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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인수대비.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 아들, 손자까지 매우 골때리던 인물들이었던 여인

by 사탐과탐 2023.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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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 아들, 손자까지 매우 골때리던 인물들이었던 여인 인수대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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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지지리도 남자복(?)도 없어서 평생 스펙타클한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녀는 아버지와 시아버지, 남편, 아들, 손자까지 일찍 죽거나 아니면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할정도의 엄청난 일을 치렀던 인물들이죠

 

오늘 이야기할 인물은 바로 인수대비 한씨입니다.

한씨의 시아버지는 수양대군, 남편은 의경세자에 아들은 성종, 손자는 연산군이었는데요

그래서 어릴적부터 죽을때까지 온갖 사건사고에 휘말리는 인생을 살았죠

 

그녀는 1437년 10월, 한확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한확은 자신의 누나와 여동생을 명나라 공녀로 바친 뒤 조선 정계의 거물이 되었던 인물인데요

그에 대해 세종조차 "이 사람은 죄를 지어도 내가 벌 줄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기까지 했을 정도의 인물이었죠

 

어쨌든 그녀는 계유정난이 일어나기 3년전인 1450년 수양대군의 장남 도원군 이숭과 혼인을 맺어 군부인이 되었죠

이때부터 그녀의 위험천만하고 스펙타클한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녀가 군부인이 되고 얼마안가 시아버지이던 수양대군이 쿠데타(계유정난)를 일으켜 왕위에 올랐고 남편이던 도원군은 왕세자에 봉해졌고 한씨 역시 세자빈이 되었죠

만약 실패했다면 목숨이 열개라도 모자랐을 판에 다행히(?) 쿠데타가 성공하면서 그녀는 살아남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한씨는 남편 의경세자와 굉장히 금슬이 좋았다고 하는데요

남편과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낳았는데 월산대군과 명숙공주, 그리고 훗날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이죠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자신은 왕비가 되고 자신의 자식들은 남편 의경세자의 뒤를 이어 왕이 될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한씨의 편이 아니었죠

 

그녀가 세자빈이 되고난 이후 아버지 한확이 명나라에 세자 책봉의 고명을 받아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당시 한확은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권신이었기 때문에 한씨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는 막강한 정치적 아군이자 후견인이었는데 하루아침에 아버지이자 후견인을 잃고 만것이죠

거기다가 또 안좋은일이 벌어지는데 20살밖에 되지 않았던 남편 의경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리고 만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원래 같으면 의경세자의 아들이던 월산대군이나 자을산군이 다음 세손이 되었어야 했지만 결국 8살에 불과했던 시동생 이황(훗날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그렇게 그녀 역시 불과 2년 3개월만에 세자빈 자리를 아랫동서에게 넘겨주게 되었죠

그리고 자신은 수빈이라는 빈호를 받아 어린 세 자녀와 함께 궁을 나갈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세조는 맏며느리였던 한씨가 불쌍해서 궁에 살도록 허락했지만 한씨는 끝까지 사가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세조가 불쌍한 그녀를 위해 새로 지어준 집이 현재의 덕수궁이죠

 

그렇게 궁밖에서 살게된 그녀는 자식들의 교육을 매우 엄격하게 시켰고 그러다보니 세조와 정희왕후는 농담삼아 그녀를 폭빈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궁을 나온 이후에도 시아버지 세조와 시어머니 정희왕후를 정성껏 봉양해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죠

또한 그녀는 막내아들 자을산군을 당시 최고 권력가이던 한명회의 딸과 결혼 시켰고 신숙주 등 당시 힘있는 권세가들과도 친밀하게 지내면서 여전히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후 시아버지 세조가 죽고 시동생이던 예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예종은 19살밖에 되지 않았던 어린나이에 고작 4살짜리 제안대군만을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나버리자 시어머니였던 정희왕후는 한명회와 상의해 한씨의 둘째아들 자을산군을 다음 왕으로 즉위시켰는데 그가 바로 성종이었죠

자신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한씨는 왕대비가 되었어야 했지만 자을산군이 예종의 양자로 입적한뒤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성종이 한씨의 조카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녀는 명실상부 왕의 생모였기에 다시 궁으로 돌아올수 있었는데 문제는 그녀가 빈의 지위에 있다보니 상당히 애매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대신들과 성종은 이 일에 대해 논의한 끝에 그녀의 남편이었던 의경세자는 덕종으로 추존되었으며 그렇게 자신도 인수대비가 되어 다시 화려하게 궁으로 복귀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또 다시 문제가 생겼는데 예종의 계비인 안순왕후와 인수대비 중 누가 더 서열이 높은지 논란이 발생했던 것이죠

 

이때 정희왕후가 나서서 맏며느리인 인수대비가 더 서열이 높다고 공언해주면서 더이상 이 문제는 논란이 되지 않았습니다

인수대비는 여성으로써는 굉장히 박학다식했었는데요

그래서인지 13살의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을 대신해 누군가 수렴청정을 했어야 했는데 이때 정희왕후가 자신보다 문자를 더 잘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것이라고 하기도 했었죠

 

하지만 당연히 인수대비는 사양했고 그대신 한문에 밝지 못했던 정희왕후에게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합니다

또한 인수대비는 왕실 여인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내훈>을 짓기도 했는데요

1475년에 만들어진 이 책은 여성의 덕목과 훈육에 대해 저술한 책으로 한글로 만들어진 최초의 여성 교육서였죠

인수대비는 책을 지을 정도로 뛰어난 학식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녀는 평소 "여인은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 라는말을 자주 했었는데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그만두고 성종이 친정을 시작했을때도 자신은 뒤로 물러나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않고 조용히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 역사의 한획을 긋는 무시무시한 사건이 발생하죠

한명회의 딸이자 성종의 부인이던 공혜왕후가 후사없이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다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이던 윤씨를 중전의 자리에 올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윤씨는 조선 왕실 전체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훗날 연산군이 되는 이융이죠

하지만 그 이후 성종이 중전 윤씨를 잘 찾지 않고 다른 후궁의 처소에만 드나들자 윤씨는 엄청난 질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1477년, 성종이 중전 윤씨의 방에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부적과 비상(독)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면서 둘의 관계는 파탄나기 시작했죠

그로부터 2년후인 1479년, 성종은 신하들의 만류와 반대를 무릅쓰고 중전 윤씨를 끝내 폐위해버렸습니다

이때 대왕대비인 정희왕후부터 왕대비인 인수대비까지 윤씨를 폐위 하는데 찬성을 했다고 하죠

당시 인수대비는 폐비 윤씨를 폐위하는 여러가지 이유를 밝혔는데 몇가지만 이야기 하자면 '윤씨가 성종이 먹을 음식에 독을 넣지 않을까 염려스러워 윤씨가 지나가는 곳에는 어선(왕이 먹을 음식)을 두지 않도록 금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갈수록 윤씨의 악함이 커지자 그걸 가르칠려고 해도 윤씨는 고쳐질 가망이 없었다'고 하죠

 

또한 윤씨는 '성종을 용렬한 무리'라고 욕했으며 '나쁜짓을 저지른걸 보고 대비들이 물으면 성종이 가르친것이라 하고 성종이 꾸짖으면 대비가 가르친것이라며 거짓말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여러가지 이유를 들며 인수대비는 성종의 편을 들어주었고 그렇게 중전이 된지 3년만인 1479년 6월에 윤씨는 폐비가 되어 궁밖으로 쫓겨나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후인 1482년 9월에 폐비 윤씨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성종은 그녀에게 사약을 내렸고 그렇게 윤씨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 했죠

 

이 일은 훗날 연산군이 왕이 된 이후 끔찍한 일들을 일으키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얼마후인 1483년 5월에, 시어머니이던 정희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인수대비는 왕실 최고 어른이 되었죠

그런데 아들이던 성종이 37세의 젊은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인수대비는 자신의 자식이 죽는것까지 보게 되는 슬픔을 겪기도 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이후 자신의 손자이던 연산군이 왕위에 올랐고 10년후인 1504년 1월, 인수대비는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꼈는지 문안 인사를 하러 온 신하에게 "나는 이미 늙었고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내가 만약 죽더라도 3일안에 주상에게 육선을 올리도록 하라" 라고 말할 정도로 연산군과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하죠

그리고 연산군도 할머니인 인수대비를 위해 큰 잔치를 열기도 하고 많은 선물도 하는 등 인수대비에게 효를 다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착하던 손자 연산군으로 인해 인수대비는 기가 막히고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되는데요

1504년 3월, 연산군은 자신의 친어머니이던 폐비윤씨가 사사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분노에 휩쌓여 아버지 성종의 후궁이던 정씨와 엄씨를 때려 죽이고나서 정씨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고 찾아간곳이 바로 인수대비의 처소였던 것이죠

 

야밤에 인수대비의 처소로 들이닥친 연산군은 할머니 인수대비에게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라고 하며 안양군에게 독촉해 술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런 기가 막힐정도로 무시무시한 장면을 보게된 인수대비는 마지못해 허락했는데 연산군이 곧바로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라고하자 인수대비는 놀라며 얼른 베 2필을 가져오라 명한뒤 연산군에게 줬다고 하죠

 

그 이후 연산군은 또 인수대비에게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실록의 기록은 '(연산군이 인수대비에게)불손한 말을 많이 했다' 라고 되어 있는데요

조선왕조실록에는 왠만한 욕들은 그대로 다 기록했지만 너무 심한 경우에는 당시 상황만 간접적으로 묘사했는데 연산군이 마지막 질문을 한 이후에 상황만 적은걸 보면 온갖 욕지껄이를 해가며 막장 패드립을 인수대비에게 날렸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이후 인수대비는 무지막지한 충격을 받아서 인지 불과 약 1개월후인 4월 27일에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인수대비가 죽자 연산군은 신하들에게 "대비께서는 왕비 자리에 있었던 적이 없으니 왕세자빈의 예로 장례를 치르는게 맞겠지?" 라고 물었는데 연산군의 무자비한 폭력에 바짝 쫄아있던 신하들도 이때는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영의정이던 유순은 "그건 전하의 뿌리를 스스로 격하시키는 것이옵니다" 라고 말했고, 그렇게 결국 왕후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되었죠

 

인수대비는 시집을 오니 시아버지가 쿠데타를 일으켰고 든든한 백이 되줘야할 친정아버지는 갑자기 객사를 해버렸으며 심지어 세자이던 남편 마저 일찍 요절했고 그리고 자식이던 성종은 자신보다 일찍 저세상으로 보냈어야 하는 슬픔을 겪었으며 사랑하던 손자 연산군에게 온갖 욕설을 들으며 모욕을 당했던 걸보면 진짜 지지리도 남자복(?)이 없는여자 같네요

하지만 이 파란만장했던 삶을 버텨내고 66세까지 살았던걸 보면 인수대비는 당대의 대단한 여인이 맞긴 한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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