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을 대놓고 까버린 빠꾸없이 오늘만 살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랜 시간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문화가 계속되자
과거 유교의 영향 때문에 그런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죠
하지만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정작 유교사회였던 조선의 선비들은
만약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고 여기면
목숨이 날아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대놓고 까버렸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오늘은 거침없이 왕을 까버렸던 조선 선비들의 일화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로 유명한 조식은 37살 때 과거시험에 떨어진 것을 마지막으로
더는 과거시험을 보지 않고 스스로 학문을 닦는데 집중한 인물이었는데
이후 명성이 높아진 조식에게 여러 번 관직을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는 관직에는 나가지 않은 채 현실정치에 많은 비판을 가했다고 하죠
가장 대표적인 글이 바로 그가 55세에
명종에게 단성현감의 벼슬에 오를 것을 제안받았을 때
명종의 제안을 거절하며 올린 '단성소'라는 상소문이었습니다
단성소에서 조식은 명종대신 수렴청정을 했던 문정왕후를 두고
남편 잃은 과부가 국정에 대해 뭘 알겠냐며 막말을 한 것도 모자라
명종 또한 아비 없는 고아라서 그런지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서
명종 밑에 있는 신하들도 백성들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오직 백성들의 재물을 긁어모을 생각만 한다며 비판했죠
때문에 이미 나라의 기틀이 무너진 지 오래고 백성들의 마음도 왕에게서 떠난 지 오래인데
만약 자신이 그런 명종 밑에 있어봐야 백성들을 착취하는 다른 관리들처럼 될 뿐이기 때문에
굳이 관직에 오를 생각이 없다는 뜻을 밝힌 글이었습니다
요약하면 대비인 문정왕후는 과부에 불과하고 명종은 아비 없는 고아일 뿐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는 비판이었죠
단성소를 읽은 명종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대단하신 대현자 조식을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단성현감 같은 작은 벼슬을 내리려 했구나"라고 말하며 조식을 비꼬는 말을 하고는
아무리 내가 어질지 못하다고 하더라도 한 나라의 임금인데
어찌 신하 된 몸으로 이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하냐며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때 옆에 있던 신하들이 간언을 올리는 선비를 함부로 죽이면 안 된다며 말린 끝에
조식은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하네요
경종이 즉위한 1720년 성균관에 '윤지술'이라는 유생이 있었는데
당대의 권신인 이이명이 선대국왕인 숙종의 일대기를 기록할 때
숙종이 장희빈을 죽인 부분을 편파적으로 기록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이명이 그런 행동을 했던 이유는 바로 경종이
숙종과 장희빈의 사이에서 나온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때 윤지술이 이이명이 쓴 숙종의 일대기가 편파적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이명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일개 유생이 당시 노론 세력을 주도하던 이이명을 당해낼 수는 없었습니다
노론은 윤지술의 언사가 불손하다며 집단으로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윤지술은 유배를 간 뒤 사약을 받고 죽게 되죠
다음은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사건중 하나로 꼽히는
김하재의 변에 대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김하재는 전 영의정이자 정조의 최측근 대신이었던 김양택의 아들로
1784년 음력 6월 20일 이조 참판을 지내던 중
남인 채제공을 탄핵했다는 이유로 유배당한 윤득부를 옹호하다가 관직을 잃게 되죠
그런데 김하재는 파직을 당한데 앙심을 품기라도 한 것인지
한 달쯤 후 예방 승지 이재학에게 쪽지 하나를 건냈는데
그 쪽지가 국왕인 정조를 욕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정조실록에 따르면 이재학이 그 쪽지를 펼쳐보니
도저히 임금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매우 참혹하고 흉악한 말들밖에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 사실이 알려지면서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충격과 공포로 발칵 뒤집혔으며
정조도 그 쪽지를 보고 "태어나서 이렇게 흉악한 글은 처음 본다
내가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렇게 참담한 일을 저지르는가?"하고 격노했다고 하죠
정조는 "과거에 김하재에게 미치광이 증세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게 도져서 이런 비정상적인 행동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말로 큰 충격을 받은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김하재의 글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조가 김하재를 국문했을 때 직접 말한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죠
영조가 즉위한 해에 이도현이라는 인물이
영조를 향해 경종에게 게장을 먹여서 독살한 살인마라고 비난했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정조는 김하재의 쪽지가 영조를 살인마라 비난한 이도현의 말보다 더 심하다고 직접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신들이 그 쪽지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줘서
김하재가 얼마나 미친 짓을 저질렀는지 알도록 하자고 말했을 때도
"이 쪽지에 들어있는 욕설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아프고 뼈가 저리게 할 정도인데
어찌 이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 주겠는가?"라고 말한 후 불태워버렸다고 하죠
이후 정조는 김하재에게 대체 왜 이런 미친 짓을 했는지 물었는데
그 이유가 정말로 황당했다고 합니다
영조의 정적이었던 김일경이 경종시절 신임사화를 일으켜
노론을 탄압했다가 갑진년에 죽었는데 올해가 바로 갑진년이기 때문에
자신도 김일경과 같은 악명을 역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 일부러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었죠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나 출세길이 보장된 그가
황당하게도 영조에게 처형당한 역적인 김일경을 본받아
역적으로 죽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왕을 욕하는 미친 짓을 저지른 어이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영조가 조선을 다스리던 1755년 2월 4일
전라도 나주의 객사 '망화루' 벽에 익명의 괘서가 붙었는데
그 괘서에는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이 써져 있었죠
그 사실이 영조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범인을 찾기 위한 수사가 시작되었고
나주에 살던 '윤지'라는 인물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습니다
그 결과 윤지와 그의 일족들은 물론 500명이 넘는 남인과 소론의 인물들이
사형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 사건을 '나주괘서 사건'이라고 하죠
영조가 나주괘서사건을 처리한 후 역적을 토벌했다며 특별시를 치르고
직접 현장에 나가서 답안지를 보게 되었는데
이때 한 명도 아니고 무려 두 명이나 답안지에 영조의 휘인 '금'까지 직접 꺼내면서
영조를 향해 패드립을 쳐버린 '시권변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범인중 한 명인 '심정연'은 영조의 어머니가
숙종과 인현왕후를 모시던 무수리 출신이라는 것을 이용해
"이금의 어미가 미천한 출신이라 그런지
그 아들인 이금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해 자신의 형(경종)을 죽이는 패륜을 저질렀다"
라는 내용을 답안지에 써서 제출했고
영조는 답안지를 다 읽지도 못하고 화가 나서
책상을 두드리면서 눈물을 터뜨렸다고 하는데요
과거 심정연의 형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영조에게 처형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조에게 한을 품은 그가 패드립으로 가득한 답안지를 냈던 것입니다
또 한 명의 범인인 '윤혜'는 웬 문서 하나를 가진 채로 잡혀왔는데
윤혜가 가지고 있던 문서에는 죽은 역대 조선왕의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고 하죠
영조가 놀라서 대체 왜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 이름까지 적어뒀냐고 물어보자
윤혜는 내 아들 이름으로 쓰려고 그랬다며 영조를 도발했습니다
당연히 대놓고 왕을 모욕한 심정연과 윤혜는 물론 그들의 일족까지 모두 죽음을 맞았고
신하들에게 굴욕을 당한 영조는 조상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역대 왕들을 모셔놓은 종묘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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