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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옹정제. 피 튀기는 숙청으로 폭군 이미지가 강했지만 알고보면 청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끈 성군 중에 성군

by 사탐과탐 2023.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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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는 강희제의 넷째아들로 황위와는 거리가 멀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결국 황제가 된 그는 피 튀기는 숙청으로 폭군 이미지가 강했으나 정치를 워낙 잘 했던 덕분에 청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끈 성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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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최고의 성군으로 일컬어지던 강희제가 죽기 직전 다음 황제는 넷째아들인 인전에게 물려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그렇게 강희제를 이은 다음 황제가 바로 옹정제 입니다

 

아버지인 강희제가 워낙 오래 황제를 해먹었기 때문에 그는 즉위 당시에 비교적 늦은 나이인 45세때 황제에 올랐죠

옹정제의 다음 황제가 바로 그의 아들 건륭제 인데 아버지 강희제와 아들 건륭제의 업적이 워낙 화려하다 보니 상대적으로 좀 저평가를 받고 있던 옹정제 였지만 최근에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잘 유지시킨 황제라고 재평가 받고 있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이 옹정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강희제 17년인 1678년 12월에 강희제의 4남으로 태어났죠

어머니였던 덕비 우야씨는 당시 서비였기 때문에 황손을 기를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적부터 황귀비이던 동가씨의 양자가 되어 그녀의 손에 길러졌는데 동가씨는 자식이 어린나이에 요절했었기 때문에 어린 옹정제를 친자식처럼 길렀다고 하죠

 

그리고 어린시절 강희제가 정무를 볼때 붓을 놓거나 옥새를 가져다 주는 등 여러 수발을 들게했고 그렇게 아버지의 눈에도 들면서 정치에도 관심을 가지게 하게 했던 것입니다

또한 여러 언어 (만주어, 몽골어, 한어)도 익혔으며 여러 경서들도 열심히 공부했고, 말타기와 활쏘기, 그리고 수영까지 열심히 배웠죠

게다가 옹정제는 중국 전역을 여행하며 식견을 넓혔고 80근이나 되는 활을 능숙하게 다뤘는데 그가 쏘는 화살은 백발백중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강희제는 사냥을 갈때 항상 옹정제를 데리고 갔으며 여러 지역에 순행을 갈때나 민정 시찰을 갈때도 옹정제는 항상 강희제를 수행해 함께 했다고 하죠

그런 그를 강희제는 예쁘게 봤는지 옹정제에게 여러 일을 맡기기도 했는데요

16세때는 공자의 고향으로 가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고 강희제가 준가르 갈단 칸을 공격할때 정홍기의 명예대장이 되어 전장에도 따라갔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갈단 칸을 추격하던 도중 기습을 당해 청군이 큰 위기에 빠졌지만 이를 물리치고 반대로 갈단 칸 군대를 섬멸해 버리는 공적을 세우기도 했죠

강희제는 그의 공을 높이 사 옹군왕에 봉했고 이후에는 병부와 호부의 일을 관장하기도 하면서 천천히 자신의 입지를 키워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황태자이자 자신의 이복형이던 윤잉이 점점 주색에 빠지고, 자신의 부하들을 아버지에게 보내 강희제의 행동을 관찰하는 짓을 벌였으며 나중에는 몇몇 대신들과 결탁하여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자 열받은 강희제에 의해 황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는데요

그렇게 4남이던 자신에게도 황제가 될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것이었죠

 

다른 여러 황자들도 자신만의 당파를 만들어 황태자가 되기위해 서로 치열한 황위다툼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강희제는 자식들끼리 황태자가 되기위해 서로 온갖 암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몸서리를 치고 있던 상황이었죠

그런데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 자리를 두고 온갖 암투를 벌일때 옹정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요

 

옹정제에게도 세력이 있었지만 누구에게 위협되지 않을 정도의 작은 세력에 불과했고 황위다툼에도 전면으로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강희제는 옹정제의 아들인 손자 훙리의 총명함에 완전 빠져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결국 강희제는 죽기직전 옹정제를 후계자로 삼게 된것이죠

 

그렇게 힘겹게 황제가 된 옹정제는 무시무시한 피의 숙청을 단행하는데요

이러면 이런다고 욕하고 저러면 저런다고 질책하는 등 어처구니 없고 말도 안되는 죄명들을 붙여 친동생 윤제를 비롯해 수많은 형제들을 쥐잡듯 잡아 버렸습니다

또한 숙청의 칼날은 신하들도 피해가진 못했는데 서북지역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연갱요라는 인물이 기고만장해 하며 무례하게 굴었던 것이죠

 

어느날 군영을 방문한 옹정제가 병사들이 땀에 쩔어 몹시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모두 갑옷을 벗고 좀 쉬도록 하라" 라는 명령을 내렸죠

그말을 들은 연갱요는 아무말없이 가만히 있었고 그러자 병사들도 가만히 있는것이었습니다

이에 옹정제는 못들었나 싶어서 다시 말했지만 연갱요와 병사들은 또다시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그리고 얼마 뒤 연갱요가 병사들에게 "황상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모두 갑옷을 벗고 쉬어라" 라고 하니 그제서야 병사들이 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옹정제는 "쉬지않고 일하려는 모습이 가상하다" 라는 말을 했지만 두번이나 자신의 말을 씹은 연갱요를 조져놔야겠다 생각했죠

 

그러던 1725년 2월 어느날,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좋은 길조가 나타나자 모든 대소신료들이 옹정제의 덕을 한껏 칭찬하며 아부하는 말을 올렸습니다

이때 연갱요도 옹정제에게 아부하는 말을 했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朝乾夕惕)라는 말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열심히 일을 하신다."(夕惕朝乾)라고 적어버린것이었죠

별일 아니었지만 옹정제는 이 일을 꼬투리 삼아 연갱요를 마구 공격했고 결국 연갱요는 집으로 돌아가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자신이 황자시절 든든한 후원자였던 외삼촌 롱코드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자 그가 국경문제로 러시아와 협상을 하러 갔을 때 병력을 보내 그를 체포하고 베이징으로 압송해 41가지의 죄목을 들어 그를 처단해 버렸죠

옹정제의 숙청의 바람은 형제 신하들 뿐만 아니라 한족의 학자들에게도 향했는데요

강서성의 과거시험을 관장하던 관리 사사정이 사서삼경 중 하나인 시경에 나오는 말인 유민소지(維民所止)라는 시제를 냈는데 옹정제는 유(維) 자와 지(止) 자가 옹정제의 연호인 옹정(雍正)에서 위의 변만 뺀 것인데 이는 자신의 목을 베어버리겠다는 의미라며 사사정의 구족을 멸해버렸죠

 

여담으로 전설적인 무기 '혈적자'는 당시 옹정제가 숙청 대상자들을 암살하기 위해 보낸 무사들이 사용했던 무기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런식의 무자비한 숙청으로 인해 옹정제는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는 여러 업적을 남기면서 훗날 역사학계에서 재평가가 이루어 지는데요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내외로 여러 업적을 남겼던것에 반해 그는 철저히 군사적인 활동은 배제한채 내치에 많은 비중을 두었죠

그는 밤 12시에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했으며 자는 시간 외에 거의 모든 시간을 정무 보는데 할애하는 등 정치에 매우 의욕적인 황제였습니다

그래서인지 강희제 때 마무리가 안된 내정 체계를 옹정제가 잘 정비할수 있었고 그 덕에 옹정제 역시 강희제만큼 훌륭했던 황제라고 찬사를 받는 것이죠

 

그는 수많은 개혁 정책을 펼치며 권력이 황제에게 집중되도록 했는데 그것 중 하나가 바로 군기처 설치였습니다

당시 옹정제는 황제의 개인 연락망인 주접을 강화시켜 신하들의 속마음을 알아냈죠

주접이란 황제와 신하가 개인적으로 주고 받던 간단한 편지 같은것인데요

 

황제와 신하가 무슨말을 주고 받는지 알길이 없었던 신하들은 더욱 행동거지가 신중해질수 밖에 없었고 그만큼 옹정제의 힘은 더욱 커졌죠

그러나 매일 들어오는 주접의 양이 많아지자 군기처라는 주접 전담 부서를 만들게 되었고 군기처에서는 3~5명의 군기대신이 밤낮 가리지 않고 교대로 근무하며 여러 일들을 시시각각 옹정제에게 보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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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정제의 비밀 정치에서 주고 받았던 엄청난 양의 이 편지뭉치는 자금성의 어느 구석진곳에 쌓여 있었는데 훗날 이를 모두 꺼내 112권에 달하는 <옹정주비유지>라는 제목의 전집으로 출판했다고 하죠

그 외에도 1727년엔 러시아와 캬흐타 조약을 맺어 국경선을 명확하게 그었고 자신이 황자였을때 황자들끼리 다퉜던 일들 때문에서 인지 그는 황태자 밀건법을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황태자 밀건법이란 누가 황태자라고 발표하지 않고 종이에 적은 뒤 상자 안에 봉해 두었다가 황제가 죽고나서 공개하는 방법이었죠

이러면 누가 황태자인지 모르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로 황자끼리 파벌을 형성하거나 신하들 끼리 대립하는 경우를 없앨수 있는 효과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옹정제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정책이 바로 지정은제라는 세금정책이었죠

원래 청나라에서는 토지세와 인두세를 따로 받고 있었는데요

※ 인두세 (정세) : 일정나이 이상의 주민 1인당 부과되던 세금

하지만 관리들에 의해 수많은 부정과 폐단이 벌어지게 되었고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이 도망가버리자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줄어들게 되면서 청나라에서는 안정적인 수입원을 얻지 못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강희제는 지정은제를 시행했는데 이것은 인두세를 따로 거두지 않고 토지세에 포함시켜 세금을 은으로 걷는 정책이었던 것입니다

인두세를 토지세에 통합하게 되면 토지의 소유자는 세금이 늘어나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세금이 사실상 면제였던 것인데요

당연히 땅을 많이 가진 부자들은 기존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했기 때문에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이런 극심한 반대와 논란 때문에 지정은제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삐걱대고 있었지만 옹정제때에 와서 마침내 제대로 시작된것이죠

옹정제는 지정은제에 반대하고 토지세 납부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가차없이 때려잡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지정은제에 반대해 과거시험을 치르려던 학생들이 단체로 시험 거부를 하자 열받은 옹정제는 한번만 더 단체행동을 하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해 버린다고 했죠

 

그리고 토지세를 미납한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하는 등의 강력한 대응을 한 끝에 많은 토지소유자들은 닥치고 시키는대로 하는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지정은제가 확립된것입니다

이 덕에 백성들은 토지도 없으니 토지세도 안내고 더이상 인두세를 내지 않아도 되다보니 애들도 많이 낳고 도망갔던 사람들도 돌아오기 시작했고 그덕에 청나라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죠

 

또한 옹정제는 관리들의 부정부패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여러 지역에서는 관리들이 백성들에게 원래 받아야하는 세금보다 조금 더 많은 세금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모선' 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관리들의 봉급이 너무 적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죠

 

명청대의 관료들 봉급은 중국에 있었던 수많은 나라들 중에서도 역대급으로 낮았던 것입니다

말단관리들은 봉급으로만 생활하기에는 빈민 수준을 벗어날수 없었고 더군다나 상사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접대도 해야하고 또 여러 사적으로 돈드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관리들도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수없이(?) 약간의 세금을 더 걷어 자신들이 사용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문제에 대해 강희제도 한마디 했는데 "세금에서 1할만 더 걷는다면 청렴한 관리다" 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사실을 옹정제도 알고 있었는데요

관료의 봉급이 지나치게 낮은 것 자체가 부정부패의 한가지 이유가 될것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옹정제는 이러한 관행을 완전히 근절시키지는 않고 모선을 정규 세금화 해버렸는데 그 대신 그 수치를 정해놓고, 그 범위안에서 합법적으로 징수하게 했습니다

또한 '청렴을 기르는 은'이라는 의미로 양렴은이라는 것을 관료들에게 지급했는데 녹봉에 이 양렴은을 더 주면서 관료들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제공하는 대신 만약 부정부패를 더 저지르면 가혹하게 처벌하는 정책을 취했던 것이죠

 

세금을 착복하거나 부정부패를 일삼은 관리들은 그 사람이 누구든 재산을 모조리 몰수해버렸고 은닉한 재산까지 찾아내 국고로 환수해버렸으며 부정부패로 인한 혜택은 그 관리의 가족들에게도 돌아간다해서 가족들은 물론 친구들, 친척들의 재산까지 모조리 몰수해버렸습니다

만약 부정부패를 일삼은 죄가 걸려 목숨을 끊은 관리가 있더라 하더라도 그 관리의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어 재산을 몰수해 버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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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아니라 너무 심하게 비리를 일으킨 관리나 지주는 그냥 처형해버렸는데요

그러다보니 관리들은 자신과 관련된 사람들까지 연루시키지 않기위해 예전처럼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 사리사욕을 채우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옹정제가 즉위하고나서 엄청나게 많은 관리들이 부패혐의로 쫓겨났고 만연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은 갑자기 흑자로 돌아서기도 하는 등 꽤 훌륭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죠

 

옹정제는 농업을 장려하기도 했는데 직접 농사를 짓기도 했으며 농사를 잘짓고 경험이나 기술이 뛰어난 농민에게 8품의 벼슬을 내려 다른 농민들의 농사에 도움을 주도록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수많은 지역의 토착세력이 대를 이으며 지방에서 세력을 키우고 강력한 군벌이 되어 나중에는 반란을 일으키는 모습을 본 옹정제는 중앙의 관리를 지방으로 파견해 그곳을 다스리게 하고 조정에서 파견한 군대로 지방군을 대체하게 하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펼쳐 지방 토착 세력을 견제하기도 하고 변방을 공고히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냈으며 이는 훗날 경제적, 문화적 발전의 토대가 되기도 했죠

 

그만큼 철저하게 지방을 관리 감독하고 딴 생각 못하도록 치밀하게 관리들을 통제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촉나라의 제갈량과 조선의 세종대왕처럼 지독한 일 중독자였고 신하들이 자기처럼 일을 하지 않으면 일을 강요하기도 했죠

오죽하면 어떤 사람이 '옹정제때 관리들은 굉장히 부지런하고 유능했다' 라는 말을 했는데 이때는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바로 관직에서 잘릴 정도였으니 그 말은 전혀 칭찬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강희제도 정무에 지치면 여러곳에 유람을 떠나기도 했는데 옹정제는 고작해야 베이징 근교에 있는 별장에 가끔씩 가는 정도일뿐 한번도 순행을 가지 않았고 오로지 집무에만 임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많은나이에 즉위하기도 했고 엄청난 신체적 무리를 주면서까지 일을하다보니 그의 몸이 남아날리가 없었고 과로로 인해 요양을 해야 할 정도까지 몸이 상해버렸죠

 

그런데 문제는 요양을 간 와중에도 일을 계속 했기 때문에 결국 1735년 8월(음력), 몸 상태가 굉장히 나빠져 쓰러졌다가 13년간의 재위기간을 마치고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워낙 열심히 일했다보니 과로사로 죽어버린 것이죠

옹정제가 그렇게까지 일 중독자였던 이유에는 여러 썰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강희제가 후계자로 지목한 사람이 열넷째 아들(十四子)이었는데 옹정제가 이것을 넷째 아들(第四子)로 고쳐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혹시 일을 잘 못하면 관리들이 반란을 일으키진 않을까 하고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설이죠

그러나 2013년 9월, 강희제의 유조가 공개되고나서 옹정제의 황위 찬탈 누명은 완전히 벗겨지게 됐습니다

 

옹정제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기에는 워낙 가혹했던 숙청 작업으로 인해 폭군이라는 인상이 강했지만 다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옹정제는 강희제의 기나긴 치세 뒤에 동요할수도 있었던 나라를 안정시키고 내실을 잘 다져놓은 명군이라고 평가 받고 있죠

그리고 옹정제 치세기때 유럽에서는 '청나라야말로 이 세상 최고의 유토피아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당시에도 평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금제도와 부정부패를 개혁하는것, 그리고 농업을 장려하고 지방 토착세력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에 혼란을 야기하는 것을 애초에 관리를 파견해 막았던것 자체가 전부 백성들 잘먹고 잘살게 해주려는 것과 같은것이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좋은 황제도 없을것 같긴 하네요

 

지금까지 천고일제의 성군 강희제의 뒤를 이어 청나라의 기반을 잘 다졌던 명군 옹정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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