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만만하게 보다가 을지문덕 장군에 의해 살수에서 대패하여 수나라를 중국 역사상 최단기간에 말아먹은 장본인이자 온갖 폭정과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 수양제 이야기 2부입니다.
전편에 이은 중국 3대 폭군 수양제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온갖 모략과 갖은 술수를 부리며 드디어 황제가 되어 폭정을 일삼던 수양제에게도 복종하지 않고 통제가 불가능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바로 고구려였죠.
주위에 있던 나라는 모두 복속시켰고 말을 안 듣는 나라는 군대를 파견해 쑥대밭을 만들기도 했지만 오직 고구려만이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았고 조공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수문제 시절에도 30만 병력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실패했었고 그 실패의 여파로 수나라 국력이 휘청일 정도였으니 고구려를 섣불리 공격할 수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수양제가 돌궐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고구려 사신을 만났고 그 사신에게 조공을 바치지 않으면 고구려를 정벌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사신은 곧장 고구려 왕인 영양왕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영양왕은 이 요구가 부당하다 생각하여 거절했죠.
이에 수양제는 그나마 남아있던 모든 국고를 고구려와의 전쟁에 탕진하게 됩니다.
백성들의 엄청난 희생을 제물로 삼아 전쟁 준비를 마친 수양제는 612년, 총병력 113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정벌에 나섰죠.
출발하는 데만 40여 일이 소요되었고 그 행렬은 400km에 이르는 긴 행렬이었습니다.
이 수치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세계 역사에서 가장 많은 군사 수를 동원한 기록으로 남아있죠.
고구려의 요동성을 포위한 100만 육군은 단 1명의 군사도 성벽을 오르지 못했고 10만의 수군은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을 단독으로 공격했지만 고구려 군에 대패하여 절반 이상이 궤멸 상태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수양제는 우중문과 우문술에게 30만의 별동대를 편성해 평양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죠.
하지만 별동대가 출발할 때 각 병사들에게 100일 치의 식량을 한꺼번에 줬는데 개인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무게였기 때문에 병사들은 몰래 식량을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식량이 부족해졌죠.
그래도 수나라 군사는 우여곡절 끝에 평양성을 포위했지만 이미 사기는 꺾여 싸우려 들지를 않았기에 퇴각을 결정했는데 수나라 군대가 살수를 건널 때 을지문덕 장군의 고구려 군에 의해 총공격을 받아 30만 5천 명 중 살아돌아간 수나라 군사는 고작 270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그렇게 1차 고구려 원정은 처참한 패배로 끝나게 되었죠.
그리고 난 후 613년 3월에 수양제는 35만의 대군을 이끌고 또다시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이번에는 수나라 내에서 양제의 폭정을 보다 못한 예부상서 양현감이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고 수양제가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현재로 따지면 국방부장관급이었던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에 투항하자 부랴부랴 식량과 무기를 죄다 버려놓고 퇴각했습니다.
양현감의 난을 진압한 수양제는 다시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지만 수나라 내에서 수많은 반란이 일어나 나라 상황이 엉망이었고 이미 두 차례의 원정으로 국고가 남아나질 않았죠.
수많은 신하들이 고구려 침공을 반대를 했지만 고구려 공격에 반대하는 자는 모두 죽이겠다는 협박까지 해가며 3차 원정을 떠나게 되었죠.
그렇게 출병한 수나라 군사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날이 갈수록 탈영병은 속출했습니다.
고구려 또한 이런 수나라의 사정을 알고는 있었지만 수차례 수나라 군과의 전쟁에서 고구려 역시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기에 2차 침공 때 투항했던 곡사정을 잡아 수양제에게 내주며 형식적으로 항복할 의사를 밝혔죠.
그러자 수양제 역시 더 이상 무리해서 고구려를 침공하기엔 너무 타격이 컸기에 고구려의 제안을 받아들여 결국 모든 군사를 수나라로 되돌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수나라 내부는 이미 지극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여기저기서 반란이 터지고 있었기 때문에 점점 나라의 국운은 기울어지고 있었죠.
이러한 반란은 120여 건에 달했고 그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수양제는 수나라의 수도를 장안, 낙양, 강도 세 군데로 나누어 자신은 반란을 피해 강도로 가서 자포자기한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반란을 진압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정사도 돌보지 않았으며 오로지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습니다.
정신 차리라는 소황후의 말에도 그는 술에 취해
통쾌하게 술이나 마시지 왜 스스로 골칫거리를 만드는가?
출처 입력
라며 세월만 보내고 있었죠.
어쩔 때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더니
"좋은 머리로다. 이 머리를 누가 벨 것인가?"라고 말하거나 독을 탄 술을 놓고서 황후와 후궁들에게 "만일 적이 오면 네가 먼저 마셔라. 그다음에는 내가 마시겠다." 라고 하기도 했죠.
그러자 황후가 왜 그렇게 불길한 말을 하느냐고 물으니 수양제는
세상사 무상하고 인생은 꿈같으며 빈천 고락이 따로 정해진 것도 아니니 목이 잘린들 무슨 상관 일고.
출처 입력
라며 씁쓸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원래대로 복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 국가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가 되어버린 상황이었죠.
그러다 결국 근위대장이던 우문화급, 우문지급 형제가 반란을 일으켰고 수양제는 죽기 전 희대의 망언을 했는데 '짐이 무슨 죄가 있길래 목이 잘리지 않으면 안 되냐' 라는 둥
'천자가 죽을 때는 칼을 쓰면 안 되니 독을 가져 오라' 라는 둥
'나의 시신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라며 울면서 말하는 등 난리를 치다.
결국 자신의 허리띠를 풀어서 즉석 교수대를 만든 뒤 그렇게 수양제는 교수형에 처해져 50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이때 수나라의 황족이던 양씨 일족은 거의 모든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이후 양유는 3대 황제인 공제로, 이연에 의해 장안에서 옹립되었지만 공제는 말 그대로 꼭두각시 황제였으며 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남북조를 통일한 첫 왕조로써 위세를 떨쳤던 수나라는 건국 이후 고작 4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멸망했습니다.
현재도 중국인들은 중국 역사상 최악의 폭군을 꼽으라고 하면 주저 없이 바로 수양제를 1순위로 꼽을 정도이죠.
중국의 3대 폭군 중 한 명인 수나라 양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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