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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황엄. 조선인이었지만 명나라 사신이 되어 태종 이방원을 멸시하고 농락하며 온갖 횡포를 부렸던 인물

by 사탐과탐 2024.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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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이었지만 먹고 살기 위해 명나라로 가서 환관이 된 후 다시 조선으로 사신으로 파견 되어
태종 이방원을 멸시하고 농락하면서 온갖 횡포를 부렸던 황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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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명나라의 3대 황제 영락제는 자신이 조카를 몰아내고

황제가 되어서 였을까요?

 

그는 굉장히 의심이 많았기 때문에 환관을 중용했었습니다

 

영락제의 대표적인 외치 중 하나인 대원정 역시

환관이던 정화에게 맡겼었죠

 

또한 조선에 흠차관(황제가 지방에 파견해 중대사를 처리하게 한 관료)으로써

사신을 보낼때도 신하들이 아닌 환관을 보냈었습니다 

그렇게 조선 초 태종시기 가장 많이 조선을 다녀간 환관이 바로

황엄이라는 인물이었죠

 

황엄은 굉장히 오만방자한 인물로써

1403년부터 1419년까지 총 9차례 이상 조선에 방문하면서

그때마다 조선을 굉장히 괴롭혔었는데

오늘은 명나라의 환관 황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는 원래 중국 출신이 아니라 평안도 의주 출신이라는 이야기가 있죠

 

어릴적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먹고살기 위해

혼자 국경을 넘어 명나라에 갔다고 합니다

 

이후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거세를 한 뒤 환관이 되어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그리고 영락제의 눈에 들어 최측근 환관이 되었고

이후부터 조선을 담당하는 사신단의 대표가 된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 대해 잘 아는 조선 출신 환관들을 이용해

조선을 감시하고 통제하려고 했었던 것이죠

 

그러기엔 조선에서 힘들게 자랐던 황엄이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황엄은 황제의 흠차관으로써 조선에 올때마다

황제를 등에 업고 엄청난 갑질을 해대기 시작하는데요

 

1403년 4월 8일, 그가 처음 영락제의 고명과 칙서를 가지고

조선에 왔을때의 일입니다

 

4월 10일, 명나라 사신단의 숙소인 태평관에서

태종이 황엄을 비롯한 중국 사신단을 위해 연회를 베풀었는데

황엄은 황제의 칙사라는 신분을 이용해

태종에게 끊임없이 술을 마시게 했고

무례한 태도로 태종을 희롱하기까지 했다고 하죠

 

연회 내내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이자

태종은 예정보다 일찍 연회를 끝내버리고

궁으로 돌아가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황엄에게 반성하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조선에 온김에 크게 한탕 제대로 해먹을 요량이었는지

재물을 모으는데 힘을 썼다고 하죠

 

그때마다 태종을 비롯한 조선의 신하들은

그에게 쩔쩔 맬수밖에 없었는데

황엄은 그런 조선의 왕과 대신들의 태도를 보고 즐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황엄이 다시 명나라로 돌아갈때도

효령대군을 비롯한 수많은 왕실 종친들과 문무 백관들이

한양에서 개성과 평양 의주에 이르기까지 전송을 해주며

계속해서 연회를 열고 온갖 진귀한 선물들까지 갖다 바쳐야

겨우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하죠

 

그리고 3년후인 1406년 4월, 그는 다시 조선에 방문하게 되는데요

 

열렬한 불교신자이기도 했던 영락제가

제주도에 있는 동으로 된 불상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또 다른 목적으로는 그 명분으로 제주도를 찾아가

제주도 상황이 어떤지 염탐을 하려는 목적도 가지고 있었죠

 

그렇게 또 다시 태평관에서 연회가 열렸고

황엄이 만취해서 먼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자

한첩목아라는 조선 출신 명나라 환관이 태종에게

제주 법화사에 있는 아미타삼존불상은 원나라때 양공이 만든것으로

원래 자신들의 것이니 가져가야겠다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태종은 웃으며 마땅이 그래야 한다고 말하면서

근데 바다를 건너 오다가 부처의 귀에 물이 들어갈까 두렵다고

유머러스하게 받아쳐버렸죠

 

이 말을 들은 한첩목아 등 많은 사람들이 크게 웃었는데

태종은 이미 그들에게 제주도 염탐의 목적도 있다는것을

눈치채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급히 사람을 보내 법화사의 동불상을

전라도 나주에 갖다 놓으라고 명했고

몇일 후 황엄 일행은 동불상을 가지러 출발했죠

 

그런데 이때 태종은 황엄 일행 배웅에

신하를 보내고 자신은 가지 않았는데

황엄은 태종이 직접 자신을 전송하러 오지 않았다는 것을

굉장히 언짢게 느끼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태종의 명을 받은 신하들이 제주도 동불상을

나주에 갖다 놓자 황엄은 결국 제주도 까지는 못가고

나주에서 동불상을 실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죠

 

그런데 돌아오는 길 역시 순탄치는 않았는데요

 

황엄 일행은 동불상 3좌를 옮겨 왔는데

동불상을 운반할 상자 같은걸 만드는데도

모란, 작양, 황규 등 온갖 꽃 등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무와 철, 그리고 당시 굉장히 값 비쌌던 종이와 면화 등

엄청난 양의 물품들을 이용했던 것이죠

 

이런 비용들 역시 모두 조선의 몫이었고

조선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심지어 옮기는 짐꾼들도 수천명이 넘었는데

이동하면서 마을에 머물때마다

옛 청사는 좁고 더럽다고 해, 매번 새 청사를 새로 지어 그곳에 묵었으며

지나가는 곳 마다 막대한 양의 물자를 써야 했고

수많은 재물을 바쳐야 했던 것이죠

 

이때 전라도 관찰사 박은은 재량껏 물자의 수요를 줄였지만

충청도 관찰사인 성석인은 황엄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황엄은 박은에게 화를 내었지만

성석인에게는 굉장히 칭찬해 주었다고 하죠

 

이후 박은은 중국의 사신이 조선에서 함부로 행패부리는걸 막지 못했다며

사직을 청하기 까지 했었습니다

 

한편 황엄 일행은 계속해서 한양으로 돌아오고 있었는데요

 

이때 태종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마중을 나가지 않았습니다

 

7월 16일, 마침내 황엄 일행이 한양으로 돌아왔는데

태종이 마중을 나와있지 않자 황엄은 굉장히 불편한 심기를 보였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황엄이 태평관에 도착하자 조선 대신들이 그를 맞아 인사를 하고

연회를 열고자 했지만 황엄은 "지금 전하를 뵙지 못했으니 예를 받을수 없소" 라며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황엄은 조선 대신들에게 나중에 태종이 동불상을 맞이할때

오배 삼고두를 했으면 한다고 얼토당토 않한 요구를 했던 것이죠

 

유학을 숭상하는 태종이, 부처에게 절을 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는데요

 

황엄의 말을 들은 태종은

어찌 황엄이 이토록 자신을 욕보일수 있냐며

황제의 명을 받아 불상을 수송한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때려죽이기 까지 했으니 이것 또한 중죄라고

이것을 영락제에게 고발 하겠다고 말하면서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러자 태종이 가장 신뢰하던 좌의정 하륜과 우의정 조영무가

"황엄이 난폭하다는건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으니

일단 불상에 절을 하는게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러자 태종은 더 크게 화를 내면서

"내가 두 정승을 믿고 불상에 절을 하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보니 나의 신하 중에서는

의로움을 지키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는걸 알겠다

고려의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갔을때

고려 신하들 중에서 그 누구도 충혜왕을 구원하려 드는자가 없었다

내가 위태롭고 어려움을 당해도 이와 같을것 같구나"

라고 한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나서 이틀뒤에야 태종은 태평관을 찾아갔는데

이때 황엄은 예상대로 태종에게

제주에서 가져온 동불상에 절을 하라고 요구했죠

 

황엄은 태종이 확고한 숭유억불에 대한 신념이 있다는걸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마중하러 나오지 않은 태종에 대한 불만을

그런식으로 표출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태종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것이죠

 

황엄의 요구에 태종은

딱봐도 자신을 욕보이기 위해 이러는 것이라는걸 눈치챘지만

명나라의 사신이었기 때문에 뭐라 하지는 못하고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내가 이곳에 온것은 명나라의 사신을 위해 온것이지

불상을 위해 온것이 아니오

만약 이 불상이 명나라에서 왔다면

내가 마땅히 절을 올리고 공경의 뜻을 보이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절을 할 필요가 있겠소?" 라고 한것이죠

 

그러자 황엄은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고 가만히 있더니

알겠다고 대답했고 그렇게 태종은 불상에 절을 하지 않을수 있었습니다

 

이후 황엄은 동불상을 들고 명나라로 돌아갔는데요

태종도 반송정까지 그들을 전송했다고 하죠

 

그 이후로도 명나라에서는 황엄을 시켜

제주도 법화사의 동불상 뿐만아니라 수많은 불상을 빼앗아 갔으며

이듬해인 1407년에는 태조 이성계가 애지중지하던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포함해 300개가 넘는 사리를

반 협박을 통해 가져가기도 했습니다

 

1408년에 황엄이 조선을 찾아 왔을때는

명나라에 데려가기 위한 공녀를 차출하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하필 이때 태조 이성계의 장례와 겹쳐서

태종은 심신이 많이 지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명나라 사신으로 오는 황엄을 쌩깔순 없으니

상복을 벗고 황엄의 접대를 하기 위해 태종이 나섰죠

 

그런데 황엄이 이때도 무례한 요구를 하는데요

 

바로 태종에게 고기 반찬을 먹으라고 강요했던 것이죠

 

당시 부모님의 상중에는 고기 반찬을 먹으면 안됐었기 때문에

그의 요구는 태종에게 굉장히 곤란한 요구였습니다

 

그래서 태종은 "내가 지금 상복이 아닌 담복을 입은것은

단지 사신을 위해서 입은 것입니다

지금 삼년상 중이니 고기를 먹는것은 불가합니다" 라고 거절했고

황엄이 재차 요구했지만 태종은 거절했죠

 

어쨌든 황엄은 권집중의 딸 권씨를 비롯해

10세~18세의 여성 5명을 뽑아서 명나라로 데려갔습니다

 

이때 명나라로 갔던 권씨가 바로 영락제의 비가 된

현비 권씨 이죠

 

황엄이 여성들을 데리고 명나라로 출발할때

부모와 친척들의 울음소리가 한양 전체에 울려퍼졌는데

이때 그들을 위해 권근이 시를 지었고

그 시가 바로 구맥요 라는 시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구맥요의 내용은

"보리가 익어야 보리를 거두는데

날이 저무니 계집아이를 찾네

나비도 오히려 눈이 있거늘

아직 꽃피지 않은 가지를 와서 꺾네"

라는 내용이었죠

 

끌려가는 어린 여성들을 보리에 비유해

아직 다 피지도 않은 어린 여성들을 골라서 데려가는

이런 슬픈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엄은 이듬해인 1409년에도 조선에 와서 처녀들을 데리고 갔다고 하죠

 

그런데 황엄은 양녕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이 세자가 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황엄이 조선에 방문했을때 충녕대군과 대화를 나눈적이 있는데

그의 굉장히 총명한 모습을 보고 감탄했던 것이죠

 

그리고 충녕대군이 영명하고 똑똑한것이 부왕 태종을 닮았다면서

그가 왕이 될것이라 여기고 있었는데

1418년에 조선에서 세자를 바꾼다는 표문이 명나라에 올라오자

황엄은 그때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었구나 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후 1419년에 그는 사례감 태감이 되었으며

그 뒤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고 하죠

 

그런데 1427년이 되어서야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졌는데

어여의 난 때 권현비 독살사건에 연루되어 그의 집안이 몰락해버렸다고 합니다

 

전재산을 몰수 당했고 그의 아내를 비롯한

집안 모든 사람들이 노비가 되는 처벌을 받았죠

 

그리고 그때 이미 황엄은 세상을 떠나고 없었는데

무덤이 파헤쳐져 관이 잘려지는 처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1427년 이전인 1423년 쯤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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