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최고어른인 대왕대비까지 오르지만 평생 기 한번 못펴고 주눅든 삶을 살았던 왕비이자
정치기반이나 권력기반 없이 왕비 자리에 오르면 어떻게 되는지 잘 보여준 여인
장렬왕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2016년 1월 30일 미국의 한 인터넷 경매사이트에
'일본 석재 거북'이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물품이 있었습니다
그걸 본 한국의 한 사업가는 그것을 9500달러에 낙찰받았죠
그리고나서 전문가들에게 그 물품이 뭔지 감정을 맡겼는데
그것은 일본 석재 거북이 아니라
조선시대 인조의 계비이던 장렬왕후의 어보로 밝혀졌던 것입니다
이에 이것을 구매했던 사업가는 국립고궁 박물관으로 어보를 보내
2억 5천만원에 매수해달라고 했지만
박물관 측에서는 심의 결과 도난품으로 밝혀졌다는 이유로
매입 대금도 안주고 어보까지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사업가는 민사소송을 제기했지만
재판부는 국립고궁 박물관의 손을 들어줬다고 하죠
그러자 자기 돈 써서 나라의 문화재를 찾아온 사람에게
나라에서 보상 하나 없이 그것을 몰수하고
문화재 환수 공적을 전부 가로챘다며 정부를 비난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사실 이 어보는 1676년에 만들어 졌었는데
6.25 전쟁 당시 도난을 당했었다고 하죠
어쨌든 어보의 주인인 장렬왕후는
이리치이고 저리치였던 산전수전 다 겪으며
불행하고 주눅든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녀는 비록 왕비가 되었지만
정치 기반이나 권력 기반이 전혀 없다보니 꽤나 무시당하며 살았는데요
오늘은 이 장렬왕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낳았던 인조의 정비인 인열왕후가
출산을 하다가 그만 산욕열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장렬왕후가 새로운 중전으로 궁에 들어오게 된것이죠
이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14살이었고
남편 인조와의 나이차이는 무려 29살이나 났다고 합니다
또한 명목상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보다 더 나이가 어렸고
손자인 현종과도 16살차이밖에 안났었죠
그러나 그녀가 궁에 들어왔을땐
이미 인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여인이 따로 있었는데요
그녀는 바로 악녀로 잘 알려진 소용 조씨 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장렬왕후는 인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며
그래서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도 낳지 못하고 있었죠
또한 그녀에겐 자식도 없었을 뿐만아니라
정치적인 기반도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온갖 모략을 일삼는 소용조씨의 눈치를 보며 살수 밖에 없었고
중전의 자리는 그냥 허울뿐인 자리였습니다
어린나이에 궁에 들어온 그녀는
그렇게 외롭고 쓸쓸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었죠
그리고 1649년,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26살의 젊은나이에 그녀는 대비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자신이 기댈수 있을만한 사람이던 남편마저 세상을 떠나버리고
온갖 암투가 난무하는 궁에 홀로 남아버린것이었죠
다음 왕위에는 효종이 올랐는데
어느날 귀인조씨 (소용조씨)가 장렬왕후와 숭선군부인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숭선군부인 신씨는 귀인조씨의 맏며느리이자
장렬왕후의 조카였는데요
귀인 조씨는 평소 며느리이던 숭선군부인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던 와중
효명옹주의 여종 영이를 데려다 숭선군의 첩으로 삼아버린것이죠
이에 숭선군부인은 장렬왕후를 찾아가 하소연했고
분노한 장렬왕후가 영이를 잡아와 문초하자
겁에 질린 영이는 귀인 조씨가 장렬왕후와 효종을 저주한다 라고
자백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영이와 귀인조씨, 그리고
효명옹주의 나인들과 하녀들이 모두 잡혀와 잔인한 고문을 당했고
결국 귀인조씨도 폐서인 되고나서 비참히 사사당했죠
그렇게 처음 궁에 들어왔을때 눈치를 보던 귀인 조씨를
자신이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그녀를 쳐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조정내에서 피바람이 불었으니
굉장히 난감해했을것 같죠
어쨌든 이후 장렬왕후는 효종과 인선왕후에게
어머니 소릴 들으면서 효도 받으며
그나마 나은 생활을 할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재위 10년만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36세의 나이에 대왕대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때 장렬왕후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 난리가 나버린
예송논쟁이 시작되었죠
조용히 살고 있던 장렬왕후로 인해
또 다시 조정내에 큰 사건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예송논쟁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효종이 죽고나서 인조의 두번째 왕비였던 장렬왕후가
참최복을 입어야 할지 기년복을 입어야 할지에 대한 논쟁이
바로 예송논쟁 인데요
<주자가례>에 따르면
첫째아들이 죽으면 그의 어머니는 3년복인 참최복을 입어야 하고,
둘째아들과 그 이후 아들들이 죽으면
1년복인 기년복을 입도록 규정되어 있었죠
이에 서인은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기 때문에
1년복인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고
남인은 왕은 일반 백성들의 예와는 다르게 해야 한다며
효종은 장남은 아니지만 인조의 적통 후계자이니
3년복인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한것입니다
이 문제는 서인과 남인의 격렬한 대립끝에
결국 현종은 1년복을 채택하게 됩니다
1차 예송논쟁인 이 논쟁이 바로 '기해예송' 이죠
이때도 그녀는 본인때문에 조정에 한바탕 난리가 나버린
당황스럽고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된 것 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의 위치에 올라갔지만
장렬왕후는 자식도 없고, 권력 기반이 하나도 없었기에
여전히 허수아비 대비에 불과했죠
그렇게 힘없이 쓸쓸히 지내던 장렬왕후는
한 궁녀를 총애하게 되어 처소로 들여 함께 지냈는데
그녀가 바로 훗날 희빈장씨가 되는 장옥정 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장렬왕후는 기센 손자며느리 명성왕후에게 치여
기를 펴고 살지 못하는데요
명성왕후는 숙종을 낳기도 했고 당시 서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성격이 담대해 직접 정사에 관여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신하들은 문정왕후를 거론하며
명성왕후가 정사에까지 관여하는것을 맹렬히 비판하기까지 했죠
심지어 명성왕후는 아들 숙종이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러
장렬왕후의 처소로 들락날락 하면서 만나게 된 장옥정을 마음에 들어하자
시할머니인 장렬왕후가 아끼는 궁녀였던 장옥정을
가차없이 궁밖으로 내쫓아버렸을 정도였습니다
이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는데
그만큼 명성왕후가 당시 얼마나 기가 셌는지 보여주는 대목이죠
손자며느리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장렬왕후는 한마디 못하고 살다가
먼훗날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부를수 있었는데
이땐 이미 명성왕후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손자며느리의 눈치를 보며 살았던 것이죠
그러던 1674년, 장렬왕후가 50살이 되었을때
며느리이던 인선왕후도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도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고
이 일이 바로 2차 예송논쟁인 '갑인예송' 이죠
그리고 불과 몇개월 후 손자인 현종마저 세상을 떠났으며
증손자이던 숙종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자식도 한명없고 기댈곳 하나 없는 궁궐에서
자신보다 아랫사람들에게 개무시를 당하며
평생동안 불행한 삶을 살았던 장렬왕후는
1688년 9월, 창경궁에서 64세의 나이로
한많던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훗날 영조는 정비이던 정성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51살이나 어리던 정순왕후를 새로운 중전으로 들이는데요
정순왕후도 명목상 아들인 사도세자보다 10살이나 어렸고
손자인 정조보다 겨우 7살 많을 뿐이었으며
정순왕후의 할아버지가 영조보다 5살 어렸었다고 하죠
정순왕후 역시 자식을 낳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뒷배가 워낙 탄탄하다보니
강한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고
나중에 순조가 즉위했을땐 수렴청정을 하기까지 했었습니다
이걸 보면 아버지나 형제들이 대단한 집안이거나
아니면 다음 왕이 될 아들을 낳거나 하지 않는이상
왕비가 되었어도 권력자들의 눈치를 봐야하는 그런 신세가 되는것 같네요
어릴땐 소용조씨에게 밀려 숨죽여 살았고
예송논쟁이 벌어지게된 원인이 되어 엄청 불편한 시기를 겪기도 했으며
늙었을땐 기센 손자며느리 명성왕후에게 치여
기를 펴지 못하고 평생 주눅들어 살았던 장렬왕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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