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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강자로 거듭난 미국과 일본의 대립

by 사탐과탐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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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강자로 거듭난 미국과 일본은 끊임없이 서로 견제하고 대립했는데요
그러다 결국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공격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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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은 빠르게 진주만을 향해 기습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에 진주만은 불타 올랐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으면서 평화롭던 진주만은 지옥으로 변해버렸죠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일본은 결국 미국에게 핵폭탄 두방을 맞고 무조건 항복을 해버리는데요

 

오늘은 일본이 겁도 없이 진주만을 공습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을 계기로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죠

그러자 당시 영국과 동맹관계에 있던 일본도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약 4년 4개월만에 독일의 항복으로 세계대전은 종전을 맞이했고 승전국이었던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의 강대국들도 심각한 전쟁 후유증을 겪으며 전쟁피해를 복구하는데 모든 힘을 쏟고있었죠

이때 세계에서는 새로운 강자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미국과 일본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국력이 막강한 나라들은 함대의 규모도 계속해서 늘리고 있었는데요

해군력을 확충하는데 드는 어마무시한 비용은 강대국만이 가능했었기 때문에 당시 해군력은 강한 국력을 상징했습니다

일본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물자를 여러 나라에 판매하며 엄청난 이익을 남기게 되었고 이에 경제적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죠

 

이런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일본도 해군력을 확충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전함 8척과 전투함 8척을 만들어 일본 해군의 주력함대를 늘리려는 계획인 '88함대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전쟁도 끝났는데 더욱 강력한 해군력을 만들려던 일본의 속내는 사실 또다른 강대국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미국에서는 더이상의 전쟁 재발을 막겠다는 명목으로 당시 동아시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중국 등 9개 국가를 수도인 워싱턴으로 불렀습니다

이때 미국, 영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이 5개국은 해군 군비를 축소하는 협정조약을 맺게 되었는데요

이로써 일본은 88함대 계획에 발목을 잡히게 되었죠

 

사실 미국도 일본의 해군력이 강대해지고 있는것을 견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일본이 만약 이 조약을 거절하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될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죠

여기에 더해 미국은 1930년에 런던에서 열린 해군 군축회의에서 또다시 일본과 해군력 축소 조약을 체결하며 일본의 군사력이 강대해 지는것을 막았습니다

 

그러자 일본 내부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는데 심지어 다른나라들에 휘둘려 군사력을 축소한 일본정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들까지 생겨버렸죠

그리고 이 세력은 1930년 11월 14일, 평화외교를 내걸며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한 일본의 27대 총리 하마구치 오사치를 도쿄역에서 저격을 하는 사건까지 벌이고 말았고 총에 맞은 총리는 결국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미국과 여러 나라들을 향해 일본의 불만이 터지는 계기가 된 사건까지 발생하는데요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만들었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웠습니다

이때 일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던 미국이 만주사변은 일본의 침공이라며 맹비난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결국 국제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국제연맹이 진상조사를 시작했는데 일본 관동군의 군사행동이 있었으며 만주국이 만들어지는데 일본이 개입했고 이것은 일본이 만주를 불법 침공한것이라는 결론이 나버린것이었습니다

이에 일본 대사 마쓰오카 요스케는 결과에 분노하여 이 결과를 받아 들일수 없다며 회의장을 박차고 나가버렸죠

 

그리고 일본은 곧바로 국제연맹을 탈퇴 해버렸습니다

일본은 사사건건 자신들을 견제하던 미국이 너무 열받고 꼴도보기 싫었죠

그런데 1932년에 29대 일본 총리인 이누카이 쓰요시도 도쿄의 총리관저에서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요

 

놀라운 점은 이누카이 총리 암살을 주도한 사람들이 다름아닌 해군장교와 육군 사관생도였던 것입니다

이들은 군사력 축소 방안을 지지한 이누카이 총리를 일본의 국력을 약화시키는 나약한 총리로 여겼던 것이죠

이 총리 암살 사건은 일본내에서 군을 축소하려는 정부에 불만이 얼마나 가득했는지와 이 모든걸 강요하는 미국을 향한 거센 반미 감정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심지어 당시 반미감정이 얼마나 강했는지 백만명이나 되는 일본인들이 총리를 죽인 청년 장교들을 감형해 달라는 탄원서까지 냈다고 하죠

그 결과 일본 내부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을 그냥 묵살할수 없었던데다가 1930년대에 경제 대공황이 터진이후 지속적으로 경제가 파탄나자 일본은 내부 문제를 외부에서 해결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결국 전쟁을 통해 내부의 문제와 경제적 문제 모두 해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즉시 일본은 워싱턴에서 맺었던 군축조약을 파기시켜 버렸고 해군력을 포함한 군사력을 증강시키기 시작했죠

그렇게 일본 군부가 감행한 첫번째 전쟁은 바로 중국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중국의 자원을 수탈해 경제위기를 타개하려던 생각에서였죠

 

그렇게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는데 얼마안가 일본은 베이징과 톈진 등 60여개의 도시를 무차별 폭격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12월에는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 난징까지 점령하기에 이르렀죠

일본은 이곳에서 도망친 중국군 잔당을 수색한다는 명분으로 최소 12만명에서 최대 30여만명이나 되는 중국군과 중국인을 학살한 난징대학살 사건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통제 불능 상태로 마구 날뛰자 미국은 곧바로 일본의 경제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죠

 

당시 일본이 가장 많이 의존하던 수입국이 미국이었는데요

중일전쟁 당시 전함이나 무기를 만들때 들어가는 재료의 약 74%를 미국에서 수입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전함과 항공기 등을 움직일때 반드시 필요한 석유는 약 80%를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죠

미국은 이걸 모조리 막아버리는 초강수를 뒀던 것입니다

 

이렇게 일본은 미국의 압박으로 수출과 수입의 길이 모두 막혀버렸고 원료 부족 사태까지 겪게 되면서 전쟁 물자와 비용을 수급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죠

그런데 이런 일본의 위기상황을 타개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그것은 바로 1939년 9월에 발발한 제 2차 세계대전 이었죠

당시 서구 열강의 수많은 함대가 나치 독일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에서 자리를 비운것이었습니다

 

전부터 일본은 서구 열강들의 식민지이자 자원이 풍부한 동남아시아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는데요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노리고 있는걸 안 미국은 캘리포니아 기지에 있어야 할 함대를 하와이에 대거 주둔시키면서 일본을 견제하는 동시에 더이상 태평양에서 영역을 확대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었죠

하지만 이미 눈 돌아간 일본은 1940년 9월에 북베트남 국경을 넘어서 당시 프랑스령이었던 인도차이나 북부를 점령해버렸습니다

 

당시 미국은 2차대전에 참전은 안했지만 영국 등에 군수 물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만약 일본이 계속해서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들의 동남아 식민지를 빼앗고 전쟁에 필요한 자원을 얻는다면 결국엔 일본과 미국의 충돌은 피할수 없는 필연적인일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일본은 미국의 제재가 가해지기전에 독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를 삼국동맹이라고 불렀는데 삼국동맹 주요 조항중에 한가지가 동맹국 중 하나가 현재 유럽 전쟁이나 일본-중국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국가에게 공격당할 경우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수단으로 서로를 도울것을 약속한다 라는것이었죠

여기에서 분쟁에 관여하지 않는 국가란 바로 당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고 있던 나라인 미국이었습니다

 

그만큼 일본은 치밀하게 계산기를 두드려본 결과 미국이라는 수입원이 끊겼으니 그러면 동남아시아에서 수탈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독일과 이탈리아와 손을 잡는것이 그나마 나았던 것이죠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든든한 동맹국을 얻은 일본은 본격적으로 당시 프랑스와 영국, 네덜란드, 미국 등의 식민지였던 태평양과 동남아시아 일대를 점령해 나가기 시작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후엔 인도차이나 북부 뿐만아니라 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의 지역을 점령해 버렸죠

 

이에 1941년 2월,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진주만 기지에 태평양 함대를 창설함과 동시에 일본에 항공기 제조에 필요한 물자 수출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석유의 수출을 완전 중단하는 등 더 강력한 경제 제재까지 가했습니다

이에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도 했는데요

그러자 미국은 여러가지 협상조건을 내걸었는데 대부분 일본에게 지극히 불리한 조건이었으며 심지어 그 중 하나는 일본이 점령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철수할것을 요구했던 것이죠

 

이는 일본이 받아들이기가 힘든 조건이었습니다

이에 일본은 미국과의 모든 분쟁을 해결하려면 결국 전면전 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비밀리에 미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죠

또한 진주만과 오아후 섬의 지형지물을 미리 파악을 했고 모형 군함을 제작해 공습시 진입방법 등을 주도면밀하게 계획했습니다

 

그리고 스파이를 통해 미국의 가장 많은 함정이 항구내에 정박하는날이 일요일이라는것도 알아냈죠

그만큼 치밀하게 진주만 공습 준비를 마친 일본은 태평양 함대와 비행장과 항공기를 파괴 시키는것을 목표로 두고 항공모함 6척을 앞세워 진주만으로 떠났습니다

 

그렇게 일본과 미국의 운명을 좌우할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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