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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시혼궁녀. 청나라 황실에서만 있었던 황자나 공주가 결혼하기 전에 했던 독특한 제도

by 사탐과탐 2023.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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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황실에서만 있었던 황자나 공주가 결혼하기 전에 했던 독특한 제도 성교육을 위한 테스트 궁녀, 시혼궁녀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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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8월 29일자 뉴욕타임즈에는 '청나라황실 생활기록' 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글의 내용은 이러했는데 '청나라는 후계자로 확정된 태자가 정식으로 태자비를 맞이하기전에 태자보다 나이가 1살 많은 궁녀를 보내 태자의 동궁에서 시침하게 하고 태자에게 남자로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가르치게 한다' 라는 내용의 기사였죠

 

이는 청나라에만 있었던 독특한 제도를 설명한 글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 이야기 할 '시혼제도'인 것이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 왕족이나 황족들은 아들을 낳아 후계를 튼튼하게 하는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고 이후 후손이 번창하는것을 굉장히 중요시 하고 있었죠

그래서 조선시대 드라마를 보면 '국본을 세워야 나라가 산다'느니 '얼른 후궁을 들여 후사를 봐야 한다'느니하는 말이 많은 이유가 빨리 후계를 이을 아들을 낳아라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중국의 역대 황실 역시 아들 낳는것을 중요시 했는데요

이 때문에 황태자를 비롯한 황자들은 대부분 13세에서 17세의 어린나이에 일찍 결혼을 했었죠

심지어 청나라에서 황자는 15살에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고 규정이 있을정도였습니다

이때 황자는 아직 정식 결혼 전에 임시로 여인들을 들여 남녀간의 밤일에 대해 숙지하도록 했고 그렇게 여인들과 잠자리를 하면서 정식 결혼을 하고 나서도 어떻게 밤일을 해야하는지 숙지할수 있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것이 바로 시혼(試婚)제도 였는데요

이렇게 임시로 밤일을 가르쳐주다가 황자의 자식을 임신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청나라 이전의 왕조에도 남녀간의 일을 가르치는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완전 제도화 한것이 바로 청나라 였죠

※ 북위(北魏)의 문성제(文成帝) 탁발준(拓跋浚)은 17세에 결혼했는데 그는 14세 때 이미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청나라의 시혼제도는 크게 두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황자들이 결혼전에 했던 사전 성교육이었고 다른 하나는 공주나 꺼거가 시집을 가기전 했던 테스트였죠

※ 꺼거(格格:격격): 황제의 딸(공주)의 존칭 / 만주 귀족의 딸의 존칭 / 황족이나 귀족의 첩실의 존칭

 

이는 결혼 전에 하던 테스트이긴 했지만 지금처럼 결혼전에 미리 동거를 해보는것과는 조금 의미가 달랐습니다

시혼은 한마디로, 선발된 시혼궁녀가 신부될 사람을 대신해서 먼저 황자와 잠자리를 가지며 부부관계에 대한것을 알려주는 것이었죠

황자가 결혼을 하기전에 황제는 용모가 단정하고 나이가 약간 있는 궁녀 8명을 선택해 황자의 잠자리 시중을 드는 '시침(侍寢)궁녀'로 삼았는데 이들의 주요 업무는 황자를 곁에서 보필하고 황자의 성교육을 담당 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 10대 황제 동치제가 황후로 알루터씨를 맞이할때 황후가 궁에 들어오기 며칠전부터 교육이 시작되었는데요

내무부에서는 4명의 경험많은 여관들을 선발해 임시로 등불 담당인 사등(司燈), 휘장 담당인 사장(司帳), 이불 담당인 사금(司衾), 그리고 베개 담당인 사침(司枕)을 동치제의 처소로 보냈죠

그렇게 동치제와 같은 침실에 들어간 그녀들은 침실의 문이 닫히고나서 각자 맡은 일을 하는데 사침은 베개를 준비하고, 사금은 이불을 펴고, 사장은 휘장을 쳤으며 마지막으로 사등은 등불을 껐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방안이 어두워지자 그녀들은 동치제에게 남녀가 함께 밤을 보낼때 남자가 해야하는 일을 자세히 알려주었던 것이죠

그런데 굳이 이런 남사스러운걸 가르쳐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거에는 성교육을 거의 하지 못했고 성을 불결한(?)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녀가 결혼을 하더라도 첫날밤 부부관계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했죠

그러다보니 조선에서는 결혼전 춘화를 보여주면서 성교육을 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시혼 궁녀의 주요 역할도 성교육에 맞춰져 있었기 때문에 황자에게 잠자리 준비와 그 과정을 직접 체험할수 있게 해주었고 황자들이 이렇게 배운걸 토대로 순조롭게 많은 후손을 갖는데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하는것이 시혼제도의 주요 목적이었던 것이죠

또한 쉬쉬 했기 때문에 알길이 없었던 남녀간의 밤일을 사전에 교육함으로써 이후 황후나 태자비가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남자가 자연스럽게 리드하고 이후 부부생활을 이어나가 많은 후손들을 남길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말로 알려주거나 그림으로 알려주는것이 아닌 실전으로 알려줬다는것이 좀 충격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황제나 황자들은 시혼궁녀를 통해 실전 경험치를 쌓을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문제도 있었는데요

황자들이 시혼궁녀를 통해 성 경험을 하게 되는 나이대가 바로 사춘기때나 한참 성장기 일때인데 지나치게 일찍 성경험에 눈을 뜨다 보니 이것이 주는 쾌락에 심취해 버릴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고 때로는 그들의 성장과 발육에도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던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국정은 나몰라라 하고 오직 성관계가 주는 쾌락과 욕망에만 몰두하게 될수도 있는 위험도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건 다음 황위를 이을 후사를 낳는것이었으니 어쩔수없다는 미명하에 계속 이어질수 밖에 없었던것입니다

그럼 일반 궁녀들 입장에서는 한번 쓰고 버리는 느낌인 시혼궁녀가 되고 싶어했을까요?

 

정답은 바로 '궁녀들은 굉장히 원했다' 입니다

시혼궁녀가 되면 매달 녹봉도 받을수 있었고 일반 궁녀들이 하는 잡일이나 노역은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이죠

또한 태감 등 환관들에게 수모를 당하거나 욕먹는 일도 없어졌기 때문에 시혼 궁녀는 궁녀들이 꿈에 그리는 것이었으며 시혼 궁녀에 선발되어 배고프고 힘들었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또한 시혼 궁녀로 갔다가 태자의 마음에 들어서 황제와 황후가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그 시혼 궁녀는 태자비가 될수도 있었죠

만약 태자비가 되지 않는다해도 황제나 황태자를 아주 가까이에서 모셨기 때문에 비빈들 중에서 가장 낮은 위치인 상재가 되었는데 이는 일반 궁녀는 거들떠도 볼수 없는 위치에 오르게 된것이었고 그렇게 평생 일반 궁녀보다는 더 편한 삶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공주나 꺼거가 결혼을 할때도 시혼궁녀가 필요했는데요

단순히 생각해보면 '공주가 시혼궁녀와 잠자리를 했나?' 라고 생각할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공주의 남편이 되는 부마와 잠자리를 가졌던 것인데요

이렇게까지 했던 이유가 바로 명나라때 있었던 사건 때문이죠

 

명나라 만력제의 친여동생 영녕공주의 결혼을 위해 부마를 고르게 되었는데 이 일을 사례감의 대태감 풍보가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풍보는 뇌물을 받고 한 부잣집의 아들이었던 양방서라는 사람을 부마로 골랐는데 문제는 양방서가 폐결핵을 앓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 사실을 비밀로 한 채 결혼을 강행 했고 결국 결혼식 당일 양방서가 예복에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후 양방서는 결혼하고 한달 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리고 영녕공주 역시 과부로 수년간 지내다가 결국 쓸쓸히 죽고 말았습니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명나라의 이 사건에서 교훈을 얻었고 그렇게 공주가 결혼을 할때도 시혼제도를 실시 하도록 했던 것이죠

공주나 꺼거의 남편이 되는 부마에게 궁녀가 보내지다보니 그 궁녀를 시혼꺼거(試婚格格)라고 부르기도 했는데요

 

공주의 남편이 될 부마가 결정되면 태후나 황후가 직접 똑똑하고 숙련된 궁녀들 중에서 시혼꺼거를 골라 결혼 당사자인 공주보다 먼저 부마의 집으로 보냈죠

그리고 그날밤 시혼꺼거는 부마와 같이 잠자리를 가진 뒤 다음날 궁으로 돌아와 황후에게 전날 부마와 잠자리를 하면서 알게 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보고했던 것입니다

 

부마의 건강상태나 문제점은 없었는지, 신체적 정신적 결함이 있지는 않은지 성격이 온화한지, 잠자리를 가질때 문제는 없는지 등등 하룻밤 사이에 알아낸 모든 정보를 상세하게 보고했던 것이죠

그렇게 황후의 사전 테스트에도 합격하게 되면 공주가 정식으로 시집을 가게 되었고 이 시혼꺼거를 했던 궁녀도 이후 부마와 함께 살면서 첩이 되거나 그 집의 시녀가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관점에서 보면 이 시혼제도는 있을수 없는 반 인권적 행위라고 볼수 있을것 같은데요

하지만 과거에 살았던 궁녀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신분상승의 기회였고 당연한 일이었다는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네요

지금까지 황자에게 있었던 성교육 담당 선생님 시혼궁녀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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