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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홍수전. 예수에 빙의해서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키고 청나라를 거의 집어삼킬뻔 했던 교주

by 사탐과탐 2023. 6.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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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 스스로 예수의 동생이라 칭하며 태평천국운동을 일으킨 교주 홍수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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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 운동은 청나라 말기에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표어를 내세우며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고 새로운 왕조 건설을 목표로 일어난 농민운동인데요 

이 태평천국 운동의 지도자였던 홍수전은 원래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었지만 몇 번이나 과거시험에 떨어지자 흑화 하면서 중국역사에서도 손에 꼽힐만한 스케일의 반란을 일으키게 되는 인물이죠 

 

오늘은 이 홍수전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홍수전은 3남 2녀 중 넷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남매들 중 그가 가장 머리가 좋았기 때문에 아버지인 홍경양이 그의 학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줬다고 하죠 

게다가 그가 살던 화현이라는 마을에서는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기에 홍 씨 집안은 물론 마을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대를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젊은 시절의 홍수전은 똑똑한 머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과거에 응시할 때마다 계속 떨어졌다고 하는데요 

 

1834년 처음으로 과거를 치렀지만 불합격했고 1836년에는 두 번째 과거시험을 치르러 가던 중에 유명한 유학자와 미국인 선교사를 만나 가르침을 얻은 후 현시와 부시 원시로 이루어진 시험단계에서 첫 시험인 현시까지는 통과했지만 부시에서 또다시 떨어지면서 크게 상심한 그는 병을 앓고 다 죽어가는 중에 이상한 내용의 꿈을 꾸게 되는데요

 

홍수전의 주장에 따르면 그 꿈은 바로 기독교의 유일신이라 불리는 야훼가 홍수전을 아들이라 칭하며 신성한 칼을 그에게 선사했고 그 칼로 요괴들을 무찌르는 꿈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예수가 꿈속에서 그의 형으로 나오는 등 매우 화려한 내용의 꿈을 꾼 홍수전은 40일 만에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하죠

그는 예수가 겪은 광야의 유혹과 같은 40일 동안 자신도 같이 앓아누웠다는 괴상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843년 다시 과거시험에 떨어진 그는 외사촌 이경방이 사는 연화당촌에서 선생 노릇을 하며 지냈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 날 이경방에게서 중국 최초의 목사인 양아발이 지은 성경 번역본인 권세양언이라는 책을 빌린 후 읽게 되는데 황당하게도 홍수전은 이 책의 내용에 예전에 자신이 꾼 꿈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 자신이 야훼의 아들이자 예수의 동생이며 큰 뜻을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후 자신의 외사촌인 이경방을 첫 신자로 포섭한 홍수전은 그와 서로 엉터리 세례를 주고받은 후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고 하죠

친척 동생인 홍인간과 풍운산까지 전도하는 데 성공한 홍수전은 성서에 나온 대로 우상을 없애야 한다면서 공자의 위패를 없애는 것을 시작으로 사당과 절 등의 시설을 부쉈고 이런 지나치게 과격한 행동 때문에 고향 마을에서는 홍수전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기껏 하던 선생 자리에서도 잘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홍수전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1844년 봄에 풍운산 및 그의 두 친척과 광둥성의 곳곳을 떠돌면서 전도를 시작했는데 34일 동안 160km나 되는 거리를 돌며 전도를 계속했음에도 당시 그들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팔던 붓과 벼루를 싸게 사기 위해서 신도인척 연기하는 사람들만 몇 명 있었을 뿐 성과는 거의 없었죠

그럼에도 홍수전은 여기서 굴하지 않고 이번에는 자신의 외가인 왕 씨들이 많이 살고 있던 서쪽지역의 광서성 지역으로 풍운산과 단 둘이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광서는 민속신앙이 발달한 곳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홍수전의 사상은 전혀 먹히지 않았고 그곳에서 몇 달 버티지 못한 홍수전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런데 홍수전이 고향으로 떠났음에도 혼자 남은 풍운산은 주강 일대를 떠돌며 전도를 계속하면서 결국 자형산 일대의 금전촌이라는 지역에서 근거지를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풍운산은 홍수전보다 덜 과격한 방법으로 전도를 하면서 우상을 파괴하는 행위를 자제했던 데다 평소 친화력과 설득력이 상당히 좋았던 자신의 장점을 살려 너무나도 가난하게 살던 그 지역의 백성들과 주변 이민족들까지 모두가 같은 상제의 형제자매라고 주장하면서 잃을 것 없는 가난한 백성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죠

 

그렇게 풍운산이 조직의 기틀을 다지는 동안 홍수전은 더욱 효과적인 포교활동을 위해서 세 편의 포교문서를 만든 후 광저우로 떠나서 그곳에서 선교사 활동을 하고 있던 이사카 제이콕스 로버츠밑에서 2달 동안 성경 공부를 하며 기독교의 교리를 익혔다고 합니다

하지만 로버츠가 홍수전을 좋게 보기는 했지만 그가 꿨다고 주장하는 황당한 꿈이나 교리에 대해서는 전혀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정식 세례를 해주지는 않았다고 하죠

 

어느 정도 기독교 교리를 익힌 홍수전은 1847년 8월 금전촌에 머물던 풍운산을 찾아갔는데 이때 풍운산이 세운 배상제회는 약 3,000명의 신도를 포섭한 거대한 규모의 조직이 돼 있었다고 하는데요

홍수전은 풍운산이 만든 조직을 보고 매우 만족해했으며 풍운산은 스스로를 2인자로 칭하며 조직을 그대로 홍수전에게 바쳤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3,000명이나 되는 신도를 거느린 배상제회는 거칠 것이 없어졌는지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주변의 사당들을 죄다 부수고 다녔는데 이러한 행동들을 못마땅해했던 지방의 토착 세력들은 불법집회와 사당파괴 그리고 백성들을 현혹시킨다는 명목으로 관아에 신고를 했고 결국 교의 2인자인 풍운산이 관아에 잡혀가는 일이 발생했죠

교를 만든 1등 공신인 풍운산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홍수전은 그 지역의 현령은 물론 광둥성과 광서성을 모두 다스리는 양광총독까지 만나러 가게 되는데 문제는 그렇게 홍수전과 풍운산이 자리를 모두 비우자 조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인데요

 

이때 양수청과 소조귀라는 인물이 위기에 빠진 조직을 구하게 됩니다

양수청과 소조귀는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더니 양수청은 자신에게 하느님이 빙의했다는 주장을 했고 소조귀는 자신에게 예수가 빙의했다고 말했죠

이들이 있던 광서성은 무당이나 신내림에 대한 믿음이 특히 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 어처구니없는 기절쇼가 먹히면서 흔들리는 조직을 다잡을 수 있었다고 하네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홍수전은 자신의 권력이 흔들리는 것이 싫었지만조직을 안정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현지의 실력자인 두 사람을 야훼와 예수의 대리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둘의 권력은 급격히 강해졌다고 하죠

하지만 이렇게 양수청과 소조귀의 권력을 증가시키는 방법으로 당장의 위기는 어떻게 넘어가게 됐지만 홍수전은 이때의 선택으로 인해 훗날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1850년 무렵부터는 이전부터 배상제회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지역의 호족들 및 청나라 지방 정부와 충돌이 심해지기 시작했죠

지역의 호족들은 좋지 못한 주변의 치안 때문에 향촌의 주민들을 자체적으로 무장시킨 자경대를 만들었는데 이 자경대와 금전촌의 배상제회 무리 간의 충돌이 자주 일어나면서 지방 관아에서도 배상제회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배상제회는 청나라를 적대하는 입장에 서게 됩니다

 

가뜩이나 풍운산을 비롯한 홍수전의 추종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체포된 일로 인해 반감을 갖고 있던 홍수전은 결국 정치적인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하고 혁명에까지 뜻을 두게 되죠

마침내 1851년, 홍수전은 금전촌에서 태평천국의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천왕으로 칭한 뒤 양수청을 동왕 소조귀를 서왕으로 그리고 풍운산을 남왕 위창휘를 북왕 석달개를 익왕으로 임명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충돌하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청나라군에 비해 훨씬 우세한 전력을 갖고 있던 태평천국군은 싸울 때마다 청군에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태평천국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그렇게 장강 이남의 수많은 백성들과 반청 세력들이 홍수전에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이후 홍수전은 본격적으로 태평천국의 체계를 갖추려면 남경을 점령해야 한다는 위창휘의 간언을 듣고 남경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죠

 

마침내 홍수전은 1853년 남경을 점령하고 이름을 천경으로 고친 뒤 본격적으로 황제 행세를 하게 됩니다

이후 홍수전이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청나라 조정에 대항하는 행보를 보이면서 태평천국은 당시 중국의 백성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잦은 내부 권력투쟁 끝에 홍수전의 실질적인 세력은 크게 감소한 데다가 양수청은 여호와의 혼이 자신의 육신에 내렸다고 주장하면서 그리고 소조귀는 예수의 혼이 자신에게 빙의했다고 주장하며 본격적으로 홍수전을 능멸하기 시작했죠

 

그렇게 익왕 석달개를 제외한 4명의 왕은 서로 더 많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끝없는 싸움을 벌였고 이런 상황은 홍수전이 먼저 위창휘를 이용해 양수청을 제거하고 이후 익왕 석달개를 불러들여 4인의 왕들 중 마지막으로 권력을 휘두른 북왕 위창휘의 잔당을 제거한 1860년까지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하들에게 통수를 맞을뻔했던 홍수전은 자신의 형인 홍인발과 홍인달을 그나마 믿을 수 있다고 보고 왕으로 세우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홍인발과 홍인달은 무능한 주제에 욕심만 많아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주변사람들을 헐뜯었다는 것인데요

끝내 이들의 수작에 환멸을 느낀 석달개가 남경을 떠나 쓰촨 성 원정을 갔다가 그곳에서 죽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태평천국에서 군사적 재능을 보였던 석달개가 죽으면서 태평천국의 미래가 암울해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죠

 

태평천국이 이렇게 내분으로 전력이 약해지는 동안 한 때 그들에게 형편없이 밀렸던 청나라는 다시 전력을 재정비해서 1862년부터 본격적으로 태평천국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중국의 상하이를 비롯한 동남 해안 도시들에는 외국인 체류자들도 많았는데 이 중 미국인 장교 출신인 프레드릭 워드를 필두로 서양인 탈영병과 모험가들을 동원한 용병 부대까지 청나라군을 지원하자 궁지에 몰린 홍수전은 반격을 위해 상해 공략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증국번과 서양 각국의 군대가 잇따라 남경을 향해 진군해 오자 1864년 6월 1일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죠

 

이후 증국번이 홍수전의 무덤을 파해쳐 그의 시체를 부관참시한 다음 머리를 가져가면서 나머지 시체는 현장에서 소각해 버렸고 그렇게 태평천국의 난이 완전히 끝났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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