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고의 졸장 원균의 골때리는 행위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명종실록 명종 19년 6월 21일 자 기록에 따르면 원준량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아들을 무과에서 부정으로 급제시킨 의혹으로 탄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원준량이라는 사람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윤원형과 같은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며 관직 생활을 했는데 평소 불성실한 근무태도로 자주 질책을 받은 데다 정작 왜구가 침입했을 때는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으며 자신의 아들까지 무과에 부정으로 합격시켰던 뼛속까지 썩어빠진 인물이었죠
그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원연은 이미 문과에 급제를 한 상태였고 그 밑의 동생들은 무과에 응시하기에는 지나치게 어렸기 때문에 부정으로 급제를 한 인물은 자연스럽게 그의 장남이란 추측이 가능한데요
그 장남의 정체는 바로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원균입니다
이순신 장군이 6년간 애써 길러온 해군 전력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칠천량 앞바다에 어이없게 수장시키면서 정유재란의 빌미를 제공하며 백성들을 또다시 전쟁의 불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은 인물이죠
원균은 선조 12년인 1579년 과거에 급제한 뒤 12년 만에 경상우수사 자리에 오르게 되는데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그가 수군으로 가게 된 이유입니다
그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 배치된 이유는 고도비만이라서 말을 탈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오늘날 사극에서는 비교적 구하기 쉽고 보기에도 좋은 서양품종의 말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조선시대의 말은 체구가 작은 편이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뚱뚱한 사람은 태울 수가 없었는데 원균이 그 정도로 심한 고도비만이었다는 증거겠죠
그리고 원균이 경상우수사가 되기 전 전라좌수사에 먼저 임명된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인사고과 점수가 낮아 대간에 의해 파직됐던 그가 1년 만에 조선 최대의 수군기지인 경상우수영을 담당하는 경상 우도 수군절도사에 다시 임명된 것을 보면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인데요
하지만 당시 무관들의 평균적인 수준과 그들을 둘러싼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예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 시절 문관들에 비해 학문이 떨어지는 무관들이 평소의 불량한 행실과 행정 능력 미숙 등의 이유로 탄핵당하는 일은 무척 흔하게 있었다고 하죠
임진왜란 이전 조선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은 신립도 평소에 워낙 성격이 포악해서 부하들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 싶으면 심한 형벌을 내렸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를 꺼렸다는 기록도 있으며 드라마 징비록을 비롯해 임진왜란을 다룬 사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일도 조정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여진족 첩자를 참수해 버리는 등 돌발행동을 하다가 파직된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평상시라면 이런 행실이 불량한 인물들을 굳이 쓸 이유가 없지만 당시는 일본과 여진족이 동시에 조선을 위협하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전투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뽑아 남쪽으로 내려보내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쳐들어오자마자 저항을 포기한 채 몸을 피해버린 원균은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에 합류한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꼬장을 부리기 시작했죠
오죽하면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1593년부터 1597년 7월까지 무려 40차례가 넘게 원균에 대한 욕을 기록해 놨을 정도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원균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왜구가 아닌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아다니고 거짓공문으로 군사들을 속이거나 위급한 상황에도 배에 여자들을 태운채 놀러 다니는 등 여러모로 이순신의 속을 썩였던 인물인데요
그나마 이순신이 있었기에 조선이 망하지 않을 수 있었고 자신의 벼슬자리도 계속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인데 원균은 그런 이순신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끊임없이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며 모함했죠
이순신이 파직된 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도 원균은 전라도 보성군에 살고 있던 안중홍이라는 인물을 찾아가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라는 희대의 졸렬한 멘트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이라는 집을 짓고 밤낮으로 그곳에 있으면서 여러 장수들과 전쟁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했는데 비록 지위가 낮은 병사일지라도 전쟁에 관한 의견이 있으면 언제든 낼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었죠
그렇게 전투를 치를 때마다 부하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책을 묻고 전략을 세운 후에 나가서 싸웠기 때문에 그토록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원균은 그와는 정반대로 자기가 아끼는 첩과 함께 운주당에 틀어박히더니 울타리로 주변을 아예 막아버려서 여러 장수들은 그의 얼굴조차 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고 하죠
게다가 매일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며 하는 일도 없이 병사들에게 화만 내고 다니니 군중에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도 "이제 우리는 만약 적군을 만나면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라는 분위기가 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바로 칠천량 해전에서의 대패였죠
그는 첫 출전부터 배를 버리고 도망간 데다 한산도 대첩에서도 경상 우수영에 자기 배를 버리고 이순신의 등 뒤에 숨은 것에 불과하며 특히 칠천량 해전에서는 거북선을 포함한 조선 수군 전부를 내다 버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는데요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앞에서 잠깐 소개했던 것처럼 "원래 육군 지휘관은 말을 타고 다녀야 하는데 원균은 너무 뚱보여서 말을 못 탔기 때문에 수군으로 배치된 것이지 그가 수군으로서 능력이 뛰어나서 그 자리로 간 게 아니다" 라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원균 맹장설을 반박하는 가장 큰 증거로 내밀 정도입니다
원균은 전술에 대한 식견이 지나치게 부족해서 이순신의 군에 합류한 원균이 학익진 훈련에서 자주 열외되었던 것도 그가 학익진을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원균은 엄청난 대식가로 그가 한 끼를 먹는데 들어간 음식의 양만 쌀이 2말에 생선 20마리, 닭이 4마리나 됐다고 하죠
이 내용은 야사처럼 믿기 힘든 기록이 아니라 전쟁 이후 선조가 조선왕조실록 임진왜란기의 참고자료로 공인한 대표 기록 중 하나인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써있는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원균은 닭이 없으면 꿩고기를 먹었다고 하죠
백성들은 피죽도 못 먹고 굶어 죽어 나가던 상황에서 장군이라는 인간이 이런 식탐이나 부리고 있었으니 백성들과 함께 왜군과 싸우던 조경남이 원균을 혐오할만했습니다
게다가 원균은 단순히 무능한 것을 넘어서 같은 조선인을 왜군으로 몰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죠
선조 때 경상감사의 참모였던 이탁영이 1592년부터 1598년까지의 사건을 기록한 일기인 정만록에 따르면 원균은 한산도 해전 직후 이순신으로부터 맡은 패잔병 처리 임무에 실패하자 거짓으로 공을 세우기 위해 일본에 잡혔다가 돌아오던 조선인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모두 죽인 후 왜군의 목을 벤 것이라 속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난중일기에서도 원균이 남해안의 섬에 병사들을 보내 조선인 어부들의 목을 찾는 것을 이순신이 막았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그가 조선의 민간인들을 왜군으로 둔갑시켜 거짓된 공을 세우려 한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원균을 두고 조선의 무타구치 렌야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무타구치 렌야는 그래도 민간인 학살은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최소한 원균보다는 나은 점이 한 가지는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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