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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시대를 앞서가다보니 백성들이 극혐할수 밖에 없었던 세종대왕의 정책들

by 사탐과탐 2023.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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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이 극혐했던 세종대왕의 정책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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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는 세종이 백성들을 너무나도 아끼는 군주였다는 것은 이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의 최대업적이라 할 수 있는 한글창제 또한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을 편리하게 만들어주기 위해서 시작됐죠

 

때문에 세종이 왕으로 있으면서 선정을 펴는 동안 수많은 백성들이 그를 믿고 따랐지만 그렇다고 그가 펼치는 모든 정책이 백성들에게 마냥 환영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는데요 

그렇다면 백성들이 싫어했다고 기록된 정책은 과연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지금부터 알아보겠습니다 

 

세종은 중국의 화폐 제도를 모방해서 조선에도 화폐 제도를 정착시키고 싶어 했죠 

이미 그의 아버지인 태종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를 다시 도입해서 유통하려 했지만 크게 효과를 보진 못했습니다

저화란 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종이 화폐인데 문제는 그 크기가 학교 책상만큼 크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들고 다니기가 너무 불편했기 때문에 돈으로는 쓰이지 못하고 방석 대용으로 쓰였는데 돈방석이라는 말이 이때 생긴 것이라고 하네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저화를 도입한 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교훈 삼아 세종은 중국처럼 금속을 이용한 동전 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를 할 때 물물 교환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오직 화폐를 통해서만 거래를 하도록 명령했죠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기존의 물물 교환이나 다른 교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훨씬 익숙했기 때문에 조선통보를 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결국 정부에서는 반강제로 금속화폐를 쓰도록 만들었죠

 

물물 교환을 하다가 걸린 백성들은 가진 재산을 몰수당하고 추가로 벌금까지 내야만 하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기 때문에 일부 백성들은 벌금을 내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면 이 조선통보의 유통이 실패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요

 

첫 번째는 그때까지 조선이라는 나라가 국내 교역량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화폐를 사용해 본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땅덩어리가 넓어 엄청난 물자를 생산할 수 있고 평야가 많은 데다 대운하까지 있어 비교적 쉽게 물자를 유통할 수 있었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면적이 중국보다 작아 생산량도 적은 데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였기 때문에 제대로 닦인 도로를 만들기가 어려워 물자를 널리 유통하기가 어려웠죠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백성들이 화폐의 가치를 제대로 믿지 않았다는 것인데요

가뜩이나 물물교환에 익숙하던 백성들로서는 정말 화폐에 제대로 된 가치가 있는지도 의문이었는데 정작 화폐사용을 권장하던 조정에서도 백성들에게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로 받을 때 화폐보다는 현물로 받으려 하는 모순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의 백성들이 화폐를 믿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들로 화폐 개혁이 성과를 내지 못하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을 적용시키며 강제로 화폐를 유통시키려 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 간에 충돌이 자주 일어나기 시작했죠

전국 곳곳에서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물물 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려던 민중들이 단속에 걸리면서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는데요

 

쌀 한 됫박으로 물물 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면서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자 그의 아내가 목을 매는 일도 있었으며

불만을 품은 백성이 종로 시전에 불을 지르면서 그 지역이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죠

사태가 이렇게 되자 백성들 또한 그냥 하던 대로 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괜히 화폐라는 걸 만들어서 우릴 괴롭힌다며 반발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마침내 한양성 안이 언제 폭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흉흉해지자 세종도 결국 더 이상의 화폐 개혁을 포기했고 이전의 물물 교환 경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죠

애초에 전국을 다 뒤져봐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화폐 도입을 한 것은 너무 이른 시도였던 거 같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은 명종대가 되어서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말하자면 세종은 시대를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죠

 

두 번째는 백성들에게 공평하게 세금을 걷기 위해 세종이 시행한 공법이라는 정책입니다

공법이 시행되기 전 조선에서는 고려말부터 시행되었던 답험손실법을 통해 세금을 걷고 있었죠

이 답험손실법은 토지 수확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내는 제도였는데 문제는 추수를 할 시기가 되면 각 지방의 관리가 백성들을 방문해서 직접 수확량을 체크한 후 세금으로 낼 곡식의 양을 정해준다는것이었는데요

 

그렇게 백성들이 낼 세금의 양을 관리들이 직접 정해주다 보니 해당 관리가 부정부패를 저지르기 너무 쉬운 환경이 되었죠

그렇게 가난한 농민들이 관리에게 접대를 하기 위한 돈까지 추가적으로 내야 하면서 너무 과도한 세금을 내는 경우가 많아지자 백성들의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세종은 가난한 농민들의 부담을 줄이고 부정부패를 줄이기 위해 공법이라는 과세법을 시행하게 되는데요

 

세종 12년에 처음 시도한 공법은 이전처럼 지방의 관리가 방문해서 측정을 하는 게 아니라 나라에서 백성들의 토지에 미리 낼 세금을 정한 후 관리들은 그 정해진 양만큼을 걷어오기만 하면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개인이 마음대로 판단하는 것이 아닌 나라에서 정해진대로 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공평하게 세금을 낼 수 있고 관리들도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 셈이죠

 

하지만 이 공법은 시행되기 전부터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는데요

때문에 세종대왕은 공법이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막대하니 그들의 의견을 직접 물어보기로 결정하고 여론조사를 하게 됩니다

그렇게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 간 조선 역사상 최대규모의 국민투표가 전국의 백성들을 대상으로 실시됐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17만여 명의 백성이 참여한 투표결과에서 약 57퍼센트 정도 되는 백성들이 공법에 찬성했는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공법이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는 거의 모든 백성들에게 환영을 받은 반면에 함길도와 평안도에서는 95퍼센트가 넘는 백성들이 모두 거부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두 지역 간 수확량의 차이 때문이었죠

 

만약 공법을 시행하게 되면 토지의 생산력이 좋아 수확량이 많은 전라도와 경상도에서는 내야 할 세금이 줄어드는 반면에 토지가 척박해 수확량이 적은 함길도와 평안도에서는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법이 시행되면 가지고 있는 땅이 많은 고위관직자들도 내야 할 세금의 양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기 때문에 대부분이 공법에 반대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죠

 

때문에 세종은 자신의 정책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졌던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부터 시범적으로 공법을 시행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몇 년 후 조선에 큰 가뭄이 찾아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존의 방식대로라면 흉년이 들었을 때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해 줬지만 공법은 흉년이 든 해에도 세금을 내야 했기 때문에 공법에 찬성하던 백성들마저도 반발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세종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충청도 지역에까지 공법을 적용시키며 계속해서 보완점을 찾고 신하들과 토론을 하면서 개선을 해나갔습니다

마침내 처음으로 공법논의가 시작된 지 14년 만에 전국에 있는 토지를 다시 조사해서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는 방식과 그해 농사가 풍년이었는지 흉년이었는지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눈 방식을 합쳐서 세금을 매기는 형식의 본격적인 공법이 시행되었죠

 

애초에 공법은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진 정책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망하던 백성들도 나중에는 모두 고개를 끄덕였으며 공법이 완전히 정착된 후에는 오히려 더 편리함을 느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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