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을 일으킬지 말지를 고민하던 남편 수양대군에게 손수 갑옷을 입히며 내보냈던 낄끼빠빠를 기가 막히게 잘했던 여장부이자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렴청정을 최초로 한 인물이 바로 세조의 왕비이던 정희왕후 이죠
그녀는 남편이 세조였던 만큼 살얼음판 같은 삶을 살기도했고 자식들을 먼저 저세상으로 보냈을 만큼 비운의 삶을 살기도 했는데요
오늘은 이 정희왕후 윤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녀는 1418년 충남 홍주군에서 판중추부사 윤번의 딸로 태어났죠
아버지 윤번이 홍주관아에서 재직할 당시 윤씨에겐 여러명의 언니가 있었습니다
세종의 아내이던 소헌왕후는 첫째 며느리인 휘빈김씨와 아들 문종과의 사이가 소원하자 둘째아들 수양대군의 배필은 제대로 뽑고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렇게 소헌왕후는 수양대군의 배필이 될만한 아이의 성품을 잘 살피도록 상궁들에게 일러뒀고 상궁들은 후보에 올랐던 윤번의 여식을 보기위해 그의 집으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수양대군의 배필로 거론된 후보는 윤씨의 언니였죠
그런데 감찰상궁과 윤씨의 어머니, 그리고 언니가 혼담을 나누고 있을때 어린 윤씨가 언니 옆에 떡하니 앉아 있던 것입니다
이에 그녀의 어머니가 어린 윤씨를 꾸짖으며 내보냈지만 어린 윤씨의 당돌하고 당찬 모습을 잊지 못한 감찰상궁은 그녀를 다시 불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총명하고 야무진 대답을 술술하던 그녀에게 반해 결국 언니를 제치고 그녀가 수양대군의 아내가 된것이죠
그렇게 1428년 10월, 수양대군과 윤씨는 결혼을 했고 그녀는 삼한국대부인에 봉해졌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는 첫째아들 문종의 며느리들을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겼는데요
첫번째 며느리이던 휘빈김씨는 문종의 마음을 얻기위해 요상한 주술행위를 하다가 폐비 되었고 두번째 며느리이던 순빈봉씨는 궁녀와 함께 동성애를 했다는 이유로 그녀 역시 폐비되고 말았었죠
그렇다보니 세종과 소헌왕후는 성품이 온화하고 몸가짐이 바르며 매우 순종적이었던 둘째 며느리 윤씨를 가장 총애했습니다
드센 성격의 수양대군을 어린 신부가 견뎌낼수 있을지 걱정했던 소헌왕후의 우려와는 달리 둘은 굉장히 잘 지냈고 그만큼 수양대군과 윤씨도 갖은 효도를 다 했는데 윤씨가 장남인 도원군을 출산할때가 가까워지자 소헌왕후는 관례를 깨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궁 안에서 출산하도록 조치해 주었다고 하죠
또한 윤씨는 나이가 어렸지만 지혜롭고 배려와 화합에 뛰어났는데 그래서인지 수양대군의 첩이던 박씨, 덕중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고 원만한 사이를 유지한채 잘 살았고 그녀가 21살때는 세종과 소헌왕후에게 첫 손주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종과 소헌왕후가 그녀를 끔찍이 아낀것이었죠
훗날 소헌왕후가 나이가 들어 병에 걸리자 궁에서 나와 수양대군의 집에서 머물렀는데요
이때도 윤씨는 지극정성으로 소헌왕후를 봉양해 주었고 결국엔 세상을 떠나긴 했지만 마지막을 윤씨와 함께했을 정도로 총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1453년 단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죠
계유정난이 일어나던날, 남편이던 수양대군 파의 계획이 새어나가자 손석손 등 여러 부하들이 만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수양대군 역시 우물쭈물하며 어떻게 할지 거사를 망설이자 윤씨가 남편의 갑옷을 들고나와 수양대군에게 손수 입혀주며 거사를 결행하도록 의지를 북돋아 준것이죠
평소에 화합을 중요시했던 그녀의 성품상 계유정난을 일으키려는 남편을 처음엔 말렸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갑옷을 입혀준것은 이왕 하기로한거 할거면 제대로 마무리 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짐작됩니다
그렇게 결국 계유정난이 일어났고 훗날 단종은 폐위되었으며 수양대군이 세조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죠
그렇게 윤씨도 정희왕후가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세조와 정희왕후의 금슬은 계속 좋았는데요
세조는 항상 정희왕후만 바라보던 애처가였고 이후 많은 신하들이 후궁을 들이라 했지만 "난 여색을 좋아하지 않는다" 라며 점잖게 거절했다고 하죠
이에 외로움을 느끼던 소용박씨(덕중)가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에게 구애를 하다 결국 죽임을 당하기 까지 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세조는 정희왕후를 매우 아꼈으며 세조 실록에 따르면 그가 국정을 운영할때 정희왕후의 의견도 경청했다고 하죠
가끔씩 대신들 앞에서 이 사안에 대해서 중전(정희왕후)의 의견은 이러저러한데 대신들이 생각하기엔 어떠냐 라고 묻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세조 역시도 그녀의 총명함과 과감한 결단력 등을 높이 평가하고 어느정도 정치적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또한 세조는 외척들도 후하게 대했는데요
정희왕후의 형제들인 윤사분과 윤사흔에게 높은 벼슬을 주었고 그녀의 인척이던 한계미, 한계희, 한계순 등에게도 큰 요직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1468년 세조가 세상을 떠날때 세조는 자신의 능을 간소하게 해서 백성들의 노역을 줄이라고 유언했는데요
하지만 왕의 능을 간소하게 한다는것은 불충이다보니 자칫 잘못하면 대역죄인이 될수도 있는 사안 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우물쭈물 하고 있을때 정희왕후가 나서게 되죠
그녀의 진두지휘아래 세조의 유언을 받들게 되었고 그렇게 간소하게 조성할수 있었던 세조의 능은 이후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세조가 죽자 예종이 19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는데요
이후 정희왕후는 남편의 명복을 빌고 남편과 자신의 죄업을 참회하기 위해 불사에 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죄를 하늘이 용서할수 없었던 탓일까요?
그녀는 첫째아들이던 의경세자도 일찍 보냈는데 예종 역시 즉위 후 고작 1년 3개월 정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에 그녀는 슬픔속에서도 한명회 및 여러 신하들과 의논한 끝에 성종을 직접 즉위시켰습니다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은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었는데요
당시 왕위 서열 1위는 예종의 아들이던 제안대군 이었지만 나이가 4살밖에 되지 않았고 2위이던 의경세자의 첫째아들인 월산대군은 16세라서 나이도 괜찮았지만 건강이 안좋다는 이유로 둘째이자 13살이던 자을산군이 왕위에 오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록에 기록된걸 보면 월산대군이 몸이 허약하다는 근거가 굉장히 빈약하다고 하는데요
그런데도 정희왕후가 둘째인 자을산군을 즉위시킨건 자을산군이 한명회의 사위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빈약한 성종을 뒷받침 해줄 세력으로 당시 가장 강력한 권세를 누리던 한명회를 정희왕후가 끌어들인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죠
그러지 않으면 또 계유정난과 같은 피바람이 불수도 있을거라 생각했을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성종은 예종이 죽은 그날에 바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죠
대개 왕이 죽으면 5일정도 시간을 두고 다시 소생하길 기다리는게 관례였는데 성종은 취약한 정통성 문제 때문에 서둘러 즉위 시켜버렸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당시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성종의 정통성을 문제삼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하죠
그리고 13살의 어린 성종을 대신해 정희왕후는 여러 신하들의 부탁에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 정희왕후는 신하들의 부탁에 자신은 글도 모르니 글을 아는 며느리 수빈 (의경세자의 아내, 소혜왕후 한씨, 인수대비)에게 수렴청정을 시키라 했지만 이는 한자를 몰랐다는 뜻이 아니라 겸손의 표현이라고 하죠
어쨌든 그렇게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희왕후는 직접 나서지는 않고 성종이 자신에게 찾아와 의논해서 결정했다고 하는데요
정희왕후는 단종의 아내였던 정순왕후 송씨의 신분을 되돌려 주었고 매달 쌀을 지급해 먹고살수 있게 도와주라 명했죠
또한 송씨의 남동생이 과거 시험을 치룰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으며 문종의 딸인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도 당시 대역죄인 정종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을 볼수 없었는데 그가 다시 과거시험을 볼수있도록 허락해주었죠
그리고 성종의 정통성에도 신경을 쓰기 시작해 의경세자를 덕종으로 추숭했고 의경세자빈 한씨를 예종의 아내이던 안순왕후 보다 지위를 더 높게 올려주었습니다
그리고 1478년 세조의 후궁 근빈 박씨의 아들 창원군이 노비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거의 모든 신하가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정희왕후는 "세조의 자식을 죽이는것을 허락할수 없다" 라고 하여 극형은 면했다고 하죠
또한 유교국가에서 불사를 진행하기 시작했는데요
신하들이 극렬히 반대하고 나서자 이 모든것은 선왕이던 세조를 위한일이라며 강경한 태도를 보이면서 남편의 극락왕생을 빌었죠
정희왕후는 불교에 의지하긴 했지만 유교를 신봉했기 때문에 불교의 화장풍습을 없애고 승려들의 도성출입과 사대부집안의 부녀자가 비구니가 되는 것을 금지 시켰으며 고리대금업을 줄이고, 양잠업 장려, 목화밭 육성, 뽕나무 종자 재배를 늘리는 등 백성들의 삶이 나아지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훗날 조정에 피바람을 불러 일으키는 선택을 하게되는데요
성종의 아내였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운 중전을 맞이해야했는데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려고 한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자신의 며느리 인수대비는 숙의 윤씨 성품을 하나하나 다 따져가며 반대했지만 성종이 그녀를 총애한다는 이유로 숙의윤씨를 성종의 중전으로 책봉한것이죠
하지만 윤씨가 훗날 왕실의 법도를 어기고 성종도 그녀를 혐오하기 시작하자 결국 정희왕후는 자신이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 인정하고 윤씨를 폐비하는데 앞장서게 되었습니다
윤씨의 폐비는 훗날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죠
어쨌든 성종이 15살이 되었을땐 수렴청정을 하긴 했지만 거의 모든 직무를 성종이 스스로 처리하게 해주었고 정말 중요한 일만 자신과 의논해 결정하게 했습니다
이는 성종이 정치에 많은 공부가 되게끔 하고 왕위가 안정된 상태에서 넘겨주기 위한 정희왕후의 배려였던 것이죠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들이 하나 둘 사라져 갔으며 성종이 20세가 되던해에 정희왕후는 7년간의 섭정을 마치고 두 아들과 딸 한명을 잃은 상처를 돌보기위해 불교에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물러설때를 알고 권력을 탐하지 않았던 지혜로운 대비였던 것이죠
이후로 정사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불교에만 전념하며 노후를 보내던 중 1483년 음력 3월 30일, 온양 행궁에서 온천욕을 하고난후 독감에 걸려 얼마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실록에 기록된 정희왕후의 성품이 그대로 드러나는 구절이 있는데요
자신이 수렴청정을 하던 7년동안 좋은일은 항상 손자(성종)가 있어서 가능했고 나쁜일은 아녀자인 자신이 정치에 개입해서 일어났다고 말했다고 하죠
그리고 "다시는 조선에 피바람이 불게 해서는 안된다" 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왕후들 중에서도 딱 정도를 알던 대단한 인물이긴 한것 같네요
조선시대의 여장부 정희왕후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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