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와 고려에서 근친혼을 했던 어처구니 없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는 신라와 고려가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볼 수 있는데요
워낙 폐쇄적인 신분제 국가였던 신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고려의 왕실에서 근친혼을 선호했다는 것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죠
오늘은 왜 고려왕실이 그런 이유를 선택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라는 나라가 이름은 고구려를 계승했지만 그 풍습은 오히려 신라의 것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많다고 하죠
때문에 고려의 풍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신라의 풍습에 대해서 아는 것이 우선이라고 합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세워진 나라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문화를 발전시켰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신라만의 특이한 풍습을 오랫동안 지켜나갔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근친혼이죠
당시에는 친남매간에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모든 친족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신라의 결혼 풍습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 풍습은 고려시대의 왕실까지 이어졌다고 하죠
고려의 5대 왕 경종은 사촌 여동생 두 자매와 결혼을 했으며 8대 왕인 현종은 태조 왕건의 아들인 안종과 왕건의 손녀인 헌정왕후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가 없는데요
신라는 지역차별이 매우 심해 경주 출신이 아니면 제대로 사람대접을 받기 어려웠으며 자신들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신라 출신의 군인들은 백제, 고구려 출신의 군인들과 같이 섞여서 지내기를 꺼렸다고 하죠
신분 차별도 무척이나 심해 골품에 따라 사는 집과 도구, 입는 옷까지 세세하게 나눠 규제를 가했던 나라가 바로 신라였습니다
태생이 그런 나라이다 보니 그중에서도 지배층들의 특권의식은 더욱 심각할 수밖에 없어서 그들은 자신들의 고귀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히 아랫것들과 피를 섞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죠
게다가 서로 골품이 다른 남녀가 결혼을 하게 되면 그 자식은 부모 중 더 낮은 골품을 따라가야 했기 때문에 같은 계급끼리 혼인하는 것을 대부분 선호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수가 적었던 왕실이나 진골 귀족들끼리는 결혼을 하고 싶어도 마땅한 상대가 없는 경우가 많았으니 어쩔 수 없이 같은 성씨들끼리 근친혼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고려 또한 그런 신라의 결혼풍습을 그대로 따라가게 됩니다
고려시대는 사회적으로 폐쇄적이거나 차별적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여러 면에서 개방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유독 혼인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 못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죠
그중에서도 특히 고려 왕실의 근친혼 비율이 엄청났다고 합니다
그게 어느 정도였냐면 고려가 몽골의 지배를 받기 전까지 고려 왕실의 왕자와 공주들 중에서 왕 씨 성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했던 경우는 최 씨 무신정권 때 딱 한 번 있었을 뿐이었다고 하는데요
고려왕실이 이토록 극단적으로 근친혼을 고집했던 이유는 바로 왕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는 아들과 딸 모두에게 공평하게 유산을 상속해 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만약 공주가 다른 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면 궁중의 재산이 외부로 빠져나가는 결과가 되는 셈이었죠
때문에 왕실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공주들의 경우도 무조건 근친혼을 시키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조선시대와 달리 외가 쪽 성씨를 이어받는 것도 인정되었던 고려 사회에서는 공주를 귀족 남성과 결혼시켰을 경우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이 왕 씨 성을 쓰고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요
때문에 왕족의 수가 지나치게 많아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모든 공주는 왕자 혹은 종친과 결혼해야 했는데 5백 년의 고려역사 속에서 공주가 왕족이 아닌 남성과 결혼한 경우는 단 두 건밖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죠
하지만 고려에서도 근친혼을 하게 되면 여러 가지 불행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자체는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불임이나 낮은 임신율 기형아 출산 같은 부작용 말이죠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동성 간이나 가까운 친인척 간의 혼인을 금지시키려는 시도는 계속 있어왔는데 고려에서 성군이라 추앙받는 왕중 하나인 문종은 1508년 사촌 간의 혼인에서 출생한 자는 관리에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고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정작 문종 본인은 신하였던 이자연의 세 딸을 모두 자신의 부인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인데요
비록 근친혼은 아니긴 하지만 무척 특이한 경우라고 볼 수 있죠
문종의 둘째 아들인 13대 왕 선종의 경우 배다른 이복남매간의 혼인을 금지해서 만약 이복남매가 결혼해서 낳은 자식의 경우에는 관리로 등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고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1096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앞으로는 육촌 간의 혼인도 금지하며 만약 이를 어기고 태어난 자식들이 있으면 그 자식들은 모두 관직에 오를 수 없다는 금고령을 선포했죠
하지만 이미 고려사회에는 근친혼 풍습이 뿌리 깊숙이 자리 잡았던 탓에 그가 내린 금고령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숙종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하고 5년 뒤가 되어서는 아예 없었던 일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오촌과 육촌 간의 혼인까지는 봐주겠지만 사촌 간에 혼인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생각해서 그것만은 철저히 막고자 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이렇게 사회 깊숙이 자리 잡은 고려의 근친혼도 몽골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고 1309년 충선왕이 집권하던 시기부터는 친척간에 결혼은 물론이고 아예 성이 같은 사람끼리는 결혼을 하지 못하도록 유도하는 금혼령을 내려버렸죠
다만 동성혼으로 태어난 자식들을 관리로 채용하지 않겠다는 소극적인 조치였지 아예 법적으로 동성혼을 금지한 것까지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게 귀족들의 경우는 가문의 세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들의 앞길을 막지 않기 위해서라도 되도록이면 동성혼을 피하고자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평민들의 경우는 관직에 나갈 것도 아니라 굳이 지킬 필요가 없었으니 고려 말에도 평민들은 여전히 자유롭게 동성혼을 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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