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만 먹었으면 왕자의 난을 진압할수 있는 힘이 있었던 인물이자 왕위와 정치에 흥미가 없고 용맹한 무장 스타일이었던 정종 이방과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게는 수많은 아들들 중에서도 자신과 같이 무인의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성계와 함께 수많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와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전우이자 아들이었던 것인데요
그는 바로 이성계의 둘째 아들 '이방과' 입니다
이방과는 훗날 이성계의 뒤를이어 조선의 2대왕 정종으로 즉위하게 되죠
강한 무력과 용맹스러우면서 지략까지 뛰어난 그 였지만 온화한 성품과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탓에 자신의 동생이던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됩니다
오늘은 조선 2대왕 정종 이방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357년, 공민왕이 고려를 통치하던 시기에 태어났죠
그의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였습니다
아까 말했던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성품은 온화했지만 용맹했기 때문에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여러 전쟁터에서 전공을 세웠던 인물이죠
기록에 의하면 그의 체구는 곰처럼 강건했다고 하는데요
어릴적부터 아버지와 함께 전장을 다녔던게 운동(?)이 되었던 것인지 형제들 중 가장 장수하기도 했습니다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우왕이 왕위에 오르고나서 왜구들이 엄청 자주 출몰하여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았는데 심지어 왜구들이 지리산까지 쳐들어 온것이죠
이에 이성계와 이방과 등은 즉시 그곳으로 출진해 왜구들을 토벌해버렸습니다
또한 그 유명한 황산대첩에서도 형제들 중 유일하게 이방과만 참전해 활약했죠
당시 왜구와의 전투에서 지리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게되자 아버지 이성계에게 힘든 싸움이 될것 같다며 전투를 말렸지만 이성계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전투에 임하게 되고, 결국 승리를 거뒀는데 이때도 이방과는 어려운 전투에서도 끝까지 이성계 곁을 지키며 싸웠다고 합니다
당시 이성계에는 첫째아들 이방우가 있었지만 그는 수도인 개경에서 가문의 수장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동북면에 있던 이성계의 영지를 관리하고 가별초를 통솔하는 역할은 둘째아들인 이방과가 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가 가문에 미치는 영향력은 이방우 만큼이나 굉장히 막대했을거라고 예상됩니다
어쩌면 이성계의 가장 총애를 받은 아들이 아닐까 싶기도 하죠
어쨌든 고려 말기에 나라 전체는 혼란 그 잡채였는데요
최영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조정을 농단하고 전횡을 일삼던 이인임 일파를 축출하고나서 요동정벌을 하기 위해 고려 조정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성계가 군사들을 이끌고 요동을 향해 출진했을때 이방과는 기인제도로 인해 형 이방우와 함께 개경에 인질로 잡혀있는 상황이었죠
(기인제도 : 지방 유력자의 자식이 수도에 머물러있게 한 조치로, 지방 세력 유력자를 인질로 잡은 제도)
그리고 얼마안가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결정하자 이방과는 이방우와 함께 인질로 잡혀있던 곳에서 가까스로 탈출을 해 재빠르게 아버지 이성계에게 달려가 합류하면서 쿠데타를 성공시키게 됩니다
그 이후 정권을 잡은 이성계 였지만 계속해서 왜구들은 출몰하고 있었기에 이방과는 여러번 출진해 왜구들을 무찔렀죠
그만큼 군을 지휘하고 통솔하는데 있어서는 굉장히 유능한 무장의 모습을 보이던 이방과 였습니다
그리고 역성혁명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올때는 이방원과 마찬가지로 열성적으로 참여했는데요
동생 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 할 계획을 세웠을때도 이방원이 4명의 형들 중 유일하게 이방과와 논의 한것을 보면 알수있죠
그렇다보니 일부 역사학자들은 '정몽주 제거의 주축이 된 인물은 이방과 일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정몽주가 이방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 이방과는 공양왕을 찾아가 대놓고 정몽주가 죽었음을 통보했으며 이때 공양왕을 향해 "우리와 싸울것인지 순응할것인지 선택하라"고 협박했죠
그렇게 결국 조선이 건국되고 아버지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하자 그는 영안군에 책봉되었으며 아버지의 친위부대인 의흥친군위를 통솔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선 건국 이후 어머니 신의왕후의 자식들을 배제 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이방원과 함께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죠
그래도 무장으로써 소임은 다 했는데 왜구가 출현할때마다 언제든지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 왜구들을 무찔렀습니다
그러던 1398년, 마침내 동생 이방원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남은, 그리고 이복동생 이방석, 이방번 등을 제거하자 당시 이방우는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장남이었던 그가 이방원의 뜻에 따라 반 강제로 세자에 임명되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당시, 소식을 들은 그는 깜짝놀라 김인귀라는 인물의 집으로 도망을 쳤다고 하죠
사실 그는 의흥친군위의 지휘관으로써 입장이 애매했는데 동생이 일으킨 쿠데타를 진압하거나 아니면 함께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둘다 하지 않으려면 어딘가에 숨어있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만약 이방과가 마음먹고 의흥친군위를 이끌어 이방원과 맞섰다면 반란 실패로 돌아갔을 확률도 꽤 높은 편이라고 합니다
사실 그는 왕위에 오르려는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자신이 세자 자리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그는 "나보다 정안군(이방원)이 더 낫다'며 이방원을 추천하면서 극구 세자 자리를 사양했지만 결국엔 마지못해 받아들였고 불과 1개월 후인 1398년 9월 태조도 왕위를 그에게 양위하면서 조선의 제 2대 왕 정종이 된것이죠
그는 왕이 되었지만 모든 실권은 동생 이방원이 쥐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그는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격구나 사냥을 즐기면서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찌나 격구를 열심히 했는지 격구를 하던 도중 옆에 있던 사관이 뭘 적고 있는걸 보고 "내가 격구하는것도 다 적는것이냐?" 하고 물으니 사관이 "당연합니다" 라고 대답한 적도 있었다고 하죠
또한 신하 중 한명이 "태조께서 환관의 꼬임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 라고하자 정종은 그 신하를 부르더니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 라며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또한 사냥을 나가서 잡은 짐승들을 아버지 이성계에게 보냈다고도 하죠
그만큼 효심 지극한 인물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이성계도 정종에 대해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서로 애틋한 부자지간 이었죠
또한 정종은 수도를 개경으로 옮긴적이 있는데 그 이유는 형제끼리 죽고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던 한양과 경복궁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1400년 1월, 동생이던 이방간이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려고 하자 "너 미쳤냐, 당장 군대 해산시키고 궁으로 들어오면 내가 니 목숨은 지켜주마" 라고 했다고 하죠
결국 2차 왕자의 난은 일어났지만 이방원이 승리하게 되면서 형인 이방간을 어떻게 처분할지 정종에게 조언을 구하자 정종은 이방간을 선처해 달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방원도 이방간을 사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를 보내는걸로 마무리했는데 유배지에서도 식읍까지주며 편히 살수 있도록 조치 해주었다고 하죠
그리고 얼마안가 그는 동생 이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왕세제가 맞는것 아니냐고 신하들이 지적했지만 정종은 "그러면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로 삼겠다!" 라고 말하며 신하들의 반박들을 화통하게 물리쳐버렸죠
그리고 9개월 후에 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은 상왕이 되었습니다
야사에는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권유한 사람이 바로 아내 정안왕후 김씨라고 하는데요
더 왕위에 있다가는 죽임을 당할수 있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권했고 정종 역시 그녀와 생각이 같았기 때문에 왕위에서 물러난것이라고 하죠
어쨌든 상왕으로 물러난 이방과는 죽을때까지 놀러다니면서 편하게 사는데요
태종과도 사이가 좋아서 첫눈 내리는날 서로 장난을 친 이야기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있기도 합니다
첫눈오는날 그 눈을 그릇에 담아 약이 되는 음식이라며 누군가에게 보내면 그걸 받은 사람은 술을 쏴야하는 놀이가 있었는데 만약 이 눈이 담긴 그릇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도착하기전에 잡으면 반대로 눈을 보낸 사람이 술을 쏴야했죠
1418년 10월 27일 첫눈이 내리자 장난끼가 발동한 태종은 첫눈을 상자에 담아 최유라는 사람을 시켜서 좋은 약이라며 형 정종에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약상자가 도착하기 전에 정종은 소식을 알게 되었고 부하들을 풀어 최유를 잡으라 명했죠
그러자 눈치를 챈 최유가 재빠르게 도망쳐버려 결국 잡지 못했고 정종은 이 약상자를 받게 되면서 훗날 태종을 불러 큰 연회를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정종은 전국 각지의 온천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사냥과 격구를 하고, 연회를 즐기며 세월을 보냈는데 왕이 된후 엄청 바빴던 태종은 훗날 형 정종이 유유자적하며 놀러다니는 모습을 보고 내심 부러워 했다고도 하죠
그런데 태종도 형인 이방과를 깍듯하게 모시기도 했는데요
태종이 아내였던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진 이후 후궁을 더 들이면서 아주 휘황찬란하게 행사를 하려고 하자 정종이 나서서 태종을 다그쳤고 이에 태종도 거창하게 하려던 행사를 취소하고 조용히 후궁을 들였다고 합니다
태종이 뭔짓을해도 그러려니 하고 냅두던 정종이 태종에게 유일하게 한소리 한것이라고 하죠
그렇게 1418년, 조카이던 세종이 왕위에 즉위하는것 까지 보고 다음해인 1419년에 63세의 나이로 천수를 누리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고나서 오랫동안 제대로된 시호와 묘호를 받지 못했는데요
정종은 명나라가 조선의 왕으로 인정하기 전에 이미 태종에게 양위를 해버렸고 이후에도 명나라로부터 정식 조선 국왕으로 책봉 받지 못했으며 그는 임시로 국사를 처리한 사람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세종은 그를 정식 선대왕으로 취급할수 없었고 왕실의 웃어른으로써 종묘에 모시기는 했지만 묘호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왕들에게 올리는 시호는 대왕을 제외하고 8글자가 기본이었는데 정종에게는 단 4글자의 시호만 올려졌으며 그리고 정종의 위패는 가장 동쪽 끝방에 두었던 것이죠
종묘는 죽은자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해가지는 서쪽이 높은자리이고 동쪽을 낮은자리로 보는데 원칙대로라면 정종이 태종보다 높은자리에 있어야 했지만 정종은 후손들보다 더 낮은자리에 위패가 모셔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예종대에 들어서 그의 묘호 문제가 논의 되기 시작했지만 예종이 일찍 죽어버리는 바람에 논의는 거기서 그치고 말았고 이후 성종, 중종대에 정종의 자손들이 묘호를 올려달라고 상소했지만 성종은 들은채도 안했고 중종 역시 유야무야 흘려버렸죠
이후 정종이 죽은지 무려 262년이 흐른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논의가 이루어져 비로소 '정종'이라는 묘호가 정해지게 된것입니다
그의 묘는 현재 북한에 있는데요
조선시대 왕들 묘 중 유일하게 북한에 있다고 하죠
그의 삶을 보면 큰 욕심없이 맡은바 임무를 다하고 아버지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며 형제들과는 정말 잘 지내려고 노력했던 온화한 성품을 가진 큰형의 느낌인것 같네요
정종이 노력한 덕분에 동복형제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죠
지금까지 정종 이방과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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