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홍장은 나라를 말아먹은 매국노에서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 사이에서 망해가던 청나라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충신으로 재평가된 인물입니다
이홍장은 청나라 말기의 한족계 거물급 정치가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양무운동 등을 주도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이홍장이 한 나라의 재상이라는 위치에 있을 만한 능력도 있었고 청나라를 개혁할 의지와 비전도 충분히 갖추고 있기는 했지만 청나라의 상황이 너무나도 개판이었던 것이 그에게는 큰 불운이었죠
그 당시 청나라는 군대와 경제, 외교 등 모든 것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이홍장과 몇 명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해결이 되지 못했던 것인데요
오늘은 서태후의 시대에 청나라의 실질적인 지배자라 불리기도 했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면서 불운한 결과를 맞았다고 평가받는 이홍장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홍장은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 출신의 한족으로 개혁가이자 유학자인 증국번의 직계 제자였다고 하죠
1847년 과거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그는 한림원으로 입학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1850년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홍장은 문관 출신임에도 태평천국 진압에서 매우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면서 군벌이 되어 청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죠
이후 서태후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 운동인 양무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면서 막대한 예산을 들여 독일 영국 등으로부터 대량의 철갑함과 순양함, 어뢰정 등을 구입하면서 당대 아시아 최강이라는 북양함대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의 군사력이 청일전쟁에서 무참히 무너지면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잃어버리고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는데요
다만 이건 마냥 이홍장의 잘못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것이 당시 서구 문물의 수입을 과하게 한 탓에 청의 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군사력 강화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그 시점에 청일전쟁이 터진 것이 이홍장과 청나라에게는 불행이었죠
하여튼 청일전쟁을 정리하기 위한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은 청나라 측 대표가 이홍장이 아니면 전후 협상을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홍장만이 조약을 실제로 이행할 권한을 가졌다고 보았기 때문인데요
때문에 이홍장은 당시 72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시모노세키 조약에 갔는데 일본의 극우파인 고야마 로쿠노스케에게 저격을 당하면서 총알이 얼굴에 박히는 수모를 당했다고 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홍장은 다음날 얼굴에 붕대를 감고 협상장에 나서는 위엄을 보여주었고 결국 이홍장이 일본에서 당한 테러로 인해 국제 여론이 악화될 것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은 3억 냥의 배상금을 2억 냥으로 줄이고 당초 톈진지역을 내어달라는 요구에서 타이완을 내주는 것으로 대신하는 합의까지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이홍장은 청나라 중앙 정부의 1년 치 총수입을 뛰어넘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아끼게 해주는 공을 세웠죠
이후 이홍장은 일시적으로 다시 정계에 기용되기도 했지만 변법자강운동이 일어났을 당시 급진파 세력들이 개혁파 중에선 온건파에 가깝던 이홍장이 서태후와 연합할 것을 걱정하며 그를 멀리하면서 결국 이홍장은 다시 보잘것없는 관직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는 재기하지 못한 채 신축조약으로 청나라가 사실상 반식민지화가 된 지 두 달이 지난 1901년 11월에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죠
이홍장이 과거시험 출신이라서 그가 고리타분한 성격을 가졌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오히려 이홍장은 국제 정세에 밝았으며 앞을 내다보는 눈도 뛰어났습니다
1870년대 청나라 조정을 둘로 갈라놓았던 새방해방 논쟁에서 이홍장은 영국 좌종당은 러시아를 잠재적인 적대국으로 삼을 것을 주장했죠
두 나라 모두 야금야금 중국의 이권이나 영토를 삼키고 있었는데 이홍장은 해양세력인 영국이 중국에 더 위험하다고 본 것인데요
때문에 이홍장은 건륭제 시절 청나라가 손에 넣었지만 툭하면 반란이 일어나고 대부분의 지역이 사막에 불과한 신장지역을 러시아에 팔고 그 돈으로 영국을 몰아낼 함대를 육성하자고 주장했죠
다만 문제는 청나라가 제대로 된 근대 국가가 아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근대적 문물을 제대로 다룰 줄 몰랐던 그들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는데 청일전쟁 때만 해도 당시 청나라군의 무기는 일본군의 무기보다 대체로 성능이 뛰어났으며 함선의 총숫자만 보더라도 일본 해군의 2배나 되었다고 하죠
게다가 일본 해군에는 없는 7,000톤급 전함 2척도 북양함대에 존재했기에 일본 해군과 대등하게 교전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때문에 정상적으로 함대를 운용하기만 했다면 청나라가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다고 하죠
하지만 정작 그 좋은 무기와 함선을 써먹어야 하는 청나라의 지휘관들이 그때까지도 명나라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던 형편없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서양 교관들이 아무리 청군을 훈련시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고 결국 일본군에게 참패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그렇게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타격을 받으면서 이홍장 또한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만약 청나라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만 했다면 그가 청나라를 일으켜 세운 위인으로 대접받았을 거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다만 이건 요즘에 와서야 나오기 시작한 평가고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중국에서 이홍장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좋지 않았죠
최대한 좋게 봐도 나라를 말아먹은 무능한 정치인 좀 심하게 말하면 외세와 내통하며 나라를 배신한 매국노라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거 이홍장이 벌였던 양무운동이 체제를 바꾸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킨다는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권 정책과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는지 1980년대부터 이홍장에 대한 대륙의 평가는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홍장이 살아있을 당시에는 청나라 내에서 나름 개혁 의지가 있던 실권자로 서구권에서도 꽤 유명했는지 그가 여러 유명한 인물들과 만남을 가졌다는 기록들이 많은데요
이홍장은 미국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와도 만났는데 그랜트는 이홍장을 글래드스턴이나 비스마르크와 동급으로 높이 평가하기도 했죠
1896년에는 이홍장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직접 만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중국인의 키는 남쪽지역으로 내려갈수록 작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북방계가 많은 요동 쪽이나 북중국이 키가 더 큰 것은 중국 내에도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남중국인 안후이성 출신임에도 당시에 180cm 이상의 키를 가졌다고 전해질만큼 남다른 체격을 가지고 있었죠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나란히 서있을 때도 키가 193cm인 그와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같은 시기 이홍장과 친분이 있었던 미국인인 찰스 다니엘 테니의 회고에서도 이홍장은 190cm 정도의 장신이었다는 증언이 있으며 영국 귀족과 찍은 다른 사진을 봐도 그는 당대 서양인에 비해 전혀 체구가 왜소하지 않았다고 하네요
이런저런 증언들과 사진들로 종합해 봤을 때 이홍장의 신장은 180cm대 후반~190cm 정도로 추정됩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홍장이 40살이 넘은 나이에 뒤늦게 공부한 영어를 마스터해서 비스마르크와 통역 없는 대화가 가능했다는 점이죠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시모노세키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협상할 때도 두 사람 모두 영어에 능했기 때문에 통역 없이 직접 협상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을 때 여객선에서는 그 나라의 서민들과도 거리낌 없이 대화를 했다고도 하죠
당시 이홍장은 조선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만큼 조선 사람들도 많이 만나 봤는데 그중에는 흥선대원군도 있었다고 합니다
다만 흥선대원군과 이홍장이 대등한 입장에서 만난 것은 아니고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되었을 때 이홍장이 반란의 우두머리인 흥선대원군을 심문하는 입장이었다고 하죠
그럼에도 이홍장은 흥선대원군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는데 1882년 임오군란 직후에는 "그의 성품이 간교하고 포학하다"고 평가했다가 1884년 올린 보고서에서는 "조선인들은 모두 문약하나 이하응은 효웅이다 그의 재능은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호평하기도 했습니다
이홍장은 조선에도 꽤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운요호 사건 이후 조선이 일본의 무력시위에 당황해 청나라 조정의 의견을 물었을 때 이홍장은 조선에 일본과 통상 조약을 맺을 것을 권고하면서도 일본이 종주국인 청나라를 대신해 조선에 주도권을 행사할까 봐 미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과의 통상 조약까지 주선했죠
일부 청나라 관리들이 속국인 조선을 아예 병합해 성을 설치하자고 주장했지만 이홍장은 비현실적이라며 그들의 의견을 물리쳤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국력으로도 조선의 병합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이는 이홍장이 정치적으로도 조선을 별개의 나라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죠
즉 이홍장은 조선을 무리하게 병합하기보다는 기존의 속국 형태로 유지시키고 청나라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 청나라에게도 더 이득이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역사상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한나라와 당나라처럼 한반도 일부를 직접 지배하려고 한 경우도 있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는 조공 관계를 맺고 상국으로 군림하는 정도에 만족했지 아예 한반도 전체를 집어삼키려고 하지는 않았죠
강희제 시절에도 대만을 복속하면서 조선까지 노리자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강희제는 조선이 중국과는 풍속이 다르다며 병합의 대상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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