형이나 결정해 올리라며 억지를 부렸죠

그리고 이후 신하들과의 면담을 모두 거절하는 졸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렇게 조광조가 숙청된 이후의 조선은 또다시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광조 일파를 몰아내고 권력을 잡게된 권신들은 이번에는 자기들끼리 치열한 권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는데요

 

경빈 박씨 세력이 세자인 인종을 지지하던 김안로 일파를 몰아내며 권력을 잡는가했지만 이후 김안로가 세자인 인종의 생일에 누군가가 죽은 쥐의 사지를 찢고 불에 태워 세자의 침실 창문 바깥쪽에 걸어두었다는 음모를 제기한 작서의 변 사건을 이용해서 경빈 박씨와 그녀의 아들인 복성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게되죠

 

김안로가 몰락한 후에는 당시 중전자리에 있었던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권력을 잡게되는등 중종은 재위기간동안 조광조가 개혁을 추진하던 시절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나가 본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중종 33년인 1538년 중종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줬던 사례를 들며 세자인 인종에게 왕자리를 물려주려 했지만 세자가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격렬히 반대한끝에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죠

 

6년이 지난 1544년 11월 14일이 돼서야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준 중종은 그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하네요

일반적으로 중종이라고 하면 우유부단하고 신하들에게 끌려다니는 나약한 왕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죠

중종은 특히 변덕이 심했기 때문에 특정 신하에 대해서 처음에는 그를 믿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어느순간 갑자기 마음이 돌변해서는 바로 그를 손절해버리는 냉혹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요

 

조광조와 사림세력을 숙청했던 기묘사화를 시작으로 그 이후 권신이 된 심정과 이행을 제거했고 한때 자신이 본격적으로 힘을 실어줬던 김안로마저 탄핵하는 등 언뜻 보면 중종은 그저 신하들의 의견에 따라 그들을 숙청한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조광조와 김안로의 경우에는 중종 스스로 밀지를 내리기도 하는 등 그가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정황이 많이 드러나있다고 합니다

 

특히 자신이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를 기묘사화로 제거했을땐 조광조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남곤마저 조광조를 파직하고 유배를 보내는선에서 끝내자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중종이 조광조를 사사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하면서 기어이 조광조를 죽게 만들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래서 현재 많은 역사학자들이 중종을 이중인격자라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3년이라는 짧은시간만에 정6품 사간원 정언에서 종2품 사헌부 대사헌의 자리로까지 승진시킬만큼 팍팍 밀어주며 개혁에 대한 의지를 보이는듯했던 중종이 어느날 갑자기 태도를 싹 바꾸고는 조광조를 죽여버린 것을 보고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들조차 "하루가 멀다하고 자주 만나서 나라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였으니 그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조광조를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그를 죽인것도 모두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광조를 조금이라도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어보이니 예전에 그토록 조광조를 사랑했던 모습에 비하면 마치 두명의 임금이 있는거 같다"라는 말을 남길정도였죠

김안로의 경우에도 그의 권세가 점점 커지면서 자신을 위협한다고 느꼈던 중종은 도승지 양연에게 '김안로를 없애야겠으니 여론을 조성하라'라는 밀지를 내렸습니다

 

이후 양연은 대간들에게 김안로의 횡포가 심하니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동안 김안로가 워낙 많은 횡포와 비리를 저질렀기 때문에 대간들또한 양연의 말에 동의하며 때를 기다렸죠

이후 김안로는 중전인 문정왕후를 폐하려 하다가 오히려 문정왕후측과 양연등의 공격을 받아 체포된후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해 10월 27일 왕명에 의해 사약을 받고 죽게 됩니다

 

이렇게 중종은 평소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다가도 권신들을 처리할때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이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줬죠

이런 중종의 변신에 대부분의 신하들이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문제는 중종이 이렇게 과감히 권신들을 쳐냈던 이유가 국왕으로서 당시 조선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한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왕자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을 뿐이란 것인데요

 

새롭게 권력을 잡은 권신들이나 종친들이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를 때 그들을 막지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했던것이 그 증거라고 합니다

때문에 중종은 자신에게 주어진 왕좌를 신하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노력하기만 했을뿐인 왕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죠

지금까지 중종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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