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의 영향으로 왕의 딸인 공주들도 피해갈수 없었던 살벌한 시집살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금지옥엽'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금지옥엽'은 '금으로 만든 가지와 옥으로 만든 잎'이라는 뜻인데, 비슷한 말로는 금이야 옥이야 라는 말도 있죠
바로 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비유적으로 부르는 말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말을 왕의 딸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했죠
당연하겠지만 그만큼 공주들은 귀하고 소중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금지옥엽이라고 말할 정도로 귀하디 귀했을 공주들이 시집을 가게 되면 어떻게 살았을까요?
과연 금이야 옥이야 대접받으며 행복한 삶을 누렸을까요?
오늘은 조선시대 공주들의 시집살이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총 116명의 공주와 옹주가 있었는데요
그중에서 왕비의 딸인 공주가 38명, 후궁의 딸인 옹주가 78명이었죠
어찌 됐던 공주와 옹주는 모두 왕에게 있어 사랑스러운 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주와 옹주들은 어린 시절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죠
갓 태어난 후 한 달 정도만 왕비가 젖을 주고 그 뒤로는 유모가 전담으로 젖을 먹였는데요
그리고 보모상궁이 아기공주를 재우고 씻기면서 돌봐주었죠
심지어 놀아주는 사람까지 따로 있었는데 그야말로 금지옥엽 대접을 받은 겁니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삶도 잠시, 공주들에게도 큰 변화의 시기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그것은 바로 혼인이었죠
보통 10살 전후로 혼인을 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공주들의 삶은 크게 바뀌게 됩니다
16살이 되면 궁을 나와 남편과 함께 살게 되는데, 이를 '출합'이라고 불렀죠
과거 조선시대라서 그렇지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생, 중학생 나이 때에 결혼을 하고 살던 집을 떠나야 했던 건데요
그것도 생전 처음 본 남자와 말이죠
그래도 공주 신분이니까 극진한 대우를 받으며 잘 살았을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그 당시의 현실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놀랍게도 공주들도 일반 백성들 못지않은 시집살이를 겪었다고 하죠
효종의 다섯째 딸, 숙정공주는 11살에 영의정 정태화의 아들 정재륜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인 정태화가 문제였는데요
그는 완벽한 사대부 스타일의 선비 중에 선비로 엄격한 유교 신봉자였었죠
그렇다 보니 정태화는 숙정공주에게 엄청난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하는데요
얼마나 심했냐면 숙정공주를 모시던 궁녀 한 명이 효종에게 직접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전하, 이대로 가다간 우리 공주마마님이 돌아가실 것 같사옵니다. 제발 좀 살려주시옵소서 "
일개 궁녀가 왕에게 직접 찾아가 이런 말을 했다는 건, 얼마나 상황이 심각했으면 그랬을까요?
그런데 효종의 대답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출가외인이라 어쩔 수 없구나..."
아무리 왕의 딸이라도 시집을 가면 그 집안의 사람이 되는 거라 어쩔 수 없었던 거였죠
천하의 왕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조선시대의 시집살이였던 겁니다
왕도 자신의 귀한 딸이 고생하는 꼴을 두 손 두 발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놈의 시집살이는 대체 왜 생겨나게 된 것일까요?
다들 예상되시겠지만 바로 그놈의 유교 때문이었죠
구체적인 이유를 알려면 조선시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놀랍게도 조선 초기에는 시집살이 문화가 없었다고 하는데요
오히려 남자가 처가살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죠
극단적인 예가 될 수도 있지만 신사임당의 남편인 이원수는 결혼 후에도 처가인 강릉에서 20년 넘게 살았습니다
아무튼 유교 사상이 점점 뿌리 깊어지기 시작했던 세종대왕 때부터 변화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왕실에서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한다며 자신의 딸 숙신옹주를 시집살이시켰다고 하죠
하지만 진짜 큰 변화는 9대 임금 성종 때 일어났습니다
13살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성종은 어릴 때부터 군주 교육과 함께 유교 교육을 받아 유교 가치관이 매우 강한 왕으로 성장했죠
그래서 조선에 유교를 널리 퍼뜨리려고 노력했는데요
성종은 세종 때 발간된 '삼강행실도'를 한글로 번역해서 전국에 배포했습니다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의 모범적인 행동을 담은 일종의 '유교 교과서'같은 책이었죠
거기다가 '삼강행실열녀도'까지 한글로 편찬했으며 책 내용대로 잘 따르는 백성들에게는 세금까지 면제해 줬습니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유교를 따르게 되면서 조선은 급속도로 유교화되기 시작했고, 여성의 지위는 점점 낮아지게 된 겁니다
이후부터 조선하면 노답으로 먼저 떠오르는 남존여비사상에 찌든 사회로 변하게 된 거죠
그러면서 여성들의 혹독한 시집살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결혼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고 하는데요
첫째, 아들을 낳아 대를 잇는 것
둘째,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고 시어머니를 편하게 해 드려 효도하는 것
그러다 보니 며느리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집안일 또한 모두 며느리의 몫이었죠
지금도 집안일이 힘든데 그때는 어땠을까요?
물 한 바가지 떠오려면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우물에 가서 길어와야 하고,
지금처럼 도정된 쌀을 보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밥을 지으려면 쌀부터 찧어야 했을 텐데요
뼈대 있는 양반집에서 땟국물 흐르는 옷을 입었다간 난리가 났을 테니
시도 때도 없이 잿물로 빨래했을 겁니다
그나마 양반집 며느리가 저 정도이고 평민 집안의 며느리는 훨씬 더 혹독했다고 하는데요
집안일은 기본에다가 밭일까지 더해져서 말 그대로 죽도록 노동만 해야 했죠
그러다 보니 너무 힘들어서 과로로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더 암울했던 건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눈치를 봐야 했습니다
목소리가 크면 안 되고, 경박하게 웃으면 안 되고, 심지어 걷는 것까지 조신했어야 했죠
특히 며느리들은 진짜 말조심했어야 했는데요
조선시대에는 '칠거지악'이라고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7가지 근거가 있었죠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 질투를 하는 자처럼 지금 시대에서는 상상도 못 할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말이 많으면 내쫓는다'는 내용도 있기 때문에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혹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던 며느리들은 친정이 그리울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안타깝게도 그녀들은 친정에 가는 것도 쉽지 않았죠
1년에 단 하루, 그것도 추석에만 친정에 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마저도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는 거리에 사는 며느리들만 가능했죠
게다가 시어머니가 다녀오라고 허락해 줘야지만 가능했는데, 그마저도 허락 안 해주면 평생 동안 친정에는 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정말이지 조선시대는 어떤 나라였던 것일까요?
지금까지 아무리 조선의 공주로 태어났더라도 피할 수 없었던 혹독한 시집살이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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