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도로 멸망해 가던 청나라를 되살리기엔 능력이 부족했던 황제 도광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전세계 최강국이었던 청나라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면서 가경제 이후의 황제들은 본격적으로 서구열강들에게 엄청나게 두들겨 맞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청나라 역사 뿐만아니라 인류 역사상 가장 더럽고 추악한 전쟁이 벌어지고 마는데요
그 전쟁은 바로 '아편전쟁' 입니다
이 충격적인 전쟁이 벌어졌을 당시 청나라의 황제는 가경제의 아들인 도광제 였죠
오늘은 청나라의 멸망의 길이 더욱 가팔라지기 시작했을때 청나라의 황제 도광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1782년 9월에 태어난 가경제의 두번째 아들로 이름은 면녕 이었죠
면녕이 아직 아기 였을때 형이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둘째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장자 대접을 받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무예 솜씨도 탁월했는데 면녕이 10대때부터 팔기식 궁술을 선보이며 사슴을 잡아내는 모습을 보이자 할아버지였던 건륭제가 특히나 더욱 예뻐했죠
또한 당시엔 아편이 청나라로 흘러들어오고 있던 상황이었고 아편의 중독성이나 해악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다시피 했기 때문에 아편의 환각효과는 청나라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습니다
당시엔 워낙 아편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돈 많은 황족이나 귀족들이 아편을 피웠는데 이때 면녕 역시 아편을 피웠다고 하죠
면녕이 아편을 멋지게 피우자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과 궁녀들, 그리고 아버지 가경제까지도 그를 멋쟁이로 보았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렇게 황자로써 무난한 삶을 이어 오던 중 1813년 7월, 면녕이 31세의 나이가 되었을때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줄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계유지변' 이라고하는 사건이었습니다
백련교도의 난이 진압되고난 이후 백련교의 분파였던 천리교의 두령 임청과 이문성이 복수를 꿈꾸며 자금성을 장악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이죠
임청과 이문성은 먼저 많은 뇌물을 써서 자금성 내의 환관들을 포섭해놓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날, 가경제가 사냥도 하고 더위를 피해 열하로 떠났을때 약 200여명의 천리교도들이 미리 포섭해놓은 환관들이 열어준 문을 통해 자금성으로 침입했던 것이죠
이때 당시 자금성은 면녕이 지키고 있었는데요
이들이 침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면녕은 당황하지 않고 신속히 금군과 금의위를 집결시켰고 우왕좌왕하던 시위와 환관들을 잘 지휘해 별 무리 없이 진압에 성공할수 있었던 것이죠
이때 면녕은 손수 권총을 들고 적들을 제압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자금성이 공격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가경제는 깜짝놀라 급하게 돌아와서 상황을 보니 면녕이 이미 사태를 모두 수습한 뒤였는데요
이에 가경제는 면녕을 칭찬하며 지친왕으로 책봉하면서 사실상 면녕을 자신의 다음 후계자로 점찍게 되죠
이후 시간이 흘러 1820년, 가경제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 이어 면녕이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도광제 입니다
하지만 도광제가 즉위하기 전부터 청나라는 이미 쇠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시기였죠
청나라는 오랜기간에 걸친 평화의 시기를 지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만연해졌고 청나라 사회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느슨해졌으며 점점 퇴폐적인 분위기가 자리 잡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랫동안 계속된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1820년에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그 외의 여러지역에서도 끊임없는 반란이 계속되자 재정 악화는 더욱더 심해졌고 국력 또한 약해져만 갔죠
거기다가 아편의 수입량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해서 18세기 까지만해도 청나라는 전세계 은의 블랙홀이라고 할 정도로 정말 막대한 양의 은이 국고에 쌓여있었지만 서구 열강들이 청나라의 은을 빼앗아오기위해 비싼 아편들을 마구 팔았고 이에 청나라의 무지막지한 양의 은이 유럽으로 쭉쭉 빠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아편이 비교적 값비싼 물품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청나라 귀족들과 황족들이 주로 피웠지만 나중에는 값싼 아편까지 보급되면서 돈없는 백성들까지 마구 피워댔으니 이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던 것이죠
백성들은 농사도 짓지않고 일도 하지 않은채 아편만 피워댔고 아편을 사느라 파산 지경에 이르렀으며 심지어 일가족을 팔아넘기기 까지 하는 등 이미 청나라는 개막장 국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건륭제 말기때만 하더라도 아편의 수입량이 1천 상자에 불과했는데 가경제 시기에는 약 4천 상자로 늘어났고 이후 도광제 시기가 되자 3만 상자로 굉장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죠
거기다가 당시 청나라와 무역 중인 여러 유럽 국가들이 청나라에서 온갖 사고를 치고 있었는데 서로간에 싸움을 일으켜 한 나라가 마카오를 점령해버리거나 다른나라의 상선을 탈취하기도 하는 등 지네끼리 청나라 내에서 난리를 치고 있었으며 그러자 청나라와의 마찰도 잦았고 갈등도 점점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청나라가 잠깐 멍때린 사이 어느새 이 아편문제와 서구 열강들에 대한 문제는 도광제가 해결해야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죠
그리고 1837년 주성열이란 신하가 아편으로 인해 유출되는 은이 일년에 약 7천만냥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자 더이상 이 사태를 방관할수 없었던 도광제는 전국 각지의 관리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할 방책을 내놓을것을 명령했고 이후 도광제는 아편과의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먼저 도광제는 황자 시절부터 즐기던 아편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청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아편을 금지 시켰으며 만약 끊지 못하고 피우다 걸린 황족들은 작위를 박탈한 채 신강으로 유배를 보내는등 아편 문제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1838년 12월,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했고 광동지역으로 내려보내 아편 밀수를 막으라는 임무를 맡겼습니다
1839년 3월에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강력한 아편단속을 실시하는데 아편 금지령을 어긴 1600여명을 잡아들였고 약 3만근의 아편을 몰수해버렸죠
그리고 영국 상인들에게도 가지고 있는 아편을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영국상인들은 자발적으로 약 1000여 상자를 내놓았지만 여전히 2만여 상자를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미 그들이 가지고 있던 아편의 양을 알고 있었던 임칙서는 병사들을 동원해 반 강제적으로 영국상인들의 아편 21300여 상자를 빼앗았고 빼앗은 아편들을 모조리 바다속에 폐기처분 해버렸습니다
그러자 영국상인들은 굉장히 분노하며 영국정부에 하소연했고 이 소식을 들은 영국 정부에서는 자국의 상인들 보호를 명목으로 청나라와 전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죠
하지만 그 중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이라는 의원은 "청나라에는 아편을 금지시킬 정당한 권리가 있다
이렇게 더럽고 치욕스러운 전쟁은 들어본적도 없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수 있더라도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의 손실과 비교할수는 없다" 라며 반대했지만 결국 찬반 투표에서 271대 262로 전쟁 찬성이 이겼고 그렇게 1840년 6월, 아편전쟁은 발발하고 말았습니다
누가봐도 영국이 마약을 청나라에 팔아 막대한 돈을 벌 생각으로 일으킨 추악한 전쟁이었지만 영국은 아편을 팔기위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우리 상인들을 지키기 위한것이라는 되지도 않는 말을 해대며 전쟁을 일으켰던 것이죠
그렇게 영국해군은 광저우로 군함을 몰고 갔지만 이미 임칙서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들 돌려 다른곳을 공격한뒤 텐진 앞바다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러자 도광제는 임칙서가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영국의 반발만을 야기했다고 오판해 임칙서를 크게 질책했으며 결국 도광제는 임칙서를 파면한 뒤 베이징으로 소환해버렸죠
또한 도광제는 영국군을 보고 이미 여러 도시들을 공격하고 온것은 생각도 하지못한채 단순히 하소연 하기 위해 단체로 몰려온것이라는 착각을 했고 기선을 새로운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영국군을 다독여주자 영국군이 톈진에서 군함을 돌렸던 것입니다
이후 영국군은 홍콩의 할양과 자신들이 판매했던 아편의 배상금을 요구했고 기선은 배상금은 그렇다치더라도 영토 할량은 있을수 없다며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결국 다시 전쟁이 시작 되었죠
그렇게 영국군은 중국 남동부 해안가를 침공한 뒤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고 그제서야 도광제는 군대를 모아 영국군과 맞섰지만 이미 망해가던 청나라군은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영국군을 상대로 이길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강남의 최대도시 난징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지자 청나라에서는 전쟁을 지속할 의지를 상실해 버렸는데요
거기다가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계속해서 청나라 영토를 빼앗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 청나라 조정이 느끼는 가장 큰 대외 위협은 서유럽 열강들 보다 러시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결국 1842년 영국과 청나라는 난징조약을 체결하게 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습니다
청나라는 난징 조약으로 홍콩을 영국에게 99년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며 광저우 이외에 여러 항구들을 일부 개항하게 되었죠
그리고 아편의 수입량은 폭증하게 되면서 난징 조약 이후 청나라의 아편중독자는 몇배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영국이 청나라를 개박살 냈다는 소문을 들은 다른 서구열강들도 청나라에 개떼처럼 모여들기 시작해 청나라의 각종 이권을 뜯어가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청나라의 혼란은 거듭되었죠
아편 전쟁 이후에도 아편에 대한 도광제의 강경책은 유지 되었는데 차마 서구 열강들을 때려잡지는 못했고 아편을 피우는 청나라 국민들을 제압하는 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큰 실효성이 있지는 않았죠
당시 청나라의 관료들은 굉장히 무능했으며 서구 열강의 산업혁명이나 신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고 팔기군까지 부패하다보니 국방력의 저하가 청나라의 가장 큰 실패 요인이 된것입니다
건륭제 말기부터 시작된 관리들의 부정부패가 결국 최강대국이었던 청나라를 이 지경까지 만들어 버린것이었죠
이후 도광제는 1850년 2월 원명원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가 죽고난 이후 넷째아들 혁저가 함풍제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과 10개월 후인 1850년 12월, 중국 역사상 최대규모의 민란인 '태평천국 운동'이 일어나고 말았고 이후 청나라는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에 놓이면서 망국의 길을 걷기 시작했죠
도광제 스스로 매우 청렴하기도 했고 모범을 보여 아편을 끊고 이를 금지 시키려고 한 의지도 강했지만 청나라의 체제 자체가 너무 낡았던 탓에 도광제 혼자만의 의지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데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결국 도광제 시기 이후 청나라는 서구 열강들의 샌드백 신세가 되죠
훗날 한 역사학자는 도광제를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는 좋은 인물이지만 국가를 다스리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라고 평했다고 합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청나라 모든것을 다 새로 뜯어 고쳐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것을 해내기엔 수많은 복잡하고 어려운 일들이 많았기에 도광제가 아니라 다른 인물이 당시 황제가 되었다 하더라도 청나라의 멸망을 막기엔 어려웠을것 같네요
지금까지 청나라의 본격적인 쇠락기를 맞이한 황제로 평가받는 도광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중국역사 탐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양기. 환관들이 후한의 정치를 떡 주무르듯 주무르기 시작한 계기를 만들었던 인물 (feat. 십상시) (0) | 2023.06.27 |
---|---|
어여의 난. 명나라에 공녀로 간 한 여인으로 인해 2800여명이 죽임당한 사건 (0) | 2023.06.26 |
순치제. 그렇다할 업적은 없지만 강희제를 낳았다는것 자체만으로 대단한 업적을 쌓은것 같은 황제 (0) | 2023.06.25 |
이홍장. 청나라를 말아먹은 매국노로 비판받다가 청나라 최후의 충신으로 재평가받고 있는 인물 (0) | 2023.06.23 |
가경제. 쇠퇴를 거듭하던 청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한 황제 (0) | 2023.06.20 |
니오후루 허션. 젊었을땐 명신, 늙었을땐 간신 (0) | 2023.06.16 |
건륭제.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점점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끌었던 황제 (2) | 2023.06.14 |
독설가 옹정제. 백성들에겐 명군, 신하들에겐 악마 (0) | 2023.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