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생애에는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매일 빌었던
광해군의 아내 문성군부인, 폐비류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많은 신하들이 권력의 단맛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하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경우도 많았죠
또한 많은 궁녀들은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할 이 여인은
왕실에 들어오고 왕비가 된 것을 대단한 일이라 여기지 않고
심지어 왕비가 된 것을 싫어했을 정도였는데요
그녀는 바로 문성군부인인,
광해군의 아내였던 폐비 류씨 입니다
그녀는 1576년에 판윤 류자신과 부부인 정씨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류자신의 자식 6남 4녀중, 9번째 딸로 태어났었죠
그리고 그녀가 11살이 되던해인 1587년, 광해군의 신붓감으로 간택되었고
문성군부인으로 봉작되었습니다
그 이후 아무일이 없었다면
왕자의 부인으로써 그냥 평범하게 평생 잘먹고 잘살수 있었겠지만
그로부터 5년후인 1592년
남편 광해군과 류씨의 운명은 불행의 소용돌이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되죠
바로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분조를 이끌게 했는데요
이때 류씨도 왕세자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그녀의 몸은 만삭의 몸이었는데
불가피하게 류씨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선조를 따라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었죠
이때 류씨는 만삭의 몸으로 말을 타고 가야하는
자칫 잘못하면 위험할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심대라는 사람이 경기 감사 권징을 적극적으로 설득해
옥교를 구해주었던 덕에 그녀는 말이 아닌 옥교를 타고 피난을 갈수 있었고,
그렇게 만삭의 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위험을 피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왕이 된 광해군은 난리통에서도 이들이
세자빈 유씨를 정성스럽게 대하고 보호한 공을 인정해
심대의 아들 심대복을 가자하고 권징은 증직하여
원종공신 1등에 봉하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죠
하지만 안타까운점은, 류씨가 무사히 아이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어서
이때 임신하고 있던 자식은 일찍 요절했을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 끝난 1598년 12월, 원손인 이지를 낳았고
그로부터 10년후인 1608년, 시아버지였던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남편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자신도 왕비가 되었죠
하지만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는데요
위쪽에서 누르하치가 이끄는 금나라가 막강한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기에
광해군은 중립외교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류씨는 남편의 생각과는 다르게 친명배금을 주장했다고 하죠
또한 그녀는 성리학이 아닌 불교를 신봉했다고 하는데
궁내에 금부처를 모셔두고 자주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흙으로 만든 불상도 많았고 나무에 새기기도 했는데
그녀는 불상에 기도를 드릴때마다
다음 생애에는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하죠
그만큼 류씨는 왕가에 시집 온것을 대단치 않게 여겼을 뿐만아니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보입니다.
사실 궁내에서 벌어지는 온갖 흉악하고 더러운 일들을 직접 목격했다보니
궁궐이나 왕실, 아니면 정치 등에 회의감이 들었을수도 있을것 같긴하죠
그리고 1614년 3월, 광해군과 북인세력은 왕권의 안정을 이룬다는 명분으로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시켜버렸는데
그로 인해 인목왕후는 광해군은 물론
류씨, 그리고 그들의 자식들까지 굉장히 싫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를 유폐시키고 형제를 죽였다는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한
인조반정이 발생해버렸고
그렇게 광해군과 류씨는 그대로 유배를 가게 되었죠
1623년 3월, 인조가 반정을 일으켰을 당시
류씨는 수십명의 궁녀들과 함께 도망을 쳤는데요
궁궐 내 후원인 어수당으로 도망치던 중
반정세력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고
이후 광해군은 폐위되고 군으로 격하되었으며
류씨 역시 폐비되어 군부인으로 내려가
강화도에 유배를 떠나게 되면서 그렇게 위리안치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신원을 회복한 인목왕후는
'역적 광해군 부부가 흉측한 술책을 행하였다'며
그들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적이 있을 정도로
인목왕후는 광해군 뿐만아니라 류씨에게도 엄청난 적대심을 가지고 있었죠
유배를 떠난지 약 3개월이 지났을 무렵인 1623년 6월,
아들이던 폐세자 이지가 탈출하기 위해 땅굴을 파고 도망치다가 붙잡히고 말았는데
이때 영의정 이원익과 인열왕후는 이지를 죽여선 안된다고 말렸지만
인목대비는 그를 죽여야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결국 이지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이후 이지는 25살의 나이로 스스로 목을 매 죽게 되었고
3일후 며느리이던 폐빈 박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죠
자신의 인생이 폭망해버린것도 모자라 집안까지 망해버리고
자식들 마저 더 일찍 세상을 떠나자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해 10월에 그녀도 사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는 폐위된지 고작 7개월만의 일이었던 것이죠
그녀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인조는
몹시 놀랍고 안타깝다며 장례를 치를때 필요한 물자를
얼른 보내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왕의 아내가 된다는것은
굉장히 비극적인 일이 될수도 있을것 같네요
평범하게 사는게 역시 최고인것 같습니다
여담으로 2002년 11월 15일,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는
광해군을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으로
그리고 폐비 류씨를 '소온사헌혜장왕후'로 추숭 복위하고
능호를 열릉으로 추숭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는 어떠한 공적인 권위도 없기도 하고
전주 이씨 왕실 종친회인 대동종약원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보니
정식으로 인정 받지는 못하고 있죠
지금까지 왕실에 시집 온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비운의 왕비, 폐비 류씨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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