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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오키나와 전투. 태평양전쟁 중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전투

by 사탐과탐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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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전쟁 중 가장 잔인하고 비극적인 전투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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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3월 26일, 함대를 집결한 미군과 연합군은 일제히 오키나와에 집중 포격을 가했습니다 

그리고나서 4월 1일, 약 18만명의 병력이 오키나와에 상륙했죠

하지만 오키나와 섬에는 무언가 알수없는 불길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는데요

 

그렇게 너무 비극적인 오키나와 전투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죠

미군이 상륙한 섬이 적막했던 이유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에 잡혀 정보를 누설할것을 염려해 일본군은 이미 오키나와의 주민들을 섬의 남쪽으로 이동을 시켜 놓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 4월 6일이 되었을 때 충격적인 일본의 카미카제 공격이 시작되었죠

 

일본군은 폭탄이나 어뢰를 실은 항공기를 타고 적진으로 날아가 그대로 미군 함대에 꼴아박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4월 6일부터 6월 22일까지 약 80일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카미카제 공격에 동원된 일본의 항공기는 약 1900여대나 되었고 이로인해 미군의 전투함 26척이 침몰했으며 164척이 파괴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죽하면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인 니미츠 제독은 육군의 진격이 지지부진 한 탓에 해안에 묶여 있는 함대들이 카미카제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생각해 미 제 10군 사령관 사이먼 버크너 육군 중장에게 빨리 좀 진격하라며 압박을 주기까지 했었습니다

어쨌든 이 카미카제는 일본군의 최후의 발악이자 사람의 목숨을 극단적으로 경시하여 희생시켰던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작전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죠

 

한편 상륙한 미군과 연합군은 일본군의 본거지인 남부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미 육군의 진격이 더뎠던 이유는 일본군은 슈리성 주위로 여러겹의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미군은 이 일본군의 방어선을 뚫기위해 여러번의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시간도 많이 걸렸으며 엄청난 희생이 따를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섬의 험난한 지형을 이용한 일본군은 매복을 한뒤 기습공격을 하는 전술을 썼고 미군은 그런 일본군에게 휘둘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 주민 전원에 총동원령을 내려 웬만한 남자들은 죄다 징집했고 여성들까지 간호요원으로 만들거나 심지어 끌려가 몹쓸짓을 당하기까지 했죠

또한 일본군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잔인한 방법을 쓰기도 했는데요

바로 오키나와 주민의 아이들을 징집해 총알받이로 썼던 것이죠

 

일본군은 이런 소년병들에게 수류탄을 2개씩 지급했는데 하나는 적군에 던지고 하나는 만약 위험한 상황에 닥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용으로 사용하도록 2개를 준것이었습니다

아이들까지 전쟁에 이용하는것을 본 미군은 일본군의 잔인함에 경악을 금치 못했죠

또한 오키나와는 석회암 지대라서 '가마'라고 불리는 석회동굴이 굉장히 많았었는데 일본군은 이 가마에 주민들이 숨어있는 경우에 이들을 내쫓고 그곳을 점거하기까지 했습니다

 

게다가 일본군은 섬의 주민들 사이에 섞여 가마에 함께 숨어있는 경우도 허다했는데요

그러다보니 미군은 섬의 주민들까지 희생당할것을 염려해 항복을 권유하기 위해 전단지를 만들어 뿌렸죠

그러나 일본군들은 이미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만약 미군에 잡히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할수있고 지금 미군은 오키나와 여기저기를 다니며 집단 학살을 하고 있으며 여성들에게는 몹쓸짓을 하고 다닌다고 말도 안되는 헛소문을 퍼트렸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벌어진 비극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자면 미군에게 욕보일 것이 두려워 자신의 딸을 해한 어떤 노인은 미군이 소문과는 다르게 오히려 자국군보다 친절하고 심지어 식량과 약품까지 지급하자 그것들을 이미 죽은 딸의 시신 옆에 두고 서럽게 펑펑 울면서 자신이 저지른짓이 얼마나 무모하고 엄청난 짓인지 알게되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도조 히데키의 전진훈에 따라 살아서 포로가 되어 창피를 겪지말고 영예롭게 죽으라는 명령을 강요해 주민들이 느끼기에 미군의 포로가 되는것은 죽는것보다 더 큰 치욕이며 공포로 인식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오키나와 주민들은 미군에 항복하지 않고 그대로 동굴에 숨어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미군은 일본군이 같이 숨어있는 동굴을 그냥 두기에는 너무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어쩔수없이 수류탄이나 화염방사기를 이용해 동굴을 하나하나 제거해 나갔죠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주민들의 희생 역시 너무나도 컸습니다

 

일본군이 같이 숨어 있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큰 민간인 희생은 없었겠죠

이 뿐만아니라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항복하지 못하도록 강요하기 까지 했는데요

포로로 잡혀 일본군의 정보가 미군에 누설될까봐 주민들에게 다같이 목숨을 끊으라는 명령을 내리기까지 했죠

그러다보니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 강압에 못이겨 절벽에서 투신하기도 했고

이렇게 많은수의 주민들이 강제로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말았습니다

 

더 어처구니 없는건 명령을 따르지않는 주민들은 일본군 수류탄에 단체로 죽임 당하기도 했죠

그렇게 30여곳이 넘는 곳에서 집단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오키나와로 징집된 조선인 1만여명도 일본군들에 의해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에 오키나와 주민들의 반감 역시 매우 강하긴 했죠

그래서 전쟁이 끝난 이후 오키나와에 남아있던 일본군들 중에는 살아남은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무자비하게 복수를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잔인한 일들이 계속해서 벌어졌지만 미군의 진군은 멈추지 않았고 5월 11일이 되자 일본군의 본진인 슈리성 근처까지 도달할수 있었죠

그리고 치열한 전투끝에 5월 29일, 마침내 슈리성을 점령할수 있었습니다

이 오키나와 전투로 인해 총 20여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는 참극이 벌어졌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 중에서 주민들과 조선인들의 희생이 약 12만명으로 미군과 일본군의 사망자를 합한수보다 더욱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이 오키나와 전투는 태평양 전쟁에서 군인보다 민간인이 더 많이 죽은 너무나도 비극적이고 최악의 전투가 되었죠

그렇게 많은수의 미군들이 희생당하자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일본 본토에 상륙해서 또 이러한 엄청난 소모전과 피해를 미군이 받을것을 우려해 최후의 수단으로 본토 상륙말고 그냥 원자폭탄을 투하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마지막으로 일본에게 항복할것을 권고했죠

이에 스즈키 간타로 총리는 우리는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것이다라고 하며 항복을 하지 않았고 미국은 일본이 항복할 의사가 전혀 없다고 생각해 트루먼 대통령은 결국 원자폭탄 투하 명령문서에 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투하 되었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끝나게 되었죠

 

그리고나서 일본은 미국의 주도하에 평화 헌법인 '일본국헌법'을 제정하게 되었는데요

이 일본국헌법의 제 9조에는 '일본 국민은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행사는 영구히 포기한다' '육해공군과 그밖에 전력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 교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 라는 내용이 있죠

요즘 일본이 이 헌법을 개정해 전쟁하는 나라로 바뀔려고 하는걸 보니 참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거기다가 일본은 1982년 역사 교과서에 오키나와 전투 당시 일본군들이 오키나와 주민들의 목숨을 빼앗은 내용을 삭제 했다가 오키나와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2007년에는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스스로 집단으로 목숨을 끊으라 강요한 부분을 축소하고 삭제하려다가 추한 전쟁을 미화하지 말라며 11만명이나 되는 오키나와 주민들이 모여 규탄 집회가 벌어지기도 했죠

 

지금까지 태평양전쟁 4부작의 마지막 이야기 '오키나와 전투' 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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