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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정명공주.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예송논쟁, 경신 대기근을 모두 겪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

by 사탐과탐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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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예송논쟁, 경신 대기근을
모두 겪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여인. 정명공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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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는 죽어서

자식들의 비참한 삶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지만

인목왕후는 살아서 자식들의 처참한 삶을

모두 목격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인목왕후에게는 정명공주와 영창대군 두 자식이 있었는데

둘의 삶을 보면 경혜공주와 단종의 삶과 매우 흡사한 면이 있죠

 

그놈의 왕자리가 뭔지 혈육들에게 왜 이런짓까지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명공주는 경혜공주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불쌍하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된 비운의 여인인데요

 

정명공주는 무려 83세까지 장수를 하면서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까지

6명의 왕을 거쳤을 정도로 굉장히 오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인생 자체가

조선 중기의 혼란함 그 자체를 설명해주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오늘은 정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명공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선조에게는 가장 총애하던 후궁이 있었는데 그녀는 바로 인빈 김씨였죠

 

그리고 선조는 인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신성군을 낳았습니다

 

자신이 총애하던 후궁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으니

그때까지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던 선조는

장성한 다른 아들들을 제치고 신성군을 세자로 삼고 싶어했죠

 

하지만 나이도 어렸고 세자로 삼을 명분이 없었기에

계속 시간만 질질 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592년, 마침내 조선의 운명을 뒤흔든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되었죠

 

그러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고

사태를 수습하라는 명을 내린채 자신은 의주로 몽진을 떠났습니다

 

사실 선조에게는 서장자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예전부터 쓰레기 기질이 다분했었기도 했고

신성군은 이미 죽고 없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들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 황제이던 만력제도

총애하는 후궁의 아들을 황태자로 삼고 싶어 했기에

장자를 황태자로 삼으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계속해서 무시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죠

 

이럴때 만약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한다면

명나라에서도 장자가 아닌 후궁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을수도 있었기에

명나라 신하들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극구 반대하고 나섰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 외에도 전쟁을 잘 헤쳐나간 광해군에게 민심은 기울고 있었고

반대로 선조의 위신은 추락할대로 추락해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열등감도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선조가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미워하자

광해군과 그의 편에 선 신하들 역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요

 

이후 그들이 느끼던 불안감은 현실이 되고 맙니다

 

바로 선조가 51세의 나이로 19살밖에 안되던 새 중전을 들였던 것이죠

 

그녀가 바로 인목왕후였는데요

 

인목왕후는 중전이 되자마자 얼마안가 임신을 했고

그러자 광해군 측 사람들은 혹시나 아들을 출산할까봐 몹시 두려워 했습니다

 

그래서 야사에 따르면 광해군과 그쪽 사람들은

인목왕후를 유산시키기 위해 도깨비 소동을 일으키거나

기왓장을 던져 인목왕후를 깜짝 놀래키는 등 온갖 짓을 다 저질렀다고 하죠

 

하지만 마침내 인목왕후는 출산을 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정명공주 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광해군과 그쪽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쉴수 있었고

광해군도 정명공주는 자신의 경쟁자가 될수 없으니

거의 딸뻘 되는 그녀를 굉장히 예뻐했다고 하죠

 

그런데 문제는 정명공주가 태어나고 불과 3년만에

또 인목왕후가 임신을 했던 것인데요

 

심지어 이번엔 아들인 영창대군이 태어난것입니다

 

55세의 나이에 적장자를 얻게된 선조는 뛸듯이 기뻐했지만

광해군 입장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이복동생이

마침내 나타나고야 말았던 것이죠

 

그러다보니 광해군은 인목왕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갔을때

영창대군과 정명공주가 있으면 정명공주는 머리도 쓰다듬어주며

귀여워 했던 반면 영창대군은 아예 투명인간 취급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창대군은 울면서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라고 했다고 하죠

 

광해군이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는 영창대군을 왕위에 올리고 싶어했는데요

 

하지만 선조는 얼마안가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그렇게 세자였던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이때 정명공주는 고작 6살, 영창대군은 3살밖에 되지 않았었죠

 

선조가 살아있을때까지만 해도 영창대군한테 잘해주는척은 해주던 광해군은

선조가 승하하자마자 점점 눈엣가시이던 영창대군과 거리를 두게 되었고

1614년, 결국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이던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는 역모사건인 계축옥사로 인해

영창대군은 폐서인 되어 강화도에 유배를 가게 되었고

불과 몇개월 후 증살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그 외에도 정명공주의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외삼촌들까지 모두 죽임 당하면서

외갓집이 풍비박산 나고 말았으며

어머니이던 소성대비는 서궁으로 강등당하고 자신도 옹주로 격하되어

어머니와 함께 경운궁에 유폐되고 말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 이후에도 '정명공주를 영창대군처럼 폐서인 해야 된다',

'궁에 두지 말고 밖으로 내쫓아야 된다' 등등 신하들의 주장이 나오자

소성대비는 하나남은 딸마저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찾는 사람들에게 "정명공주는 이미 죽었다" 라며 거짓말까지 했었습니다

 

그야말로 영창대군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제거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녀는 어머니 소성대비와 함께

유폐생활을 하게 되는데

<계축일기>에 따르면 선대 왕의 아내와 딸이었음에도

굉장히 궁핍한 생활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생필품이나 생활비를 받지 못해서

우연히 입수한 면화씨로 옷을 지어 입거나

까마귀가 물어다 준 박씨로 먹고 살았다는 야사도 있죠

 

그렇게 둘은 약 5년간 쥐 죽은듯 조용히 살게 됩니다

 

심지어 소성대비는 사랑하는 아들과 부모님, 형제자매까지 모두 잃었다보니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었죠

 

그래서 정명공주는 어머니 소성대비의 원한을 풀어주고 위로해주기 위해

그녀의 옆에서 선조의 글씨를 따라해 계속 글씨를 써서 보여주기도 하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 그러면서 글공부도 열심히해

정명공주는 굉장한 명필이 됩니다

 

그녀가 남긴 대단한 서예 작품이 하나 있는데

바로 '華政'(화정) 이라고 쓴 작품이죠

 

이 화정은 글자 하나의 가로세로가 73cm 정도나 되는 엄청 큰 글씨인데

당시 여성이 이런 굉장한 기세와 힘이 느껴지는 글자를 썼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폐시절에 썼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욱 놀랍죠

 

그렇게 꿋꿋이 버텨낸 정명공주는 드디어 어머니와 함께

다시 복위를 하게 되는데요

 

바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반정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폐모살제를 자행한 광해군을 몰아내는것이었기 때문에

인조는 이후 소성대비와 정명공주에게 깍듯이 모셔야 했죠

 

그런데 문제는 정명공주가 다시 공주의 직위를 되찾았을땐

벌써 21살의 나이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로 따지면 혼기를 놓친 엄청난 노처녀였던 것이죠

 

왜냐하면 그녀의 혼담이 오가던 11살때쯤엔

김제남의 역모사건이 일어나버렸고

그때쯤 정명공주는 천연두까지 걸렸었으며

심지어 갇혀 살다보니 혼담이 오가긴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뒤늦은 나이에 시집을 보내기 위해 부마 간택이 시작되었는데

이는 인조반정이 있고 고작 3일만에 벌어진 일이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얼마나 급했는지 반정의 수습도 덜된 상태에

부랴부랴 부마 간택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워낙 노처녀 였다보니 부마로 지원한 사람은

전국에서 고작 9명 밖에 되지 않았죠

 

정명공주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대부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결혼을 한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게 아니면 무슨 문제가 있는 남자 이거나

아니면 피치못할 사정으로 인해 결혼식을 미뤘던 남자들만 남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조모의 3년상을 치르느라 혼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던

18살의 홍주원이라는 인물이 부마로 간택되어

기존에 있던 약혼을 파혼시킨뒤 부마로 책봉했죠

 

이때 홍주원의 아버지인 홍영이 이럴순 없다며

결혼을 반대 하다가 귀양을 가기까지 하는등 난리가 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 부마가 된다는 것은 평생 잘먹고 잘살수 있긴 했지만

과거시험을 응시하지 못하고 관직에 진출할수 없었죠

 

또한 당시엔 남자라면 조정에 나서서 고관대작이 되는 것을

더욱 중요시했었기 때문에

사대부의 남자들은 대부분 부마가 되기를 꺼려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21살에 겨우 결혼할수 있었던 정명공주가 불쌍했는지

소성대비는 굉장히 호화스럽게 혼례를 치뤄주었죠

 

그리고 당시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는데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는 대저택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습니다

 

거기다가 막대한 양의 땅과 재산을 하사해줬죠

 

이후 정명공주는 7남 1녀를 낳으며 잘 먹고 잘살았는데요

 

하지만 정명공주 부부는 굉장히 오만방자한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실록에도 남편인 '홍주원이 나이가 어리고 교만하며 제멋대로이나

전혀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고 비판하고 있는데

홍주원은 종들에게 도둑질도 시키고

양반가 부녀자들을 능욕하기도 하는등 악행을 저질렀으며

오죽하면 사헌부에서 정명공주 집 종들을

아무런 논의도 없이 잡아 가두기도 했다고 하죠

 

그러자 정명공주 부부에게 핍박을 당해 온 백성들은

굉장히 통쾌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632년, 어머니이던 소성대비가

49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문제는 어머니가 죽고나서부터 인조와의 사이가 급격히 틀어져버린것이죠

 

바로 소성대비가 죽고나서 회은군 이덕인이 역모 고변을 한 일이 있었는데

문제는 소성대비가 이 사건에 연루가 되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인조가 왕위에 올랐는데

소성대비가 인조를 끌어내리려 역모를 꾀했다면

인조의 정통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렸기에

이 역모는 인조 입장에서는 사실이 아니었어야 했던 것이죠

 

그래서 인조는 고변이 접수된지 일주일만에 사건을 무마시켜 버렸는데요

 

이후 인목대비의 초상을 치르던 어느날

궁내에서 백서삼폭이 발견되었는데

이 비단에는 "왕을 폐위하고 세우는 일과 같았다"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던 것이죠

 

이 저주의 글을 받아든 인조는 '이것은 광해군과 연관이 되있는것'이라고 말했지만

한편으론 죽은 소성대비를 의심하게 되었고

죽기 전 2년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소성대비가 그럴리는 없었기에

그녀의 딸이던 정명공주를 더 의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즉시 인조는 국청을 설치해 이 사건에 대해 조사해보고

땅속에 묻혀있을 저주물품을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죠

 

하필이면 이때 인조가 갑자기 병에 걸리는 일이 발생했는데

이는 모두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번지게 됩니다

 

결국 소성대비를 모시던 궁녀와 상궁들이 주모자로 몰려 죽임당했고

정명공주를 모셨던 궁녀들까지 줄줄이 체포되어 엄청난 고문을 당하게 되었죠

 

다행히 그들의 입에서 정명공주가 배후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기에

목숨을 건질순 있었지만,

이후 그녀는 자신이 아무런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것을 보이기 위해

그 잘하던 서예도 그만두었고

조보(정부에서 발행하는 관보)를 받아 읽어보던것도 그만두게 됩니다

 

또한 집에서 바느질과 가사에만 몰두하며

인조의 의심을 사지 않기위해 노력했죠

 

그러던 1636년, 결국 병자호란이 터지게 되는데요

 

정명공주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기위해

자신이 타고 있던 배에 온갖 재물을 가득 채운채 도망치려 하고 있었죠

 

이때 많은 백성들이 몰려와 배를 태워달라고 애원하자

그녀는 재물들을 다 배밖으로 던져버리고 백성들을 태웠고

이 모습에 감명을 받은 백성들은

정명공주를 크게 칭송했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병자호란이 끝난 1639년

나이든 인조는 원인을 알수 없는 큰병에 걸리게 되었는데

자신이 아픈것은 저주 때문이라며 저주물을 찾게 하면서

또 다시 정명공주를 의심했죠

 

하지만 반정의 명분이 되어준 정명공주 였기에

최명길과 장유 등 많은 대신들이 인조를 말렸던 덕에

또다시 목숨을 건질수 있었습니다

 

광해군때에도 유폐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았는데

이번엔 인조 때문에 불안에 떨며 숨죽여 살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했을때도

효종은 조 귀인 저주사건에 정명공주도 연루가 되었다고 몰아갔지만

또 다시 목숨을 부지할수 있었고

다행히 이후 현종과 숙종대에는 왕실 최고 어른으로 대우받으며

편안하게 살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685년 83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조선의 왕녀들 중 가장 장수한 인물로 이름을 올리게 되었죠

 

정명공주는 계축옥사,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예송논쟁, 경신 대기근 등 조선 중기에 있었던 나라를 뒤흔든 사건들을

모두 겪었던 인물로 굉장히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할수 있겠네요

 

그래도 모든걸 버텨내고 오랫동안 장수 한걸 보면

강한자가 살아남는게 아니고 살아남은자가 강하다는걸 보여준

굉장히 강한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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