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기 직전 옥새를 치마에 숨기고 도망친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 순정효황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조선중기의 혼란 그 자체를 설명하는것이라고 말하는데요
정명공주처럼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뒤흔든 사건들을
전부 체험한 한 인물이 있습니다
이 인물은 바로 순종의 왕비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 윤씨이죠
오늘은 망국의 한과 일제 통치의 설움
그리고 8.15 독립과 6.25 동족상잔의 비극까지 겪었던
순정효황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1894년 9월 19일,
아버지 윤택영과 어머니 유씨의 장녀로 태어났죠
그러던 1904년, 당시 황태자비였던 순명효황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3년후인 1907년 1월, 13세의 나이로 황태자비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때 순종의 나이는 33살이었는데
이 둘은 무려 스무살이나 나이 차이가 났었죠
심지어 시동생인 의친왕보다도 17살이나 어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영친왕이나 덕혜옹주보다는 나이가 많았다고 하죠
그래서 세간에서는 윤씨의 아버지 윤택영이 황실과 사돈이 되기위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엄청난 뇌물을 뿌렸던 덕에
황태자비가 될 수 있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며
심지어 윤택영은 사위인 순종보다 2살 어리기까지 했는데
아버지의 욕심이 어린딸을 생과부로 만든다는 소문까지 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윤택영은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는데
부원군이 된 이후 빚은 갚지않고
지위를 이용해 더 큰 빚을 지면서 온갖 사치와 향락에 빠져 살았다고 하죠
그로인해 그는 '채무왕'이라고 불리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의 형이 바로 대표적인 친일파 윤덕영이었는데요
이후 채권자들이 윤택영을 찾아와 빨리 돈 갚으라고 난리를 치자
윤택영은 형 윤덕영에게 자신의 빚을 대신 갚아달라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윤덕영 역시 재물욕이 강했던 탓에
동생의 빚을 갚아주지 않았고
이로인해 대낮에 형제가 몸싸움까지 벌였다고 합니다
어쨌든 남편 순종과의 나이차이가 많이 났지만
부부사이는 원만히 잘 지냈다고 하죠
그러나 순종은 몸이 좋지 않아 자식을 낳지 못했는데
윤씨 역시 부부 관계를 못했을거라고 추정하고 있으며
둘 사이에 자식도 없었습니다
윤씨가 시집을 온 지 불과 6개월후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시아버지였던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것을 빌미로
일제가 고종을 겁박해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고
남편 순종이 황제로 즉위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윤씨도 황후가 되었죠
시어머니였던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가 무속을 신봉해
궁 내에서 굿판을 자주 벌였던것과는 달리
그녀는 무속을 멀리하고 불교를 가까이 했으며
1908년에는 여성의 교육을 장려하는 내용의 휘지를 내렸는데
어린나이에도 그런 모습을 보이니 사람들은
그녀의 현숙함과 덕을 높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후인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병합되어 멸망한 사건인
경술국치가 일어나고 말았죠
이때 창덕궁 흥복헌에서 어전회의가 진행되었는데요
친일파 대신들이 순종에게 한일병합조약 문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자
이를 병풍 뒤에서 듣고있던 순정효황후는 급히 순종을 불러내
"덕수궁 상황전하(고종)께 여쭤봐야 된다"라고 말하라고 귀띔해주면서
친일파가 강제로 도장을 찍어버릴것에 대비해
옥새를 자신의 치마속에 숨겨 그곳을 빠져나가버린 것이었죠
이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대단한 패기를 보여줬던 것입니다
그러자 왕비의 치마를 함부러 들춰볼수 없었기 때문에
친일파들을 비롯한 일본인들도 굉장히 당황했는데
결국 그녀의 삼촌이던 친일파 윤덕영이
그녀에게서 옥새를 빼앗았다고 하죠
그렇게 결국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고
순종은 황제에서 이왕으로 격하되자
순정효황후 역시 이왕비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나라가 멸망해버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어린나이에 몸소 겪고 말았던 것이죠
이후 순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지내다가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도 잃고 남편도 잃은 내가 단청 입힌 집에 머물수 없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곳엔 허울뿐이었지만 순종의 뒤를 이은 영친왕 부부가 머물수 있도록
자신은 낙선재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후 순정효황후는 일제강점기 내내 일제에의해 반쯤 감금 당하다시피 한채
무료하고 지루한 나날을 계속 보내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상궁, 궁녀들과 함께
한글 소설을 엄청 쌓아두고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녀와 상궁, 궁녀들이 읽었던 책들은 훗날 6.25 전쟁이 터지자
인민군들에 의해 막대한 양의 책들이 불살라졌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책들이 2000여권에 달한다고 하죠
그만큼 엄청난 양의 소설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던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을 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는데요
순정효황후의 아버지 윤택영은
일제 에게서 후작 작위를 받은 친일 반민족행위자였던 반면
그녀의 오빠 윤홍섭은 독립운동가였던 것입니다
순정효황후는 몰래 윤홍섭에게 독립 자금을 전달하기도 했고
임시정부 설립에 필요한 자금을 보태기도 했던 것이죠
어쨌든 핍박받던 일제 강점기 시절도 드디어 끝이나게 됩니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광복을 맞게 된것이죠
하지만 그녀의 삶은 여전히 힘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947년, 이왕대비에서 평민으로 전락하고 말았기 때문이죠
또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대한민국의 첫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여전히 순정효황후를 비롯해 낙선재에서 살고 있던 구황실 사람들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녀는 한강다리 폭파로 인해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 시민들과 함께 서울에 남겨지게 되었죠
이때 그녀의 남다른 패기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북한의 인민군들이 순정효황후가 있던 낙선재에 난입해
"윤비(순정효황후)가 누구냐!" 라고 소리치며 행패를 부렸다고 합니다
이때 상궁 궁녀 모두가 무서움에 벌벌 떨던 것과는 달리
순정효황후는 인민군에게 "이곳은 국모가 사는곳이다! 썩 물러가거라!"
라고 호통을 치자 기세에 눌린 인민군들이 물러났다는 이야기 이죠
하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많이 와전 된 이야기 입니다
원래는 인민군이 낙선재에 들이닥쳐 누가 왕의 부인이냐며 소리를 지르니
상궁들은 '마마께서는 여기 안계신다, 우리는 잡일을 하는 일꾼일 뿐이다'
라고 둘러댔다고 하죠
이때 순정효황후는 아무말 없이 방 가운데에 정좌한 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인민군은 그녀가 순정효황후 일것이라고 눈치챘다고 합니다
그러자 여러 상궁들이 '마마께서는 아프셔서 꼼짝도 못하신다'며
애걸복걸해 화를 면할수 있었다고 하죠
비록 인민군에게 호통을 쳐서 물리치지는 않았지만
인민군이 총부리를 들이대며 소리치는 상황에서도
미동도 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던걸 보면 대단한 인물이긴 한것 같네요
이후 인민군 몰래 창덕궁을 빠져나와
운현궁에 몸을 숨긴채 조용히 지내던 순정효황후는
1950년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했을때 다시 낙선재로 돌아왔지만
1951년 1월 4일 다시 후퇴를 하기 시작하자
그때는 피난길에 올랐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게 되었죠
이후 부산에 있던 한 사찰에 몸을 의탁해 궁핍한 생활을 이어나가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체결되자 다시 낙선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대통령이던 이승만에 의해 창덕궁은 국유 재산이라는 이유로 환궁을 거부당했고
결국 정릉의 인수재에서 지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지내는 동안에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불경을 읽으며 지냈다고 하는데
1959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하죠
또한 인수재에서 현금 4천환과 금반지 3개,
그리고 전화기를 절도 당하는 사건을 당하기도 하는등
온갖 수모를 당하며 살다가
1960년에 일어난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에야
드디어 낙선재로 돌아올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수많은 취재진이 환궁하는 그녀를 찍기 위해 몰려들었는데
원래 자신의 사진을 절대 못찍게 했던 순정효황후는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때마다 깜짝깜짝 놀랬다고 하고
이때 만큼은 할수 없이 취재진을 향해 포즈를 취하기도 했다고 하죠
이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도움으로
광복후에도 이승만 정권에 의해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채 일본에서 지내야만했던
덕혜옹주(1962년 귀국)와 이방자 여사(1963년 귀국)가
한국으로 돌아올수 있었으며
그렇게 함께 낙선재에서 생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영친왕을 자식처럼 아끼며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랬지만
영친왕(1963년 귀국)은 뇌출혈 후유증으로 인해
한국에 돌아올땐 혼수상태로 돌아와
바로 병원에 입원하는 통에 다시 만날수는 없었다고 하죠
그리고 가수가 된 의친왕의 아들 이석에게는
"나라가 망하니 니가 광대로 전락했구나" 라며 한탄했다고 합니다
이후 독서와 피아노 연주, 그리고 영어와 불경 공부에 매진하면서 지냈고
특히 영어 실력은 타임지를 읽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하죠
그리고 1966년 2월 3일, 낙선재에서 향년 72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삶을 끝맺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 유서를 남겼는데요
유서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죽고나서 남는 재물이 있으면
평생 자신을 보좌해주던 상궁들에게 나눠주라고 적어놓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온화한 성정과 기품을 잃지 않았기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로써 냉철하게 황실을 이끌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고 하죠
순정효황후는 태어나자마자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고
황후가 되기 직전에 을사조약이 맺어졌으며
왕가에 시집 간 이후 나라가 망하는 절망을 겪게 되면서
치욕스러운 일제강점기를 지냈습니다
그 이후로도 독립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6.25전쟁과 피난, 그리고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엄청난 사건들을 모두 체험했던 인물이죠
하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의 이미지는
그녀가 아닌 명성황후가 가져가 버렸기 때문에
많은 대중들이 순정효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모르고 있는것이 현실입니다
경술국치 당시 옥새를 치마폭에 숨겨 나라가 망하는것을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 했다는 점과
독립운동가인 오빠를 도왔던 점 등,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자신이 할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인정받아
현재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긴 하죠
지금까지 조선왕조 500년 최후의 황후였던
순정효황후 윤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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