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역사 탐구

건륭제.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점점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끌었던 황제

by 사탐과탐 2023. 6. 14.
반응형
명군의 자질을 보였지만 점점 청나라를 쇠락의 길로 이끌었던 황제 건륭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청나라의 전성기로 일컬어지는 강건성세는 4대 황제 강희제 부터 옹정제를 거쳐 6대 황제 건륭제까지의 치세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강희제는 내치와 외치 모든 면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었고 옹정제는 내치에 집중해 백성들에게 좋은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었죠

 

오늘은 그 뒤를 이은 강건성세의 세번째 황제 건륭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 건륭제의 치세기 동안 청나라의 경제, 군사, 문화는 절정을 맞이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는데요

이때 청나라의 국력은 전세계 최강국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고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치세 말기에는 좋지 않은일들이 겹치면서 청나라 멸망의 씨앗을 뿌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죠

그래서인지 현재 학자들의 평가는 명군인지 암군인지, 성군인지 폭군인지 애매한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건륭제는 옹정제의 다섯번째 아들로 1711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아이신기오로 훙리(홍력) 였죠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는 아들만 20명이 넘었고 손자를 합치면 100여명에 육박했기 때문에 얼굴도 기억 못하는 손자들이 대부분이었는데요

하지만 건륭제는 어릴적부터 굉장히 총명한 모습을 보였는데 어려서부터 사서삼경에 통달했으며 사냥을 나갔을때 곰을 마주치자 겁먹지 않고 화살을 쏴 곰을 잡기도 하는 등 강희제의 눈에 쏙들게 행동했던 것이죠

 

이를 기특하게 여긴 강희제는 어릴적 자신을 닮았다며 홍력을 궁내에서 생활할수 있도록 해주었고 제왕학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여러 무관들에게 무예를 전수해줄것을 명하기도 했는데 심지어 늙은 강희제 자신이 직접 학문과 무예를 가르치기도 했을정도로 그를 예뻐했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황자들이 후계자 다툼으로 티격태격대는 모습을 보고 강희제는 너무 속상해 하고 있었는데 홍력이 부모님인 옹정제와 적모인 효경헌황후, 친어머니 효성헌황후에게 꼬박꼬박 예를 다하며 문안을 올리는 모습을 보고 더욱 그를 마음에 들어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보니 강희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다음 황제로 옹정제를 점찍으며 옹정제에게 홍력을 후임으로 삼으라는 유언을 내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할어버지에게 총애를 받아서인지 건륭제 역시 할아버지 강희제를 평생동안 엄청나게 존경했다고 하죠

이후 홍력은 아버지 옹정제의 일들을 도우며 정치를 배워 나갔고 옹정제와 신하들은 홍력을 거의 황태자로 대우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옹정제의 셋째아들이던 홍시는 강희제의 8남이던 염친왕 윤사와 손을잡고 자신이 황태자 자리를 꿰차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는데 1725년, 홍시가 홍력을 암살하려다 실패하는 일이 발생하자 옹정제는 격분하여 그를 윤사의 아들로 입적시켜 버렸죠

그리고 2년후인 1727년 역모를 꾀했다는 죄를 들어 윤사와 홍시를 잡아들인후 그들을 황실 족보에서 제명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감옥에서 사망하고 말았죠

 

이후 다른 황자들은 패륵(제후와 비슷한 위치)자리에 머물러있을때 홍력은 보친왕에까지 오르게 되었고 군기처에서 지내며 정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735년 옹정제가 건강이 악화되어 앓아눕게 되자 홍력은 감국에 임명되어 (감국(監國) : 나라 전반을 감독하는 특별 직책) 옹정제의 업무 상당부분을 자신이 맡게 되었고 옹정제가 세상을떠나자 25살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하게 되었죠

 

그는 황제가 된 이후 할아버지였던 강희제 처럼 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먼저 옹정제가 연금하거나 귀양보낸 숙부들을 사면해주었지만 종친들이나 황족들이 정치 일면에 나서는것을 엄금했죠

그리고 그는 총 10회의 원정을 통해 사상 최대의 영토를 차지하게 됩니다

 

1747년 대금천을 시작으로 1757년에는 중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고 이후 1792년까지 버마, 대만, 베트남, 그리고 네팔에 원정군을 보내면서 할아버지 강희제의 위대함을 본받으려 노력했죠

건륭제는 강희제 때부터 이어져온 위협세력인 준가르를 완전히 굴복시키면서 외몽골까지 차지 했으며 그 기세를 몰아 위구르족을 공격해 청나라의 국경을 신강 일대까지 넓혔고

(이때 위구르족이 살던 영토에 새롭게 번성하라는 뜻의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을 지었음. 이곳이 지금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남부를 쳐들어온 네팔의 구르카 부족을 섬멸하고 형식적인 군신관계를 맺으면서 티베트 서부 국경을 안정시키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트남과 버마를 공격해 조공국으로 삼게 되었죠

하지만 좀 애매한 것이 버마를 침공했을때 모두 실패했고 베트남 정벌을 떠났을때도 복잡한 밀림과 전염병 등의 문제로 인해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버마와 베트남과 형식적이나마 조공관계를 맺었으며 덕분에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데는 성공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또한 이후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형성 시킬수 있었던 덕에 이후 군사적 충돌 보다는 외교적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기 때문에 청나라 남쪽을 안정시킨 공이 크다고 볼수 있죠

그 덕분에 청나라가 망할때까지 버마와 베트남 국경에서는 별다른 충돌없이 잘 지낼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만에서 천지회라는 단체가 반란을 일으켰을때 진압하기도 했는데 이 천지회의 일부는 훗날 중국의 유명한 깡패인 삼합회로 발전했다고 하죠

 

이렇게 총 10회의 원정으로 건륭제는 강희제 시절의 청나라 영토에서 40%정도 늘려놓았고 중국 대륙 역사상 원나라이후 가장큰 영토를 가진 청나라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건륭제는 이 10번의 원정을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칭하며 책을 썼는데 청나라군의 강력한 군사력과 자신의 지휘력을 스스로 칭찬한 책이었다고 하죠

 

그리고 건륭제는 내정에도 힘을 쏟았는데요

그는 보갑제와 이갑제라는 제도를 뜯어 고쳤는데 보갑제란 100가구를 모아서 '갑'이라 하고, 10개의 갑을 모아 '보'로 나누었는데 이 갑과 보에 속해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질서와 치안을 책임지게 하는 제도였으며 이갑제는 보와 갑에서 인구에 따라 세금을 거두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지방 관리들이 조정에는 인구와 세수를 줄여서 보고하고 백성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때려 막대한 사익을 취하자 건륭제는 인구조사를 다시 시행해 각 집 문앞에 사는 사람의 수와 나이, 성별까지 적어 놓고 매년 인구조사를 하게 했죠

 

그 덕분에 청나라 조정에서는 각지역의 인구수를 정확하게 알수있었고 지방관리들이 세금을 착복하는것도 차단할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빼돌린 관리들은 중징계에 처했으며 심지어 참수형에 처하기도 했죠

그렇게 국고는 넘쳐나고 인구도 크게 늘어났습니다

반응형

그런데 문제가 있었는데 건륭제는 즉위 당시부터 청나라의 국고는 풍족했기 때문에 불필요한 사치와 낭비가 잦았던 것이죠

그는 청나라 각지의 궁전이나 행궁, 후원 그리고 도로, 운하, 성벽 등을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데 막대한 자금을 썼던 것입니다

도로나 운하, 성벽 등은 백성들의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그렇다치더라도 궁전과 행궁, 후원 등을 증축하거나 새로 만드는데 엄청난 비용을 낭비하다보니 청나라의 재정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갔던것이죠

 

거기다가 건륭제는 할아버지 강희제 처럼 남쪽 지역의 순행을 자주 떠났는데요

자신의 정통성과 세를 과시하기 위해 건륭제가 한번 순행을 갈때마다 강희제가 사용한 비용의 10배에 달하는 거액을 사용했던 것이죠

또한 그는 시와 그림, 서예 등 예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고대 상나라때부터 제작된 중국의 각종 예술품을 시대별, 장르별로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목록을 작성했으며 등급까지 매기면서 막대한 돈을 들여 광적으로 수집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술가들을 불러 호화스러운 연회를 엄청나게 벌여 막대한 국고를 탕진하기도 했죠

그만큼 그는 시를 짓는것도 좋아했는데 건륭제가 지은 시는 문학적인 측면으로 봤을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하죠

반면에 그림과 서예실력은 뛰어나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고 합니다

 

건륭제가 수집한 작품들은 모두 자금성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장제스가 대만으로 도망갈때 모두 들고가 현재 대만의 국립 고궁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죠

이때 만약 안옮겼으면 문화대혁명때 홍위병들에 의해 개박살 났을수도 있겠네요

또한 당시 만주족들이 한문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만주어가 쇠퇴하자 건륭제는 만주족이 한족화되는것을 걱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만주족 출신 관리가 심양(만주족의 발원지라고 할수 있는곳)에서 살다가

북경으로 와서 일하게 되었는데 건륭제가 만주어와 한어가 뒤섞인 변형된 만주어를 하자

거의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자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릴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륭제는 어느날 상주문에 너무 많은 한어가 쓰인다며 불평을 하더니 한어를 대체할 1,700개가 넘는 새로운 만주어 단어를 만들기도 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중국의 고전들을 만주어로 번역하는 사업도 진행하면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잃지않기 위해 노력했던 황제였습니다

또한 그는 청나라 전역에 있던 모든 고서적들을 한데 모아 이 책들을 모두 필사해 전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규모의 백과사전인 <사고전서>를 만들었죠

그리고 건륭제는 남쪽에 오문(마카오)의 항구를 개방한 이후 해외 무역이 엄청난 이윤을 남길수 있다는걸 깨달았는데요

 

이때 유럽 선교사들이 가져온 작물인 고구마가 어느 땅에서든 굉장히 잘 자랐던 덕에 어느 정도 기근을 면하게 해주기도 했다고 하죠

또한 청나라의 도자기와 비단, 차 등이 유럽에서 대 히트를 치자 중국은 막대한 무역 흑자를 볼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만큼 백성들 삶의 질도 크게 향상되었고 18세기 이후부터 백성들도 점점 부유해 지면서 인구도 급속도로 늘었으며 문화 생활이나 여가 생활을 즐기기도 했죠

 

거기다가 당시 청나라에서는 은을 이용해 무역을 하다보니 막대한 양의 은이 청나라로 들어오게 되었고 1760년 이후 약 20여년간 청나라의 은 저장량이 5배나 증가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의 문화나 기독교가 청나라에 퍼지는걸 원하지 않았기에 광주나 남쪽의 일부 해안지역만 개방하고 있었는데요

심지어 유럽의 선원들은 청나라에 상륙도 금지되었고 오직 무역 상품과 보급품의 선적만이 가능했죠

 

그러던 어느날 영국의 외교관인 조지 매카트니가 통상 확대를 요청하기 위해 사신으로써 건륭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청나라 신하들은 매카트니에게 삼배구고두례를 할것을 요구했지만 매카트니는 거부했고 건륭제가 관대하게 매카트니의 주장을 받아줘서 결국 한쪽 무릎만 꿇는것으로 넘어갔다고 하죠

 

이때 매카트니가 가져온 영국의 요구는 제한적으로 하던 무역을 폐지하고 자유무역을 허가해줄것과 그리고 교역량을 증대시키고, 청나라의 영토 중 작은 섬 하나를 영국에 할양해 영국인들이 사용할수 있게 해주며 대사관을 설치해 대사가 상주하는것을 허용해달라는 요구였습니다

사실 영국의 이 요구는 청나라 입장에서 상당히 무리한 요구였죠

 

그래서 건륭제는 거절한 이유를 자세히 적어 답서를 보냈고 영국의 조지 3세에게 줄 답례품을 챙겨 준뒤 매카트니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요구들은 약 50년 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하고나서 난징조약을 통해 모두 받아들여지게 되죠

어쨌든 청나라의 평화가 지속되기 시작하자 점점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는데요

 

건륭제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건륭제의 감시망에서 벗어난 지방관리들이 백성들을 상대로 착복과 세금을 빼돌리기 시작했으며 심지어 홍수가 났을때 건륭제가 보낸 구호자금까지 중간에서 관리들이 모두 횡령하는 경우도 있었죠

거기다가 감숙성은 매우 가난한 지역이라 매년 조정에서 구호자금을 보내줬는데 감숙성을 다스리고있던 왕단망이 그 구호자금을 모두 착복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을 정도로 지방의 말단 관리부터 조정의 최고위 관리까지 모두 뇌물을 받아 막대한 사익을 취했으며 온갖 비리와 부패가 판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건륭제는 재위 말년부터 국정의 대부분을 총애하던 신하 니오후루 허션에게 맡겼는데요

이 허션은 어릴적부터 건륭제의 총애를 듬뿍받아 급속도로 승진을 거듭한 인물이었죠

심지어 건륭제와 동성애를 하는게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을 정도로 총애를 받았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건륭제가 70세가 넘어가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쇠약해지자 허션은 건륭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했죠

그는 실질적인 황제 노릇을 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신하들을 숙청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조정에서 절대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매관매직은 기본이었고 불과 31살의 나이에 호부상서가 되면서 관리들이 만약 죄를 지었을때 자신에게 돈을 바치면 모든 죄를 사면해 주는 방식으로 막대한 돈을 끌어모았고 심지어 황제에게 바쳐지는 1등급 진상품들도 자신이 빼돌려 2등급을 건륭제에게 바쳤으며 백성들의 세금을 대폭 올리고 관리들에게 엄청난 뇌물을 받기도 했죠

 

그런것도 모르고 건륭제는 스스로 황위를 물러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할아버지였던 강희제가 61년간 재위를 했는데 자신이 감히 그 기록을 깰수 없다는 이유로 재위 60년이 되었던 1795년에 황위를 넘기고 태상황제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죠

그렇게 그는 1795년 12월 30일(음력)에 황위에서 내려왔고 자신의 15번째 아들인 영염에게 재위를 넘겨주니 그가 바로 가경제 였습니다

 

비록 그는 태상황제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모든 권력을 손아귀에 쥔채 국정을 처리했죠

관리들의 부정부패 때문에 견딜수 없었던 백성들은 반청 세력을 조직하기도 하고 각지에서는 난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결국 1796년 백련교도의 난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건륭제는 80이 넘는 나이에도 여전히 국정을 처리하고 조회에도 참가하는 등 왕성히 활동했지만 태상황제가 되고나서부터는 긴장이 풀려서 그런지 몰라도 점점 기력이 쇠약해져갔고 그렇게 1799년 1월 4일 (음력) 60년간 재위하고 4년간 태상황제로써 군림하던 건륭제는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역대 중국의 황제들은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수명이 짧아서 40~50세도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반면 건륭제는 89세의 나이로 죽었는데 이는 중국 역대 황제들 중에서 가장 장수한 축에 속하죠

건륭제는 황제가 되고나서 40여년간 강희제와 옹정제의 정책을 따라 개혁을 단행하면서 넓은 영토와 경제력, 문화 등을 부흥 시키기도 했지만 이후 약 20여년 동안에는 니오후루 허션을 지나치게 편애하면서 그의 악행을 방치하여 허션을 비롯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내버려두는 뼈아픈 실책을 범하고 말았던 것인데요

 

이로 인해 점점 청나라의 힘은 약해져만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청나라 멸망의 시작은 건륭제 치세 말기때부터이다' 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강희제와 옹정제의 시기를 이어 받아 강건성세라 불리는 태평성대를 이룩했지만 그렇다고 명군이나 성군이라고 부르기엔 애매하고 사치와 낭비가 심했으며 나중에는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막지못했던 이유로 청나라가 망해갔지만 그렇다고 암군이나 폭군이라 부르기엔 또 애매한 부분이 있는 인물 건륭제에 대한 이야기 였습니다

 

사탐과탐 다른 포스팅은 어떠세요?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