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의 딸로 태어나 잘먹고 잘 살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된 이후
이혼당하는 등 비참한 삶을 살게된 휘신공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 연산군에게 총애를 받으면서 온갖 특혜를 받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그녀의 운명도 크게 뒤바뀌었다고 하는데요
과연 그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함께 보시죠
1491년 9월 22일 세자였던 연산군과 세자빈 신 씨의 맏딸로 태어난 휘신공주는
연산군의 총애를 듬뿍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1502년 휘신공주의 나이가 11살이 되자
연산군은 자신의 딸에게 맞는 좋은 신랑감을 찾기 시작했고
당시 도총관이었던 구수영의 아들 구문영을 딸과 맺어주기로 했죠
구문경의 집안은 세조 시절부터 공신 집안으로
구문경의 증조부는 지중추부사 구치홍이라는 인물인데요
구치홍은 자신의 형제들과 함께 세조를 왕으로 만드는데 참여하면서 공신이 되었고
1467년 이시애의 난 당시에는 종사관의 신분으로 직접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또한 구문경의 아버지 구수영은 세종의 손녀사위였기 때문에
연산군과 폐비 신 씨, 휘신공주, 구문경은 다 같은 세종의 후손들이라고 볼 수 있었죠
이러한 배경 덕분에 연산군은 구문경을 부마로 삼게 되었고
그렇게 휘신공주는 1살 연하인 구문경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연산군은 부마가 결정된 순간부터 휘신공주의 신혼집을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고
그 집이 완성된 1503년 3월부터 공주는 궁 밖으로 나와 생활하게 되었죠
그리고 연산군은 공주가 사는 집을 넓히기 위한 공사를 추가로 지시했는데
얼마나 집터를 넓게 잡았던 것인지 그 주변의 가옥 수십 채를 허물어버리고
그곳에 살던 백성들에게 돈으로 보상을 해줬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네요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다음 해 연산군은 공주의 집 근처에 평시서라는 기관이 있어서
경치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이유를 대며 아예 평시서를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고 합니다
연산군의 딸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죠
갑자사화 때 임희재라는 인물이
연산군을 비판하는 시를 쓴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형을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
임희재의 부인이 바로 구문경의 누나인 구순복이었다고 합니다
원래라면 그녀 또한 남편과 같이 죽을 상황에 놓였지만
휘신공주가 아버지를 찾아가 구순복을 살려달라고 부탁하자
딸바보인 연산군은 휘신공주의 말대로 구순복을 살려줬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임희재의 집까지 딸에게 선물로 줬다고 하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심지어 공주에게 뇌물을 갖다 바치고
연산군에게 죄를 용서받는 사람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성종 대에 관노비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마치 자신의 노비처럼 부린 죄로 금고형에 처해진 강학손은
휘신공주에게 뇌물을 준 덕분에 연산군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으며
휘신공주 유모의 남편인 이팽동은 공주를 등에 업고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하죠
뿐만 아니라 휘신공주가 부리는 노비들은 잡역에 동원되지 않았고
그녀가 가진 토지에도 세금이 붙지 않는 등 그야말로 온갖 혜택을 다 받았다고 합니다
연산군이 휘신공주와 부마인 구수영에게 귀한 물건을 하사했던 일들은
일일이 다 기록에 남기기도 힘들 만큼 자주 있는 일이었다고 하죠
그렇게 휘신공주는 연산군으로부터 온갖 특혜를 받으며 잘 먹고 잘살았지만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아버지 연산군이 폐위되고
그녀의 남동생과 숙모인 단경왕후마저 폐출 돼버리자
하루아침에 그녀를 둘러싼 세상이 180도 바뀌어버렸습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는 이유로 휘신공주가 연산군 때문에 처벌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시아버지인 구수영에 의해 강제로 이혼을 당한 것인데요
구수영은 그동안 며느리 덕분에 연산군으로부터 온갖 특혜를 다 받아먹었으면서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왕위에 올리려는 반정을 계획하자
연산군을 배신하고 그들에게 붙어서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자신이 연산군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였는지 며느리를 강제로 내쫓아버렸죠
당시 사헌부에서는 구수영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화를 입을까 봐
휘신공주를 이혼시키는 거라는 주장을 했지만 중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휘신공주가 살던 호화로운 집은 중종반정을 주도한 박원종에게 주어졌으며
그녀가 연산군으로부터 받았던 재산 또한 박원종과 유순정, 성희안 등이 나눠가지게 되죠
2년 뒤인 1508년이 돼서야 당시 사헌부 대사헌이었던 정광필이
한번 혼인을 한 부부는 그중 한 사람이 역적의 자녀라 할지라도
국가가 강제로 부부를 이혼시킬 수는 없는 법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휘신공주는 겨우 남편과 다시 재결합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공주의 신분을 회복하지는 못하고 죽을 때까지 '구문경의 처'로 불렸다고 하네요
중종도 휘신공주의 집과 재산을 모두 빼앗은 게 미안했는지
구문경과 재결합하는 그녀에게 집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죠
이후 공주의 남편인 구문경은 1523년 12월에 사망했고
휘신공주는 다음 해 8월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구문경과의 사이에서 '구엄'이라는 아들을 한 명 낳았는데
휘신공주는 폐주 연산군의 딸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이혼까지 당하는 수모까지 겪은 반면에
그녀의 아들인 구엄은 연산군의 외손자라는 이유로 왕실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연산군의 제사를 지낼 유일한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오래도록 왕실의 외척으로 예우를 받았고 범죄를 저질렀을 때도 감형을 받았다고 하죠
그런데 구엄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으면서 제사를 이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연산군의 제사는 구엄의 외손자인 이안눌이 지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이안눌의 증조부인 이행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연산군으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았던 인물이고
이안눌 아버지의 외조부인 홍문관 수찬 박은은
갑자사화 때 연산군에 의하여 참수된 사연이 있었기 때문에
이안눌의 집안에서는 결코 연산군을 좋게 볼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원수처럼 여기던 연산군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대놓고 말은 못 해도 속으로는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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