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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안준생. 일제에 아버지를 팔고 스스로 친일파가 되어 개처럼 살았던 안중근의 아들

by 사탐과탐 2022. 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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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 아들인 안준생은 독립운동의 영웅인 아버지와는 다르게 스스로 친일파가 되어 개처럼 살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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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군 참모중장인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만주에 있는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면서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많은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30년이 지난 1939년의 어느 날 안중근 의사의 아들인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절인 박문사를 찾아가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한다'라는 충격적인 발표를 했죠

대체 안준생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가 저런 모습을 보였던 것일까요?

 

안준생은 1907년 황해도 해주군에서 아버지 안중근과 어머니 김아려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떠나기 전에 동료들을 통해 자신의 가족에게 편지를 보냈죠

연해주에 살 곳을 마련해뒀으니 그곳으로 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편지를 본 안중근의 아내 김아려는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의 의거사실을 전혀 모른 채 두 아들을 데리고 하얼빈에 있는 한 집을 찾아갔는데요

잠시 후 안중근의 지인이 들어와 김아려에게 곧 일제의 경찰들이 여기 올 텐데 절대로 당신이 안중근의 아내라는 사실을 말해서는 안된다며 신신당부를 했죠

얼마 후 정말로 일제의 경찰들이 와서 김아려와 두 아들들을 경찰서로 끌고 갔습니다

 

무려 사흘 동안이나 자신들이 안중근의 가족이 아니라고 주장을 한 뒤에야 겨우 풀려나게 된 김아려와 아들들은 그제서야 안중근의 의거 소식을 알게 되었죠

이후 뒤늦게 하얼빈으로 온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와 다른 식구들을 만난 그들은 급히 연해주로 피난을 갔고 안중근의 동지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그곳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1911년 여름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은 맏아들 안문생이 길에서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목숨을 잃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안준생의 가족들은 안문생이 죽은 것이 일제가 저지른 일이라 믿었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하이로 이주를 하게 되죠

하지만 그들 가족은 이후로도 계속해서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1932년에 윤봉길 의사가 훙커우 공원에서 일본제국의 주요 인사들에게 폭탄을 던지는 의거를 벌인 이후 임시정부가 일본의 삼엄해진 수색을 피하기 위해 급히 상해를 떠나는 일이 있었는데요

 

이후 안준생의 가족들은 더 이상 기댈 곳조차 없는 상황 속에서 더욱 심해진 일제의 감시하에 억압된 삶을 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

얼마 후 자신보다 2살 많은 정옥녀와 결혼을 한 안준생은 처갓집 식구들의 권유로 상하이에 약국을 차리게 되죠

오랜 시간 동안 일제의 탄압을 받느라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한 적이 없던 안준생이 갑자기 약국을 차린 것을 보고 당시 상하이 조선인 사회에서는 안준생이 일제가 건네준 돈으로 약국을 개업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 무렵 제7대 조선 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가 안준생을 찾아왔습니다

미나미 총독의 말에 따르면 경기도 경성부에 있는 박문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위령제가 열리는데 만약 안준생이 그 자리에 가서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사과를 하면 더 이상의 탄압 없이 그에게 안전한 삶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했죠

그렇게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열린 위령제에 이토분키치와 안준생이 함께 등장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분키치는 이날 조선호텔에서 미리 안준생을 만나 박문사에서 벌어질 이벤트의 각본을 미리 짰다고 하는데요

이후 박문사에서 안준생은 분키치를 향해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라고 말하며 이후로는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했죠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해 널리 알려졌으며 매일신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에서도 대서특필되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친일 언론 중 하나인 경성일보는 "아버지가 범한 죄 때문에 고난의 30년 세월을 보냈던 안준생 군은 일생의 소원이었던 이토 공에 대한 사과를 끝마친 지금 은혜와 원수를 초월해 이토 분키치와 서로 손을 잡고 과거를 청산했으며 일본제국을 위한 봉사를 맹세했다"라고 발표했죠

 

이후 안준생은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더럽힌 천하의 불효 자식이자 친일 매국행위를 한 더러운 개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는데요

백범 김구는 안준생이 미나미 총독을 아버지라 불렀다며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장제스에게도 사람을 보내 안준생이 상하이에서 아편 매매를 저지르고 있으니 그를 엄하게 처벌해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유일하게 안준생의 편을 들어준 것은 그의 가족들뿐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김아려는 상하이로 돌아간 안준생을 껴안으며 '고생했다'는 한마디를 건네고는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죠

수많은 조선인들이 호랑이 아버지에 개 같은 자식이라며 그에게 욕을 퍼붓는 가운데 안중근의 아내만은 측은한 눈길로 아들을 보며 30년의 지옥 같은 고생길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절을 한 아들을 어루만져 준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준생은 아내인 정옥녀에게 "내가 현해탄에 몸을 던졌어야 하는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하네요

안준생은 이후 분노한 조선인들에게 많은 위협을 받았으며 광복 이후에도 귀국을 망설이다가 1946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다시 조선으로 귀국을 했다고 합니다

이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으로 피신해있던 1951년에 덴마크 국적의 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죠

 

지금까지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의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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