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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죄수가 만든 나라. 호주가 영국의 죄수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유

by 사탐과탐 2022.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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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는 영국이 죄수들을 호주 땅으로 유배보내서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호주로 보내진 죄수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되었고 영국은 왜 죄수들을 호주 땅으로 유배보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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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은 여기저기서 전쟁과 혁명, 개혁 등으로 인한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프랑스는 1789년 시민 혁명으로 인해 루이 16세를 마지막으로 절대왕정 시대가 끝이 나게 되었죠

또 다른 강대국인 영국(대영제국) 또한 7년 전쟁과 미국 독립 전쟁 등으로 국력을 상당히 소비하게 되는데 심지어 미국에 패배까지 하게 되면서 북미 대륙의 식민지를 모두 잃게 돼버립니다

 

영국은 식민지 하나를 잃었으니 다른 걸 또 빼앗기 위해 눈을 돌리게 되고 그렇게 해서 캐나다와 남아프리카 그리고 계륵 같은 존재였던 '미지의 남방 땅' 호주 중에 어디가 좋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호주라는 대륙이 발견되고도, 근 한 세기가 지나도록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 바로 그곳을 영국이 개척하기로 마음먹게 된것이죠

 

대체 그들은 갑자기 왜, 버려졌던 호주 대륙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것일까요?

오늘은 호주가 어떻게 해서 탄생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사실 영국이 호주를 처음 발견했던 것은 아니었죠

대항해시대가 한창이었던 17세기 초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박이 호주 북쪽의 케이프 요크 반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미지의 새로운 땅을 발견했지만 호주 전체 내륙을 탐험하지는 못하고 북쪽과 서쪽 일부만 탐험한 후 그곳의 땅이 너무 척박하다 판단하고는 뉴 홀란드라는 이름만 남기고 돌아오게 되었죠

이후로도 유럽과 너무 멀고 돈이 안된다는 이유로 네덜란드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비싼 돈을 들여가면서 굳이 호주 대륙을 탐험하고 개척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러 1769년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제독이었던 '제임스 쿡'(캡틴 쿡) 이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1년 후에 호주 동부 지역을 최초로 발견하게 되었죠

그곳을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명명하면서 호주 식민지 개척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비록 대항해시대 끝물에 올라타 뒤늦게 식민지 개척에 나섰지만 미국과 인도 등 노다지 땅을 식민지로 만들어내면서 순식간에 영국은 초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1765년에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면서 산업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죠

영국 역사상 나라 안팎으로 이렇게나 부흥했던 시절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엄청 잘나가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영광의 시간도 잠시뿐 1775년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이듬해에 미국은 독립을 선언하게 됩니다

결국 긴 전쟁 끝에 미국이 승리해 1783년에 완전한 독립을 하게 되었고 영국은 미국의 13개 식민지를 모두 잃게 되었죠

 

개인도 뭔가 손해를 보게 되면 억울해서 만회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초강대국이 신생국가에게 패배하고 노다지 식민지를 잃어버렸으니 어떻게든 만회를 하려 했겠죠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후보지로 캐나다와 남아프리카가 도마에 올랐는데 캐나다를 점령하자니 철천지 원수 프랑스와 또 싸워야 할 거 같고 남아프리카는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강하기도 했지만 사람이 살기에 너무 척박하고 개척해 봐야 돈이 안되기 때문에 탈락시켰죠

 

그래서 예전에 제임스 쿡이 깃발을 꽂아뒀던 미지의 땅 뉴 사우스 웨일스를 식민지로 만들기로 하는데요

하지만 다른 유럽 나라들도 바보가 아닌데 왜 호주를 수십 년이 흐르도록 가만히 놔두었을까요?

 

그 당시 재정으로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수지타산이 안 나왔기 때문에 다들 거들떠도 안 봤던 것이죠

영국 또한 막상 호주를 본격적으로 개척하려고 계산기 두드려봤더니 노답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영국에게는 다른 나라에서는 시도하기 힘들었던 한 가지 묘수가 있었죠

바로 죄수를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골칫덩어리였던 죄수들을 이주시켜 식민지 개척에 활용하는 것이었는데요

 

영국은 미국을 식민지로 삼고 있을때 죄수들의 유배 장소로 미국을 이용했었고 미국이 독립하면서 수 많은 죄수와 이주민들 그리고 그들의 노예들을 이주시켜야 하는 숙제도 있었던 상황이었죠

죄수를 식민지 개척에 활용하게 된 이면에는 18세기 당시 영국의 상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세기의 영국 백성들은 역사상 가장 혹독하고 비참한 시절을 보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정부의 토지 소유화 등으로 농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박탈해버리고 산업혁명의 여파로 인해 런던 등 대도시로 수많은 농촌 인구가 몰려들게 되었으며 동시에 기계에 밀려 일자리를 빼앗겨버린 실업자들로 넘쳐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뒤바뀐 세상 앞에 힘없고 가진 것 없는 농민들과 노동자들은 살아갈 방법이 없어져 버린 것이죠

그 당시 정부는 썩을 대로 썩어있어 자기네들 밥그릇 늘리는 데만 열중이었고 가난한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관심했습니다

 

기계에 밀려 일자리는 점점 적어지는데 일할 사람은 넘쳐나는 상황이다 보니 당연히 임금은 형편없이 낮아졌고 하루에 16시간~17시간씩 노예처럼 일해도 1실링 정도밖에 안되는 돈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그 당시 1실링이면 대략 1파운드(453g) 빵 8개 정도를 살 수 있었다고 하니 미래를 꿈꾼다는 것은 사치였으며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기에도 벅찼습니다

 

그나마 겨우겨우 일 자리를 구한 노동자들이나 저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지 대다수의 시민들은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범죄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는데요

이때는 법이 워낙에 엄격하기도 한데다가 급격히 늘어나는 범죄자를 수용할 시설 또한 부족해져서 웬만한 죄인들은 전부 사형에 처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계속 늘어났고 도저히 자국 내에서는 답이 안 보이자 미국의 식민지로 죄수들을 유배시키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당시 영국입장에서는 수용 시설 부족 해결과 식민지 개척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격이었습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새로운 식민지 개척을 할때는 아예 처음부터 죄수들을 유배시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마친 1787년 봄, 788명의 죄수와 선원, 이주민 등 약 1400여 명을 실은 11척의 제1선단(최초의 선단, The First Fleet)은 아서 필립 총독의 지휘하에 포츠머스 항에서 출항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들은 탐험가 제임스 쿡이 개척한 항로를 따라 기나긴 252일간의 약 2만 5천 km를 항해한끝에 1788년 1월 18일 드디어 호주의 동쪽 보터니 만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보터니 만은 물이 얕아 정박하기 힘들었고 지형이 험난해 식민지개척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뱃머리를 북쪽으로 틀어야 했죠

그렇게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간 제1선단은 1월 26일 개척지로 적합한 곳에 닻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항해를 지휘한 아서 필립 총독은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시드니 경의 이름을 따 그곳을 ‘시드니’라 칭했다고 하죠

그리하여 시드니 항을 처음 발견한 날인 1월 26일이 호주의 국경일이 된 것입니다

이후로도 영국은 꾸준히 호주로 죄수를 유배 겸 개척지 노동자로 보내게 되는데 죄수 유배가 중단된 1868년까지 약 16만 2000여명이나 보냈었다고 하네요

 

호주로 유배 오게 된 죄수들은 평균 7~14년의 기간 동안 혹독한 노역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발목에 쇠고랑을 찬 상태로 하루에 12시간씩 중노동을 해야만 했지만 형기만 마친다면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기에 이를 악물고 버텼다고 하는데요

고향인 영국에 돌아가봐야 더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을테고 호주에서는 자유인 신분을 얻은 채로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말이죠

그렇다보니 죄수들 중에 형기를 마친 후 영국으로 귀국하겠다고 한 이들은 고작 7%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호주는 영국 죄수들의 피와 땀으로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호주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지만 지금도 영국과 긴밀하게 엮여있는 나라이기도 하죠

지금까지 영국의 죄수들이 만든 나라, 호주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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