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는 약 1000년 전 세계 경제를 주름잡던 경제력이 엄청났던 나라였지만 정작 나라를 지킬 힘이 없어서 여진과 몽골에게 조공만 받치다가 멸망해렸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털리고 뼈만 남은 청나라 말기부터 군벌들이 민생은 살피지 않고 전쟁만을 일삼던 북양정부 시절 심심하면 찾아오는 기근에 일제의 침략까지 겹쳤던 국민정부 그리고 대약진 운동에서 문화 대혁명으로 이어진 초기의 중국까지 근현대의 중국인들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 속에서 매우 처참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때문에 이 시기부터 중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 분들은 늘 중국인들이 헐벗고 굶주렸던 과거만을 가졌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워낙 땅덩어리가 넓은 나 라인만큼 중국도 한때는 남부럽지 않게 풍요로운 시절이 있었죠
특히 송나라 시절에는 전 세계 무역의 선두주자가 되면서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잘 사는 국가였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그런 부를 가졌음에도 송나라는 이상하게 주변국들에게 털리는 일이 많았다고 하죠
오늘은 세계최고의 경제력을 가졌지만 정작 힘이 없어서 동아시아의 빵셔틀 노릇을 했다는 송나라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뛰어난 인품 덕분에 그의 부하들이 술에 곯아떨어진 조광윤을 황제로 추대했다고 알려졌죠
조광윤은 최대한 피를 덜 흘리는 방향으로 천하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보통 천하를 통일하고 나면 공신들을 모두 숙청해 버리던 다른 황제들과 달리 자신을 도운 공신들에게 적당한 보상을 주고 설득해서 평화로운 방법으로 그들을 은퇴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간적인 점들은 조광윤의 장점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그가 기존 공신들을 은퇴시키고 나서 정치에서 무인을 제외하고 문인을 주요 파벌로 내세우는 문치주의를 내세우며 문인들을 우대하고 무인들을 소홀히 대접했다는 점이죠
이렇게 대놓고 무인들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생기다 보니 송나라의 뛰어난 인재들은 모두 무인보다는 문인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게다가 조광윤은 당나라가 망한 이유는 바로 절도사들이 군대를 가지게 되면서 국가가 그들을 통제할 힘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의 힘을 약화시키면서 국경을 지켜야 할 절도사들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렸죠
그러다 보니 송나라의 국방력은 날이 갈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조광윤의 이런 정책에 단점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이 이 문치주의의 결과로 송나라 경제는 나날이 발전을 하게 되면서 당시 세계 경제에서 송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절반에 가까울 정도였다고 하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며 특정 국가가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져봤을 때 12세기 송나라를 뛰어넘는 나라는 2차 대전 직후의 미국 정도밖에 없다고 하니 당시 송나라의 경제가 얼마나 잘 나갔는지 대충 알 수 있겠죠
이렇게까지 경제력을 키울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때까지만 해도 촌동네에 불과한 취급을 받던 강남지역을 대대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송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쌀은 강북지역에서는 자라기가 힘든 작물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런데 가뭄에 강하며 성장이 빠른 품종이 동남아시아에서 들어온 데다 이앙법의 도입으로 2모작이 가능해지면서 강남의 전역에서 쌀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도로 늘어났고 강남 백성들의 경제력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죠
그렇게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부유해지자 자연스럽게 상업과 운송업이 발전했고 수나라 시절부터 개발한 대운하를 통해 정치의 중심지인 화북과 경제의 중심지 강남의 접근성이 높아지게 되면서 송나라는 그야말로 강남 개발의 효과를 제대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 송의 도자기가 본격적으로 해외에 수출되는 등 이 당시의 송나라는 그야말로 경제력에 있어서는 중국역사상 최고를 논할 정도였죠
실제로 중국의 4대 발명품이라 불리는 것들 중 한나라 시대에 발명된 종이를 뺀 나머지 나침반과 인쇄술 그리고 화약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경제력을 키우는데만 올인한 나머지 국방에는 너무나도 소홀했다는 것이 문제였는데요
아무리 나라에 돈이 많아도 그걸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주변국에게는 그저 탐스러운 먹이로밖에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죠
그중에서도 거란은 툭하면 중원을 침공해 식량과 재물을 약탈해 갔는데 한 번은 거란이 작정하고 20만이라는 대병력을 이끌고 아예 중원을 통째로 점령하려는 시도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거란의 대군이 송나라의 수도인 개봉 바로 앞까지 밀고 들어왔는데도 평화에 젖어있던 송나라의 황제는 그들과 감히 맞설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거란이 원하는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다며 평화를 구걸하기 바빴다고 하죠

덕분에 송나라는 거란과의 평화를 유지하는 대가로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 만필을 세폐(공물)로 바쳐야만 했습니다
한 가지 황당한 사실은 당시 송나라의 중신들 중에서는 많은 병력을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돈에 비하면 오히려 이 정도 공물은 그 100분의 1에도 못 미친다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하네요
이렇게 송나라가 적당히 협박만 하면 알아서 세폐를 퍼주는 호구라는 게 밝혀지면서 송은 그야말로 동아시아의 빵셔틀 같은 존재가 돼버렸습니다
중국 서북부에 있던 서하도 거란과 똑같은 방식으로 송에게서 세폐를 뜯어냈죠
물론 겉으로는 거란과 서하 모두 예의상 송나라를 대우해 주는 척했지만 그건 단순한 립서비스에 불과했을 뿐 틈만 나면 돈을 뜯어낼 수 있는 호구를 마음속으로는 무척이나 우습게 깔보며 조롱했을게 뻔했죠
이렇게 송나라 입장에서는 큰 굴욕을 당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들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거란이나 서하는 그래도 세폐만 적당히 챙겨주면 거기서 만족할 뿐 송나라를 통째로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여진족이 거란을 몰아내버리면서 상황이 급격히 바뀌었다고 하죠
처음에는 여진족들이 거란을 몰아낼 때 송나라에서 지원을 해줬기 때문에 여진족들도 나름 송나라에 호의를 보이는 등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진족들이 금나라를 건국한 후에는 송나라에서 이이제이 즉 오랑캐는 오랑캐로 상대한다는 전략을 쓰면서 이번에는 거꾸로 거란에게 지원을 해주면서 금나라를 자극해버린게 문제였죠
게다가 금나라가 결국에는 거란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도 송나라는 금나라를 우습게 보고 약속했던 물자를 보내주지 않고 배짱을 부렸습니다
때문에 금나라는 송나라를 박살 낼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송나라의 관리 하나가 무려 2000명이라는 병력을 이끌고 고작 16명밖에 되지 않는 금나라 사신단을 습격하는 일이 일어났죠
황당한 것은 그 16명의 금나라 사신단에게 송나라 병사들이 패배를 당했고 사신단은 무사히 자신들의 영토로 귀환을 했다고 하는데요
이 일로 금나라는 송나라가 단순히 병사들의 수만 많을 뿐 실제 전투력은 약해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아예 송나라를 집어삼켜버릴 생각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렇게 벌어진 전쟁에서 송은 순식간에 수도인 개봉을 함락당하고 송나라 황제와 많은 중신들 그리고 황족들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죠
그 와중에 당시 송나라 황제의 아들 중 하나가 겨우 화를 피해서 장강 남쪽지역인 임안(오늘날의 항저우시)을 수도로 삼아 남송을 건국하게 됩니다

그나마 남송은 지난날 자신들의 실수를 깨닫고 국방력을 강화하면서 비록 금나라에게 세폐를 바쳐야 하는 상황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장강 이남의 영토는 지켜내는데 성공을 했죠
하지만 남송은 과거 북송시절 쓸데없이 금나라를 자극했다가 한번 나라를 말아먹었음에도 또다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뻘짓을 하다가 또 한 번의 멸망을 불러왔습니다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몽골이 금나라와 싸운다는 소식을 들은 남송은 이번에도 이이제이 정책을 주장하며 몽골을 지원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금나라는 남송에게 우리가 망하면 다음 차례는 바로 송나라가 될 것이라며 그들을 설득해보려 했지만 금나라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던 송나라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했죠
그렇게 몽골에 의해 금나라가 멸망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금나라를 멸망시킨 몽골이 이번에는 해외를 정복하는데 잠시 눈을 돌린 사이 남송이 북송 시절의 영토를 되찾겠다며 20만 대군을 끌고 화북지역을 침공하는 단평의 입락 분쟁을 일으키면서 스스로 화를 자초했습니다
분노한 몽골은 1235년부터 1279년까지 무려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요하게 송나라를 공격한 끝에 결국 그들을 멸망시켜 버렸죠
이후 한족들은 몽골에게 150년 동안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아야 했고 명나라가 세워졌을 무렵에는 인구가 무려 절반 이하로 줄어 있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허약한 군사력 때문에 외세의 침략을 받고 멸망한 것은 아쉬운 부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송은 경제적으로 매우 뛰어난 데다 사회도 매우 개방적인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수많은 문화들이 발달하는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게다가 정치적으로도 안정적인 중앙집권화를 이뤄내면서 황제를 제치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환관이나 외척도 없었기 때문에 남송시절에는 황족과 관리들 병사들 그리고 일반백성들까지 모두 나라를 따라서 40년에 걸친 몽골의 공격을 버텨내기도 하는 단합력을 보이는 등 중국의 다른 왕조들에 비해서 좋은 평가를 받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송나라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나라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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