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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헨드릭 하멜. 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살았던 인물

by 사탐과탐 2023.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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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서 13년 동안이나 억류되어 고생이란 고생은 다하며 살았던 인물 헨드릭 하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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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효종 때인 1653년 8월, 수십명의 이상한 생김새를 한 외부인들이 제주도에 도착하게 됩니다

파란눈을 가졌고 높은코에, 노란머리, 그리고 짧은수염을 가졌던 그들을 본 제주도인들은 마치 괴물같이 생겼다고 했죠

 

이런 괴물같은 생김새를 가졌던 사람들은 바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중 제주도 인근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겨우 제주도에 상륙했던 네덜란드인들이었습니다

그중 배의 선원이자 서기를 맡고있던 하멜은 제주도에 상륙한때부터 다시 네덜란드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는데요

 

이것이 바로 <하멜 표류기> 이죠

이 하멜 표류기는 17세기 조선의 생활상에 대해 서양인이 최초로 기록한 책으로써 일부 잘못된 내용과 왜곡된 내용도 있지만 예리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조선의 실상을 비교적 정확하고 충실하게 기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하멜은 약 13년동안 조선에 억류되어 살면서 온갖 험난한 경험을 겪게 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늘은 이 하멜과 하멜표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헨드릭 하멜의 고향은 네덜란드 호린험이었죠

대만의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는 레세르를 임지로 데려다 주는 임무를 받아 선원이자 서기로써 1653년 1월 네덜란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6월 14일 대만의 안핑에 도착 후 다시 일본 나가사키로 가라는 임무를 받고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죠

 

그런데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한 선원이 육지가 보인다고 외치자 급히 그곳으로 향하게 되었는데 그렇게 도착한곳은 바로 제주도의 남해안이었던 것입니다

심한 풍랑으로 인해 하멜이 탄 무역선 선원 64명중 28명이 죽고말았고 남은 36명만이 제주도에 도착할수 있었죠

 

그리고 곧바로 제주도 관아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붙잡혔는데 다행히 당시 제주 목사인 이원진은 그들에게 머물집과 식량을 내어주면서 효종에게 보고 드렸으니 답장이 오면 다시 일본으로 갈수 있을거라며 위로해 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얼마안가 제주목사가 바뀌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하멜 일행에게 야박하게 대했다고 하죠

 

그러자 생활을 버티지못한 그들은 버려진 작은 배로 그곳을 탈출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이에대한 처벌로 각각 곤장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수개월이 흐르고 1654년, 하멜 일행은 서울로 호송되었죠

 

이때 훈련도감에서 일하던 '얀 반스 벨테브레 (박연)'가 통역을 하기위해 그들과 만나게 되었는데 백인 인데 갓을 쓰고 한복도 입은데다가 알고보니 같은 네덜란드 출신이라는걸 듣고 하멜과 동료들도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때 벨테브레는 그들에게 "여기 들어온 이상 돌아갈 생각 말아라" 라고 말해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죠

 

또한 효종 역시 "우리는 외국인을 나라 밖으로 보내지 않는다" 라며 그들을 다시 일본으로 보내주지 않았고 그렇게 길고 긴 조선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처음에 그들은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효종의 어가를 수행하는 직을 임명 받아 매월 쌀 40kg의 넉넉한 봉급까지 받았다고 하죠

하지만 그들은 이미 광대가 되어 있었는데요

 

제주도 사람들이 하멜 일행이 '사람보다 괴물에 가깝게 생겼다'는 소문을 퍼뜨렸으며 심지어 '그들이 뭘 마실때는 코를 귀 뒤에까지 돌려놓고 마신다' 라는 말까지 퍼트렸던 것이죠

이에 하멜 일행을 구경하기 위해 신분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고 높은 벼슬에 있던 고관대작들은 그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가족들과 손님들에게 구경을 시키는 등 마치 동물원에 동물들처럼 대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그들을 괴상하게 여기고 배척했지만 유일하게 자신들에게 편견없이 잘해주는 승려들과는 굉장히 사이가 좋았다고 하죠

하멜일행은 이후 약 2년간 서울에서 억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동안 일행 중 14명이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겨우 22명만이 살아남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청나라 사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은 하멜 일행은 조선을 뜨기 위해 청나라 사신이 지나가는 길에 갑자기 뛰쳐나가 자신들을 살려달라며 애원했죠

 

하지만 조선 병사들에 의해 곧바로 체포 되었고 조선 정부는 청나라 사신들에게 뇌물을 주고 이 일을 무마 시켰으며 청나라 사신들도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었기에 이일은 유야무야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이 일은 조선 조정에서는 있어서는 안될 어이없는일로 여겨졌는데요

그렇게 조정에서는 이들을 처형해야한다와 살려줘야한다로 입장이 나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효종은 하멜일행을 유배시키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그들은 전라도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유배지에서도 정기적으로 쌀 10kg을 지급받았는데 효종은 그들에게 내탕금을 써서 쌀 30kg을 더 지급해주었다고 하죠

그만큼 그들은 생각보다 넉넉하게 살수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멜일행의 좋은 세월은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 다 가버리는데요

이후 조선 정부에서는 하멜 일행에게 아예 관심이 없어졌으며 심지어 이 당시 극심한 흉년이 들어 그들에게 지급되던 식량마저 엄청나게 줄어버린 것이죠

거기다가 일행들은 여수 좌수영과, 남원, 순천으로 뿔뿔히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온갖 잡역에 투입되면서 길고긴 고난의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식량이 부족해 항상 굶주리다보니 나중에는 살기위해 구걸까지 하며 지내게 되죠

 

당시 하멜이 억류 생활을 한 곳은 여수에 있던 전라 좌수영이었는데 먹을걸 구하기 위해 작은 배 한척을 빌려 바다에 나가 생선을 잡기도 했으며 이때 부근의 섬들과 조수, 풍향등을 알아낼수 있었죠

게다가 일부 관리들은 그들을 학대하기까지 하자 일행 22명 중 결국 16명만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는 더이상 버틸수 없다 생각한 하멜 일행은 탈출을 위한 계획을 짜기 시작했는데요

그동안 자신들이 모아놓은 돈으로 친해진 조선인의 이름으로 그 마을 어부의 배를 한척 구입하려 했죠

하지만 배를 팔려고 한 어부가 배를 사려는 사람들이 하멜 일행인걸 알게 되고 혹시나 있을 불상사에 대해 걱정하며 배 판매를 무르려 하자 그들은 원래 가격에 몇배를 더 쳐주면서 겨우 배를 구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혹시 모두가 동시에 탈출하면 곧바로 탄로나 추격을 받을것이 걱정되어 전원이 탈출하지는 못하고 1666년 9월, 총인원의 반인 8명만이 밤을 틈타 배를 타고 탈출해 결국 일본의 나가사키에 도착하게 되죠

이들은 약 1년간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관리에게 심문 받은 뒤 네덜란드를 떠난지 13년만인 1668년 7월, 천신만고 끝에 네덜란드에 귀국 할수 있었습니다

 

남아있던 8명의 일행도 조선 조정에서 석방해주었고 그들도 무사히 네덜란드로 돌아갔다고 하죠

그리고 하멜과 동료들은 소속 회사였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찾아가 조선과 일본에 억류되있었던 13년동안 받지못한 임금을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대한 증거이자 보고서인 항해 일지를 제출했는데 이 항해 일지가 바로 지금의 <하멜 표류기> 가 된것이죠

 

그렇게 하멜 일행들은 밀린 임금을 받을수 있었으며 이후 하멜은 인도로 항해를 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후 생활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다고 합니다

하멜은 <하멜 표류기>와 <조선 왕국기>를 만들었는데요

이 책들은 1668년 3개의 출판사에서 동시에 출간되었고 이후 프랑스와 영국, 독일 등에서도 앞다투어 출간 되었다고 하죠

 

그리고 먼나라 조선에 대한 책으로 당시 유럽인들의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이 하멜 표류기는 너무 서구 중심적이고 조선에 대해 악담을 늘어놓았다며 비난과 비판을 하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하지만 하멜은 13년간 강제로 억류 되어 있으면서 마치 광대나 동물원의 동물처럼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고 온갖 노역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며 살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해 악감정이 들어가 있을수도 있다고 하멜 표류기 내용을 '그럴수있지'라며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많죠

 

또한 하멜 표류기라는 기록 자체가 동인도 회사에 보고서로 제출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하멜 일행들이 '엄청 힘들고 개고생 했으며 하마터면 죽을뻔했다' 라는식으로 적어야 더 많은 보상금과 임금을 받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하멜 표류기에는 오류도 많고 왜곡도 굉장히 많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멜은 당시 조선인들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적은것도 많은데 "조선인들은 서로를 믿지 못해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는 경향이 강하며 이를 자랑스러워한다"

"벨테브레가 말하길 조선인들은 겁이 많아 병자호란 때 싸우다 죽은 사람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조선인들을 지나치게 믿어선 안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서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웅적인 행위라고 여긴다"

라는 식으로 기록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잘해준 승려들과 제주 목사 이원준, 전라수사 이도빈 등의 경우에는 굉장히 호의적으로 기록해 두었고 표류 직후에는 조선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받았다고 저술하는 등 호의적인 내용도 많기 때문에 그들을 그렇게 비난할것까지는 없을것 같죠

그런데 하멜표류기 내용에는 왜곡된 부분도 많은데요

 

"관아에서는 남편을 죽인 여자를 어깨까지 파묻고 옆에 나무톱을 놓아두었는데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양반을 제외하고 누구나 그 톱으로 한번씩 그녀가 죽을때까지 목을 잘라야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런 사형방식은 에도시대의 처형법인 노코기리비키와 혼동했다는 의견이 있죠

 

또한 "왕을 저주한 왕의 형제의 아내를 바닥이 구리로 된 방에 가두고 불을 지펴 죽였다" 라는 내용은 민회빈 강씨에 대한 이야기로 짐작 되는데 실제 민회빈 강씨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되었기 때문에 하멜 표류기에 나오는 기록과 완전히 다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 죽은 피해자의 사체를 씻은 식초와 물을 살인자에게 먹여 불룩해진 배를 때려 죽이는 처형법'이라던지 '주인을 죽인 수법 그대로 하인을 처형하는 방법' 등 굉장히 잔혹한 처형 규정은 경국대전과 대명률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그냥 허풍이나 과장이 섞인 풍문을 어디서 들었거나 그런 험한곳에서 살았다는걸 회사에 말하고 보상금을 더 타먹기위해 기록해 둔것으로 추측하고 있죠

 

이 외에도 수많은 왜곡과 뻥들이 엄청나게 많지만 하멜 표류기는 역사서 라기 보다는 개인이 쓴 견문록이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는 있지만 역사서로써의 가치는 더 검증해봐야할것 같습니다

하멜 표류기는 삼국지연의처럼 사실에 기반해서 쓰긴했지만 더 흥미롭고 재밌게 하기 위해 많은것들이 추가된 느낌이라서 그냥 재미로 읽는것이 나은것 같네요

 

지금까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선에 도착해 13년간 온갖 개고생을 했던 비운의 인물 하멜과 하멜표류기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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