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역사 탐구

흥안군. 반란에 가담해 왕위에 올랐던 선조의 아들

by 사탐과탐 2024. 3. 31.
반응형
이괄의난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조선의 왕위에 올랐던 왕자 흥안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이것은 바로 조선시대 왕들의 앞 글자를 따서 쉽게 외우는 방법인데요

 

광해군 다음 왕이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였죠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인조 2년에 단 3일간 왕위에 올랐던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선조의 10남이던 흥안군이죠

 

이 흥안군에게는 무슨일이 있었길래

인조가 있는데도 조선의 왕위에 오를수 있었던 것일까요?

 

오늘은 흥안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선조에게는 수많은 아들들이 있었는데요

 

바로 형을 제치고 왕위에 오른 광해군과

선조가 세자로 삼고 싶어했던 신성군

임해군, 순화군, 정원군 등 노답 쓰레기 3왕자를 비롯한

많은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흥안군은 그들의 이복 동생이었죠

 

그는 1598년에 태어나 인조보다 3살 어린 삼촌이었습니다

 

하지만 흥안군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은데요

 

호방한 성격에 왕자로써 풍류를 즐기며

특별할것 없이 그럭저럭 살아온 왕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1617년, 인목왕후의 폐비론이 불거졌을때

흥안군 역시 폐비에 찬성했었다고 하죠

 

그러던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났고

하루아침에 왕이 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중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생겼으니

바로 반정때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된 이괄이었죠

 

심지어 이괄은 공신이었지만 평안도 외지에까지 발령이 나자

이에 대해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인조반정을 주도 했던 반정공신들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극심해 수많은 사람들을 잡아와

반역 음모 혐의로 조사를 했었는데요

 

이때 이괄도 잡혀와 조사를 받았고

그 외에도 한명련, 정충신, 기자헌 등 많은 사람들도

반란 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잡혀와 조사를 받았던 것이죠

 

다행히 이괄은 무고로 밝혀져 풀려날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괄의 군중으로 금부도사가 찾아와

이괄의 아들 이전을 모반을 꾀한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잡아가려고 했는데

이때 이괄은 만약 아들이 모반죄로 죽으면

자신의 목숨도 위태롭다고 생각해

조정에서 보낸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죽여버린뒤 반란을 일으켜 버렸죠

그런데 그 이전부터 흥안군이 반란군과 내통해

역모를 꾀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요

 

이에 대신들은 흥안군을 붙잡아 가둬야 한다고 인조에게 건의했습니다

 

하지만 흥안군을 믿고 있었던 인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으며

공주로 몽진을 떠날때 흥안군 역시 데리고 가게 되었죠

 

한편 이괄의 반란군은 한양으로 남하하는 도중에

모반혐의로 압송중이던 한명련을 구출해 반란에 가담시켰고

이후 황주 신교와 마탄, 임진 등

여러지역에서 있었던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한양으로의 진격을 멈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때 흥안군은 공주로 피난을 가던 도중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 피난행렬을 빠져나와

다시 한양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반란군 측에 붙어버린 것이죠

 

이것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은 애초에 흥안군이

반란에 가담을 하려고 내통을 했거나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이후 1624년 2월 10일, 반란군은 한양을 점령했고

이는 조선 역사상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수도를 점령한

최초의 일이었죠

 

그리고 이괄은 곧바로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 했습니다

 

그렇게 흥안군은 조선의 왕(?)이 된것이죠

 

하지만 그의 왕위는 삼일천하에 그치고 말았는데요

 

다음날인 2월 11일, 이괄은 정충신이 이끄는 관군을 공격했다가

치명적인 대패를 하고 말았고

그렇게 이괄과 한명련 등은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쳤는데

관군의 끈질긴 추격으로 결국 패잔병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버렸죠

 

이후 이괄과 한명련은 부하 장수들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인 2월 12일, 이괄과 반란군이 와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흥안군은 이후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버리는데요

 

그렇게 흥안군은 단 3일동안만 왕으로써 지냈던 것이죠

 

그는 소천까지 내려가 숨어지내다

결국 소천 현감이던 안사성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한양으로 압송된 흥안군은

도원수 심기원과 신경진, 그리고 장만이 상의해

국청을 열지도 않고 1624년 2월 16일, 불과 26세의 나이로

창덕궁 돈화문에서 교형에 처해져 죽게 되었죠

 

흥안군은 정신없던 상황에 미처 피하지 못해

반란군에게 붙잡혔다가 얼떨결에 왕위에 추대된 것이 아닌

피난 가던 와중에 몰래 빠져나와 반란군에 적극 가담했기 때문에

처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대역죄인 이라고 해서 왕족을 아무나 함부로 죽일수는 없었고

왕족을 처형하려면 왕의 허락이 필요했던 것이죠

 

이때 심기원은 인조의 허락도 받지 않고 흥안군을 멋대로 죽여 버렸다보니

인조가 도성으로 돌아온 이후 심기원 일파를 하옥시켜버렸습니다

 

그러나 심기원은 그동안의 공적을 감안해 얼마안가 바로 풀려날수 있었지만

이 일로인해 인조의 눈밖에 나게 되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훗날 1871년, 고종은 그를 복권해주고 효희 라는 시호까지 내렸지만

그는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던 명백한 증거가 있었다보니

많은 신하들이 '역모를 일으킨 배신자를

복권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결국 1900년, 완순군 이재완의 건의로

흥안군은 다시 왕족의 직위까지 삭탈 당하고 말았죠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 이탄도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때 왕으로 추대 되었다가

이인좌의 난이 평정 된 이후 자결을 명받아 죽게 되었는데요

 

밀풍군은 가만히 있다가 반란군에 의해 추대가 되었기 때문에

다시 복권이 되었지만

흥안군은 진짜 이괄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었기 때문에

잠깐 복권 되었다가 다시 왕족 직위까지 삭탈 당하고야 말았던 것이죠

 

이때 이괄의 난이 성공하고 흥안군이 왕위에 올랐다면

광해군 인조 다음이 흥안군이 되었을수도 있겠네요

 

다만 반란이 실패하는 바람에 그는 형장의 이슬이 되어 죽어갔지만

누구 말처럼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는 말이

틀린말이 아닌것 같기도 합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순정효황후. 나라가 망하기 직전 옥새를 치마에 숨기고 도망친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

 

순정효황후. 나라가 망하기 직전 옥새를 치마에 숨기고 도망친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

나라가 망하기 직전 옥새를 치마에 숨기고 도망친 대한제국 최후의 황후 순정효황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파란만장 했던 인생자체는 조선중기의 혼란 그 자체를 설명

satamguatam.tistory.com

왕을 대놓고 까버린 빠꾸없이 오늘만 살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왕을 대놓고 까버린 빠꾸없이 오늘만 살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왕을 대놓고 까버린 빠꾸없이 오늘만 살았던 조선 선비들 이야기 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오랜 시간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문화가 계속되자 과거 유교의 영향 때문에 그런 부작용이 나타난 것이라

satamguatam.tistory.com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