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왕후가 죽고난 이후 끔찍한 최후를 맞게 되는 그녀의 자식들
조선시대 어떤 왕이 꿈을 꿨는데
이미 죽은 자신의 형수가 꿈에 나타나
"니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니 아들을 죽이겠다" 라고 저주를 퍼부었던 것이죠
왕은 깜짝 놀라 잠에서 깬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방금 꿨던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바로 한명의 내시가 급하게 뛰어와
세자가 갑자기 죽었다고 말하는것 이었죠
그러자 왕은 자신의 꿈에 나와 저주를 퍼부은 형수 때문에
이런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고 생각했고
격분하여 형수의 무덤을 파헤친뒤
관을 꺼내 관은 강에다 던져버리고
시신은 망치로 다 부숴버렸으며 나머지는 토막 낸 다음
불에 태워 버린 이후 강에다가 뿌려버렸다는 이야기 입니다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이 야사의 주인공은
바로 세조와 현덕왕후 권씨 입니다
현덕왕후 권씨는 세조의 형이던 문종의 왕비였던 인물인데요
방금 말한 이 야사의 내용은 사실과는 180도 다르죠
왜냐하면 현덕왕후의 아들이던 단종은
세조의 아들이던 의경세자보다 더 늦게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사만큼이나 현덕왕후의 자식들은 모두 비참하게 죽어갔고
자신의 가문 역시 풍비박산이 나고마는데요
오늘은 문종의 아내였던 현덕왕후 권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녀는 1418년 안동권씨인 권전의 딸로 태어났죠
그로부터 약 10여년의 세월이 흘렀고
이때 조선의 왕이던 세종은 아들인 문종에게서 자식이 태어나지 않는걸
굉장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첫번째 세자빈인 휘빈김씨가 폐위되어 버렸고
순빈봉씨가 새로운 세자빈으로 책봉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이가 생기진 않고 있었죠
하루하루 걱정이 쌓이던 세종은 허조와 대화를 나눈뒤
허조의 조언대로 권씨, 정씨, 홍씨 세명을 승휘로 들였습니다 (승휘 : 세자의 후궁)
그러자 얼마후 승휘 권씨가
조선 왕실이 그토록 기다리던 문종의 자식을 임신했던 것이죠
그렇게 승휘 권씨는 조선의 모든 기대를 한몸에 받게 되었는데요
하지만 그만큼 당시 세자빈이던 순빈봉씨에게는 시기 질투를 받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권씨는 마침내 딸을 낳았지만 그만 요절하고 말았고
다행히 얼마안가 다시 임신한 뒤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경혜공주이죠
오랫동안 자식이 없던 문종에게 드디어 자식이 생긴것이었으며
조금만 더 노력하면 아들도 낳을수 있다는 생각에
세종은 한껏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궁내에선 한바탕 난리가 나는데요
바로 세자비인 순빈봉씨가 해괴한 주술을 부리거나
임신을 했다고 뻥을 치는등 온갖 사고를 쳤음에도 지금까지는 봐줬는데
궁녀이던 소쌍과 동성애를 했던 것이 문제가 되어
결국 폐위되고 만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자빈 자리가 또 비게 되자
이제는 세명의 승휘 중 한명을 세자빈으로 승급 시키기로 했죠
이때 문종은 승휘 홍씨를 세자빈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세종은 권씨가 홍씨보다 나이도 많고
경혜공주까지 낳았으며 품계도 높으니 그녀가 세자빈이 되는게 맞다고해
그렇게 권씨는 1437년 2월, 세자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자빈으로써 가례는 못올리고
세자빈이 되었다는 교지만 받았는데요
권씨는 세번째로 들이는 세자빈이었기 때문에
절차를 간소하게 한것으로 추측되고 있죠
그리고 약 4년의 세월이 흐른 1440년 또다시 임신을 하게 된 권씨는
이듬해인 1441년 7월 마침내 자식을 또 낳게 되는데
조선왕실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을 낳은것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바로 단종이었죠
이에 세종은 크게 기뻐하며 대사면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날, 굉장히 불길한 징조가 나타나는데요
세종이 원손의 출생을 축하하며 대사면령을 내리던 중
그 자리에 있던 큰 초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에 세종은 이를 불길하게 여겨 당장 떨어진 초를 치우라 명했죠
그러나 불길한 징조가 현덕왕후를 향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단종을 낳은지 불과 한달만에 산욕열로 인해
불과 2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자빈 권씨가 죽자 단종과 경혜공주는
세종의 후궁이던 혜빈 양씨가
갓난애기이던 단종에게 자신의 젖을 물려가며 길렀다고 하죠
그리고 문종은 두번이나 세자빈이 폐출된데다가
한명은 죽어버리기까지 하면서 계속 비극적인 결말을 맺자
충격을 받았는지 이후 더이상 정실부인을 들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1450년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 역시 현덕왕후로 추존되었죠
그런데 문종이 왕위에 오른뒤 불과 2년만에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자식들과 가족들에게는 불행이 닥치기 시작합니다
아들인 단종이 어린나이에 즉위했지만
불과 1년후인 1453년에 삼촌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이 일으킨 것이었죠
그렇게 단종은 삼촌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겨 버린것에도 모자라
노산군으로 강등된 후 유배를 떠나게 되고
얼마안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녀의 딸인 경혜공주는 훗날 출가해 비구니가 되었고
사위인 정종은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들켜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져 죽게 되었죠
또한 현덕왕후의 남동생이던 권자신과 어머니이던 최씨 역시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되고 말았으며
이미 죽은 아버지 권전도 서인으로 강등 되면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말았고
현덕왕후 자신도 서인으로 격하되고
신위 역시 종묘에서 끌어내려졌습니다
이것 때문에 세조가 패륜왕이라고 불리는 이유 중 하나인데요
대개 왕비의 친정가문이 역모로 몰려 풍비박산이 난다 하더라도
왕비까지 폐서인 시키는 경우가 직접 역모를 주도했으면 모를까
아예 없죠
세종의 처가인 청송심씨 일가도 태종에 의해 멸문지화를 당했지만
소헌왕후 심씨는 폐서인 되지 않았던 것 처럼 말이죠
하지만 현덕왕후는 전혀 관련이 없는데도
세조에 의해 끌어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비록 죽고나서였지만 그녀가 받은 수모는 더 있었는데요
세조의 손자이던 성종이 현덕왕후가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 받았던
교명을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던 것이죠
그 정도로 사실 그녀는 아무 죄가 없지만 세조가 행한 패륜적 행위 때문에
이후 수많은 야사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처음 말했던 현덕왕후가 세조의 꿈에나와 저주를 퍼부운것과 더불어
그녀에 대한 야사에 대해 잠깐 말씀을 드리자면
훗날 현덕왕후의 복위가 조정 내에서 논의되자
유순정이라는 인물이 격렬히 반대하고 나섰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날 권민수라는 인물이 숙직을 서다가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의 외손자이던 정미수(경혜공주의 아들)와 유순정이 크게 다투었다고 합니다
나중엔 유순정이 별말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인
이상한 꿈이었던 것이죠
그렇게 그 꿈을 꾼 뒤, 얼마 되지 않아
급작스레 유순정이 병사해버리자
그제서야 권민수는 유순정이 복위를 반대해서
현덕왕후에게 벌을 받은거구나 생각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야사에는 현덕왕후가 꿈에 나와 저주를 퍼붓자
열받은 세조는 그녀의 무덤을 파내어 관을 꺼내
시신은 불에 태워 강에 뿌려버렸고
빈관 역시 강에 던져버렸는데요
이후 어느정도 시간이 흐른 어느날 밤,
강에서 어떤 여자의 통곡소리가 들려온것이죠
한맺힌 통곡소리를 들은 어느 한 스님이
깜짝 놀라 소리가 나는곳으로 가보았는데
근처로 가니 여자의 통곡소리는 갑자기 사라졌고
그곳에는 빈 관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괴이하게 여긴 스님은 관을 풀로 덮어주었는데
시간이 흘러 풀이 무성하게 자라더니 어느새 높은 언덕이 되었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현덕왕후가 복위 되었는데요
그런데 다시 관을 찾기위해 언덕을 파보았지만
아무리 파도 관을 찾을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감역관이 꿈을 꾸었는데
현덕왕후가 나타나더니 "너희가 고생이 많다" 라고 하며
위로해주었던 것이죠
그리고 다음날 다시 땅을파자 그제서야 시신이 없는
빈관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런 수많은 야사가 나왔을 정도로 백성들은 그녀의 죽음과
그녀가 받았던 온갖 수모, 그리고 세조가 저지른 패륜적인 일들을
굉장히 좋지 않게 보고 있었다는걸 반증하는 것이죠
아무튼 시간이 흘러 중종이 왕위에 오르자
'친정이 역모에 관여되었다 하더라도
왕비가 역모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폐서인 하지 않는법이다.'
'심지어 이미 죽은 뒤의 일로 연좌한것은 지나치다.'
또한 '문종 혼자 종묘에 모셔져 있는것이 보기 민망하다'는 이유로 들어
1513년, 현덕왕후를 다시 복위해주었고
현릉에 다시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일부 신하들이 반대에 나서자
하마터면 복위가 성사되지 못할뻔했는데
갑자기 종묘에 벼락이 떨어지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났고
다행히 복위가 이루어졌다고 하죠
만약 그녀가 살아 있었다면 왕실 최고 어른으로써
수양대군이든 세자에서 폐위된 양녕대군이든
그 누구도 그녀의 권위에 침범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단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더라도
그녀가 수렴청정을 했다면
계유정난과 같은 조선 역사상 최악의 비극도
일어나지는 않았을거라고 합니다
그랬다면 조선 역사도 180도 달라져
연산군 같은 폭군도 나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이런식으로 추측하는 거라면
연산군보다 더 극악한 폭군이 나타났을수도 있겠네요
역사엔 만약이 없다 라는 말을 여기서 또 느낄수 있죠
지금까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했을것 같은 여인
현덕왕후 권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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