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퇴를 거듭하던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황제 가경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까지 청나라 최 전성기 시절을 강건성세라고 했죠
하지만 건륭제의 아들 가경제부터 도광제까지의 치세를 가도중쇠(嘉道中衰)의 시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쇠(衰)자가 바로 쇠락하다,쇠퇴하다 라는 뜻을 가진 글자인데요
가경제때부터 전세계에서 최강국에 속했던 청나라가 점점 쇠퇴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 쇠(衰)자가 붙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가경제가 문제적인 암군이었나 생각해보면 사실 아버지 건륭제때부터 무너져내리기 시작한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황제이긴 하죠
오늘은 점점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을때 청나라의 황제가 된 가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건륭제의 15번째 아들이자 늦둥이로 태어났는데요
가경제가 태어났을때 건륭제의 나이는 50세나 되었었기 때문에 황자들 중 유난히 예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황태자가 되지는 않았었죠
원래 건륭제는 적장자였던 2황자 영련을 황태자에 책봉했지만 일찍 요절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7황자였던 영종을 황태자로 책봉했지만 영종 마저도 고작 3살의 어린나이에 세상을 떠나버리면서 건륭제는 오랜기간 다시 황태자를 세우고 있지 않았는데요
이후 5황자이던 영기를 황태자로 세울까 눈여겨 보고 있었지만 그 역시 일찍 죽어버렸고
그러다 건륭제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황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15남 영염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영염은 효심이 깊어 아버지인 건륭제와 황태후인 효성헌황후에게 늘 문안을 드리는 등 효심 가득한 행동을 하면서 더욱 건륭제의 점수를 딸수 있었고 그렇게 건륭제는 비로소 1773년 태자밀건법에 따라 비밀리에 영염을 황태자로 책봉했던 것이죠
태자밀건법이란 황제가 후계자가 될 자식의 이름을 2장 적어 한장은 건청궁의 현판 뒤에 보관하고 한장은 내무부에서 보관했는데 훗날 황제가 죽거나 후계자를 정해야 했을때 두장을 꺼내보고 이름이 일치하면 그 사람을 후계자로 정했던 제도였습니다
거기에 건륭제는 15황자 영염의 이름을 적어둔것이었죠
그리고 1789년에는 영염을 화석친왕에 봉했으며 이후 어전회의에 참석해 대신들과 정사를 논할수 있게 허락했습니다
마침내 1795년이 되자 건륭제는 강희제의 재위기간 61년을 감히 넘지 않기 위해 그해 12월 퇴위를 하고 아들 영염에게 제위를 물려주니 그가 바로 37세의 나이로 청나라 7대 황제에 오른 가경제 였죠
가경제에게는 황자시절부터 굉장히 싫어하던 신하가 한명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니오후루 허션이었습니다
가경제는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던 탐욕스러운 허션의 모습을 굉장히 혐오스러워 했으며 언젠가는 저놈을 제거해 버려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아버지 건륭제가 태상황제로 오른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든 황제의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 황제였지만 가경제가 할수있는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경제는 허션의 인사권이나 여러 권력들을 빼앗으려 했지만 건륭제는 허션의 말만듣고 가경제가 하려던 대부분의 견제 정책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았던 것이죠
그리고 허션은 올라오던 상소문이나 보고서 등을 황제인 가경제가 아닌 건륭제에게 모두 올렸으며 그렇게 아버지에 의해 반쯤 허수아비 황제가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재수없는 니오후루 허션에게도 아무런 조치를 취할수도 없었으며 그 덕분에 가경제가 즉위한 이후에도 허션은 새황제의 눈치도 보지 않았고 심지어 이미 거의 모든 국사는 허션이 처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횡포가 더욱 심해졌으며 그럴수록 백성들의 삶은 갈수록 도탄에 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1799년 음력 1월 4일, 건륭제가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드디어 가경제는 청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될수 있었죠
가경제는 당시 조정의 영수였던 허션에게 건륭제의 국상을 책임지고 행하라 명했는데 그렇게 허션이 방심한 틈을 타 그를 파직하고 곧바로 20개의 죄목을 붙여 체포 하였으며 건륭제가 죽은지 보름만에 허션은 스스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허션이 그동안 모아놓았던 무지막지한 재산을 모조리 몰수 했는데 가경제는 이를 전부 자신의 내탕금으로 환수를 했고 이때 많은사람들이 "허션이 죽으니 가경제의 배가 부르다" 라며 이를 비꼬았다고 하죠
이후 친정을 시작한 가경제는 자주 조회에 나가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등 굉장히 의욕있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건륭제 말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썩을대로 썩어 문드러진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가경제를 가로막고 있었죠
이미 청나라 관리들 사이에서 부패는 만연하게 퍼져 있었고 건륭제 역시 사치와 향락에 스며들어 있었으며 그만큼 지방 관리들에 대한 통제가 소홀해지자 부정부패는 나날히 심해졌죠
썩은 관리들 중 최고 자리에 있던 허션을 제거했음에도 그 밑에 연결되어 있었던 부정부패의 사슬을 끊지 못하였기에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했습니다
결국 관리들의 횡포를 참지못한 농민들은 수탈을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죠
거기다가 옹정제나 건륭제 초기때까지만 해도 잘 시행되고 있던 주접을 통한 비밀정치를 건륭제 말기쯤 부터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요
그러자 가경제는 부패를 근절하고 부실해진 황권을 다시 강화시키기 위해 다시 주접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모든 보고가 이루어지도록 했죠
그덕에 조정 대신들의 부정부패는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오랜기간 조정의 눈을 피하면서 부정부패를 일삼던 지방 관리들에게까지 가경제의 노력은 뻗어나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렇게 탐관오리들이 날이면 날마다 찾아와 온갖 명목으로 돈을 뜯어가자 먹고살기 힘들어진 백성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죽으나 같다고 생각해 179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것이 바로 '백련교도의 난' 이죠
당시까지 살아있던 건륭제는 처남이었던 복강안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난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부정부패의 악영향은 이미 군대에 까지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반란군에 의해 패퇴를 하기도 하는 등 총체적 난국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랜기간 싸워온 결과 1804년 8월이 되어서야 겨우겨우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할수 있었죠
또한 백련교도의 난이 일어났을때 그동안 차별과 무시를 당해오던 묘족 역시 반란을 일으켰는데요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 반란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는데 당시 운남성의 기후도 맞지 않고 지세 역시 험준하다보니 진압하는데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끊임없이 군대를 파견했던 결과 1806년에 결국에는 묘족의 난도 진압할수 있었죠
9년에 걸친 백련교도의 난과 10년에 걸친 묘족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무려 2억냥이라는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게 되었고 이것은 그러지 않아도 이미 점점 악화 되어가던 재정상황에 기름을 붓는 격으로 재정에 막대한 부담을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청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각지에서는 크고 작은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죠
심지어 자금성이 털릴뻔한 사건도 있었는데요
백련교의 일파였던 천리교의 두령 임청과 이문성이 은밀히 궁궐에 까지 손을 뻗쳐 환관들을 포섭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813년 7월, 가경제가 사냥을 하러 자금성을 비웠을때 자금성을 탈취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죠
그렇게 거사 당일이 되자 포섭되어 있던 환관들이 자금성의 동화문과 서화문을 몰래 열어주었고 별일없이 자금성 내로 들어올수 있었던 약 200여명의 천리교도들은 내전이던 양심전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황궁을 지키던 2황자 면녕이 이 사실을 알게되었고 곧바로 금군과 금의위를 집결시킨 뒤 침입한 천리교도들을 모두 진압해 버렸죠
이 소식을 들은 가경제는 깜짝 놀라 곧바로 환궁했으며 자금성을 지켜낸 면녕을 지친왕으로 책봉했습니다
또한 천리교의 두령 임청과 그 부하들은 모두 능지형과 참수형에 처해졌죠
문제는 여러 난을 평정하고나서 백성들을 달랠수 있는 강력한 후속조치가 필요했는데 가경제는 그런 조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불만은 여전히 가득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청나라 재정이 이렇게까지 악화 되는데는 반란이나 건륭제의 사치, 관리들의 부정부패 뿐만아니라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것이 있었죠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인구가 급증한것이었는데요
강건성세 기간동안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유럽과의 무역으로 인해 들어온 고구마와 옥수수 등으로 인해 기근이 어느정도 안정되다 보니 약 100여년의 기간동안 청나라의 인구가 2배이상 늘어났던 것이죠
하지만 청나라에서는 이를 뒷받침 할만한 재정상태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국고가 비어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가경제는 세금을 올려 국고를 채우려 노력했지만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고 오히려 세금이 인상되자 백성들의 불만만 더욱 커졌죠
그리고 또 다른 엄청난 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편이었습니다
청나라와 영국과 교역이 시작된 이후 영국은 심각한 무역적자에 시달리게 되었죠
자신들이 가져온 면직물이나 공업품은 청나라에서 전혀 인기가 없었던 반면 청나라의 비단이나 도자기, 차 같은 것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유럽의 막대한 양의 은이 청나라로 유입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영국은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을 몰래몰래 청나라에 들여와 팔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만연 적자에 시달리던 영국의 무역이 아편 덕분에 흑자로 전환되었고 청나라는 심각한 수준으로 재정이 악화되기 시작한것이죠
이에 가경제는 아편금지령을 내렸지만 이미 지방관리들은 영국 상인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으면서 아편이 흘러들어오는것을 묵인해주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청나라에는 아편중독자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청나라에 있던 은이 썰물 빠져나가듯 유럽으로 빠져나갔고 백성들에게까지 뻗어나간 아편의 중독성은 결국 아편을 얻기위해 가족을 팔아넘기기까지 하는 등 무시무시한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가경제는 여러번 전국 순행을 돌면서 백성들을 위로해주었지만 변하는건 별로 없었죠
그러다 1819년 자신의 6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자금성에서 큰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듬해인 1820년부터 몸이 부쩍 쇠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가경제의 상태는 좋아지지 못하고 1820년 9월,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그리고 가경제의 유지에 따라 다음 황위는 과거 자금성을 지켜냈던 2황자 지친왕 면녕이 잇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 입니다
가경제를 암군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애매한것이 아버지인 건륭제때부터 청나라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가경제 스스로가 다른 암군들처럼 나라를 개판내지는 않았기 때문인데요
그는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정사를 열심히 돌봤으며 황권을 다시 강화하고 관리들의 부패 근절에도 열정적으로 임했죠
또한 각지에서 일어나던 난들도 적극적으로 막으려 했으며 아편이 청나라에 확산되는것도 막으려고 애썼던 나름대로 훌륭한 군주였습니다
근면 성실했던 가경제는 스스로 노력을 많이 하긴 했지만 그 능력이 쇠퇴해가던 청나라를 안정시키기엔 약간 부족함이 없잖아 있었던 것 같네요
지금까지 아버지가 말년에 망쳐놓기 시작했던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세우기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능력이 딸려서 그러지 못했던 가경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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