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의 완전 상반된 잠자리 스타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6세기 조선에는 두명의 뛰어난 유학자가 태어나는데요
바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이죠
이들은 훗날 우리가 사용하는 천원권과 오천원권에 그들의 초상화가 실릴만큼 대학자였습니다
잠깐 그들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1501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이황은 12살때부터 논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20살때는 주역을 읽었으며 한번 책을 보기 시작하면 책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읽었다고 하죠
그는 공부하고 학문연구는 좋아했지만 벼슬에 나가는데에는 별 뜻이 없었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어머니의 권유로 서른네살의 늦은나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관직을 내려놓고 후배양성에 힘을 쏟기 시작했죠
이황보다 35살 어린 이이는 강릉의 오죽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신사임당으로 이이를 직접 가르쳤다고 하죠
늘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신사임당의 모습을 보면서 자란 이이는 자연스럽게 글과 학문을 익히게 되었고 13세부터 29세까지 과거시험에서 9번이나 장원급제를해 구도 장원공으로 불리기도 했으며 훗날 조선을 대표하는 유학자 중 한명이 되기도 했죠
같은 시기에 태어난 이 이황과 이이는 둘이 만나 학문을 묻고 토론하며 시를 짓기도 했는데요
이황은 이때 이이를 보고 어린 젊은 선비의 재능과 학문이 예사롭지 않다며 두려운 후배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태어나 서로 만나기까지한 대 유학자 둘에 대해 수많은 사람들은 누가 더 뛰어난지 자주 비교하기도 했는데요
이 둘을 비교해 놓은것 중 재미있는 민담이 있어서 오늘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바로 이황과 이이의 밤일에 대한 이야기이죠
어느날 이이의 제자들과 이황의 제자들이 만나 서로 자신들의 스승이 더 당대 최고의 도덕군자라고 티격태격 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양측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한 사람이 한가지 재미있는 제안을 했죠
그는 "두 스승님은 당대 최고의 성현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우린 이 두분의 낮생활만 보았지 밤생활은 보지 못했으니, 두분의 밤생활을 보고나서 어느분이 더 훌륭한 분인지 가려보는게 어떠한가?" 라고 한것이죠
이말을 들은 이황과 이이의 제자들은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런 위대한 유학자이신 분들은 부인과 어떤 방식으로 정을 통할까 하는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그날밤 제자들은 다같이 두 스승님의 밤일 현장을 보러 몰래 찾아갔죠
먼저 이이의 집으로 찾아간 제자들은 몰래 문에 구멍을 뚫어 지켜보았는데 역시 대학자인 만큼 아주 점잖은 체위와 적당한 빠르기로 소리 한번 내지 않고 깔끔하게 일을 치른 뒤 곧바로 잠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제자들은 "역시 스승님은 언제 어디서든 품위를 잃지 않으시는구나" 라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고 하죠
그러자 이황의 제자들은 우리 스승님께서도 점잖음에서 처지실리가 있겠냐며 호언장담한뒤, 며칠후 이황의 부부관계를 훔쳐보기 위한 계획에 돌입합니다
그렇게 며칠후 이황의 집에 숨어든 제자들은 이황의 밤일을 훔쳐보게 되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이황은 보기드문 체위와 굉장히 격렬하게 몇번이고 일을 치뤘다고 하죠
심지어 제자들이 보기에는 너무 난잡하고 과감하기 까지해서 보기 민망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는데요
그러자 이이의 제자들의 입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던 반면 이황의 제자들은 똥씹은 표정을 하고 있었죠
그렇게 누가 더 성현인가에 대한 승부는 이이의 승리로 끝이났는데 이황의 제자들은 졌다는 부끄러움에 다음날 곧바로 이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전말을 고한뒤 이황에게 "대 유학자로써 어찌 그렇게 짐승처럼 일을 치르실수가 있습니까?!" 라고 따졌죠
그러니 이황은 껄껄껄 웃으며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무릇 남녀의 교합이란 음과 양의 조합이고 천지간의 화합과 같아서 비구름이 끼고 천둥이 몰아치듯 해야하는데 어찌 조용할수 있겠느냐.
율곡이 점잖게 교합하는것이야말로 음양의 이치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모든 만물은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큰 비가 내리려면 먹구름이 몰려오고 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쳐야 되는 법이며 그것이 자연적인 섭리이니라. 그래서 부부 관계를 운우지정(雲雨之情)이라 하는것이다" 라고 했죠
그리고 이황은 덧붙여 말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도덕군자라 해도 부부관계에 잇어서는 낙(樂)이 있어야 하는법이다
낙중에 최고의 낙이 운우지락(雲雨之樂)인데 부부관계에서 운우지락을 느끼는 것이야 말로 자연이 주는 큰 복이며 선물이니, 자네들도 많이 느끼고 살도록해라" 라고 하는것이었죠
그제서야 제자들은 운우지정과 운우지락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황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를 더했는데 "율곡이 그렇게 이치에 맞지 않게 일을 치르니 후사가 늦을까 걱정이 되는구나" 라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황의 이런 우려는 실제로 일어나게 되는데요
이이에게는 정실부인이던 노씨와 딸 한명밖에 없었는데 딸 마저도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렇게 이이가 죽은후 서자이던 이경림이 대를 잇게 된것이죠
당시 조선 사대부 집안에서는 적자가 없을경우 서자가 있어도 양자를 따로 들여 가문을 계승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이의 집안은 특이한 경우이긴 했습니다
어쨌든 이이는 친척에게서 양자를 들이지 않았고 서자인 이경림이 제사를 잇도록 했는데 당시 서얼은 과거 응시가 금지 되었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상 양반의 신분을 잃게 되는의미였고 이이 사후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명문가와 혼인을 할수도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명문가문에서 탈락되고 말았죠
이에 반해 이황의 종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이황의 종손들은 자손 규모에서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다고 합니다
한편 이황의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여인이었는데요
당시 사람들이 이황의 부인에게 남편에 대해 물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낮 퇴계랑 밤 퇴계는 전혀 다른사람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야사일 뿐이라 사실 여부는 확인이 불가능하지만 "낮퇴계 밤퇴계" 라는 말은 과거에 요즘에 쓰는말인 낮져밤이와 비슷한 말로 쓰이기도 했다고 하죠
이 영상을 보신 구독자 분들도 오늘밤 운우지정을 맺고 운우지락을 느끼시길 바랄께요
이황과 이이에게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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