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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순치제. 그렇다할 업적은 없지만 강희제를 낳았다는것 자체만으로 대단한 업적을 쌓은것 같은 황제

by 사탐과탐 2023.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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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황제가 되고 일찍 죽은 바람에 그렇다할 업적이 없지만 강희제를 낳았다는것 자체만으로 대단한 업적을 쌓은것 같은 황제 순치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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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인물 홍타이지의 아들이자 천고일제의 황제 강희제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는 바로 청나라의 3대 황제 순치제 인데요

1638년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난 순치제는 이름이 아이신기오로 풀린이었죠

그런데 1643년에 아버지였던 홍타이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순치제는 5살의 어린나이로 황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던 여러 인물들이 있었지만 어린 풀린이 황제가 된 이유가 있었는데요

홍타이지가 죽기전에 어떠한 유조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죽고나서 다음 황제를 정하기 위해 의정왕대신회의가 열렸죠

당시 가장 큰 힘을 가지고 있던 두 세력은 바로 홍타이지의 이복동생인 예친왕 도르곤과 홍타이지의 장남인 숙친왕 호오거였습니다

 

이때 도르곤을 따르던 사람들은 만주족의 전통적인 승계방식인 형제승계를 따라 도르곤이 황제가 되어야 한다 주장했지만 호오거는 형제승계가 아닌 부자승계로 황제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했죠

그렇게 두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던 어느날 다이샨의 아들인 쇼토와 손자인 아달리가 도르곤을 제위에 앉히려고 어떤일을 벌이다가 발각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의 배후로 도르곤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도르곤은 이 사건이 자신과 무관하다 주장하며 쇼토와 아달리를 참형에 처했고 자신은 황위에 전혀 욕심이 없다는 뜻을 보였죠

그와 동시에 도르곤은 호오거가 주장하는대로 홍타이지의 아들을 다음 황위에 앉히는대신 아홉번째 아들인 풀린을 제위에 올리고 자신과 지르갈랑이 좌우 섭정왕이 되어 풀린이 친정을 할수 있을때까지 도와주는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회의 의장이던 예친왕 다이샨과 지르갈랑, 그리고 호오거가 도르곤의 절충안에 동의하면서 그렇게 풀린이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로 즉위할수 있었던 것이죠

너무 어린나이에 황제가 되었다보니 숙부이자 당시 청나라 황실 최고의 실세였던 도르곤이 섭정왕이 되어 청나라를 다스렸는데 그래서 순치제의 업적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부분이 사실 도르곤의 업적이라고 합니다

 

순치제가 황제가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울어 가던 명나라의 수도 북경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도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명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죠

그리고 어디로 투항을 할지 고민을 하던 오삼계가 청나라에 투항하면서 드디어 난공불락의 요새인 산해관의 문이 활짝 열렸고 도르곤은 산해관을 돌파해 이자성군을 내쫓고 북경을 점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반란군 덕분에 어부지리로 넓은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하다시피 했는데 도르곤은 청나라가 명나라를 계승하는 황제국임을 선포하고 전쟁으로 파괴된 북경을 복원한뒤 자금성으로 순치제를 데리고와 새로운 즉위식을 거행했죠

그렇게 도르곤은 아버지 누르하치와 이복형 홍타이지도 이루지 못했던 중원 통일을 완수할수 있었지만 중원을 통일한 청나라의 첫번째 황제는 순치제가 된것입니다

 

아까 말했던 대부분의 순치제의 업적이 사실상 도르곤의 업적이었던것이죠

이후로도 계속 도르곤이 황제의 권력을 휘두르며 청나라를 통치했고 심지어 옥새도 도르곤이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1650년, 도르곤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비로소 순치제는 황제로써 청나라를 통치 할수 있게 된것 이었죠

하지만 그때도 순치제의 나이는 12살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도르곤에게 엄청 시달렸는지 도르곤이 죽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도르곤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친왕들, 그리고 여러 세력들과 함께 도르곤의 세력을 숙청해버렸고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할수 있었죠

그리고 도르곤의 존호를 추탈해버리고 그의 묘까지 파내어 유골을 훼손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도르곤이 마음대로 자신의 친어머니였던 아바하이를 황후로 추존했던적이 있는데 이걸 다시 후궁으로 낮추기 까지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계속해서 황권을 강화해 나갔고 명나라에서 귀화한 인재들을 적극 회유하고 등용하는데 힘썼습니다

이후 순치제는 남명세력을 미얀마까지 내몰아 명나라 잔존세력을 대부분 평정했지만 이때쯤부터 변발과 만주족 복식을 강요하면서 생긴 한족들의 반발을 강력하게 진압했고 그러자 각지에서는 엄청난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순치제는 독일 출신 선교사였던 '아담 샬'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에게 여러 조언을 구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으며 심지어 워낙 친하다보니 순치제는 아담 샬을 할아버지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하죠

 

아담 샬 역시 순치제에게 백성들을 구휼해라, 스스로 질책하고 회개해라(?) 등등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보니 나중에는 "아담 샬이 새로운 섭정왕이냐?" 라는 조롱섞인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순치제는 1656년에서 1657년까지 두 해 동안 아담 샬의 집에 24번이나 찾아가기까지 했는데 베이징에 로마 고딕 양식의 교회를 세울수 있도록 허락해주기도 했죠

한편 순치제는 관습에 따라 몽골출신의 황후를 맞이 했지만 그는 몽골 출신의 황후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대신 후궁들을 좋아했는데 훗날 강희제가 되는 히오완예이를 낳았던 효강장황후 퉁기야씨도 원래는 후궁이었죠

그 중에서도 순치제가 가장 총애했던 후궁은 현비 동오씨 인데요

그녀는 황후 바로 밑의 위치였던 황귀비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이죠

심지어 순치제는 그녀를 얼마나 총애 했는지 현비가 낳은 아이를 후계자로 삼겠다며 공언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서는 자식이 한명 있었지만 태어나고 100일을 조금 넘긴 후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이 일로인해 충격을 받은 현비가 병을 얻은뒤 1660년, 21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버리자 순치제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정치에 손을 놓아버리게 되죠

심지어 그는 현비의 뒤를 따르겠다고 말한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죽고난 다음해인 1661년, 황위를 황태자였던 히오완예이에게 물려줬으며 24살의 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순치제의 치세기 동안의 대단한 업적은 주로 섭정왕이던 도르곤이 한것이고 그가 워낙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다보니 그렇다할 업적이 없었지만 다만 한가지 대단한 업적(?)은 바로 강희제를 낳은것이 아닌가 싶네요

 

지금까지 청나라 3대 황제 순치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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