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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고작 10대 초반밖에 되지 않았던 세자들이 어떻게 첫날밤을 보냈을까?

by 사탐과탐 2024.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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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어렸던 세자들이 첫날밤을 보낼수 있었고
어린나이에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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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혹시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서

'와.. 나도 왕처럼 한번 살고 싶다'라고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정점에 서있는 권력뿐만 아니라

수많은 부인들을 곁에 둘 수 있으니까 말이죠

남자들은 한 번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실제로 정치적인 이유나 왕의 개인 욕구로

여러 부인을 두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럼 이 왕의 부인들은 어떻게 뽑았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은 왕이 되기 전이었던

어린 세자 시절 때에 이미 거의 혼인을 했었는데

과연 어떻게 신혼 첫날밤을 보냈던 걸까요?

정말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오늘은 이런 궁금증을 풀어드리기 위해

'왕의 여자 오디션'이라고 할 수 있는 간택령과

세자들의 첫날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간택'이라는 단어 많이들 들어보셨을 텐데요

지금 들으면 뭔가 하늘이 정해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별거 없습니다

그냥 왕실에서 특정한 기준을 정해두고

전국의 여자들을 대상으로 선별하는 게 다였죠

 

그게 바로 '간택'이고, 왕실에서 이를 공표하는 것을

'간택령'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이 간택령은 한반도 내에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으로 이어져왔던 게 아니었는데요

바로 태종 이방원이 홧김에 만들어버린 제도였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느 날 태종이 자신의 딸 정신옹주를 시집보내기 위해 고민하다가

이속이라는 사람에게 혼인 제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속이란 양반이 정말 골 때리는 말을 하는데요

 

"어떻게 제 아들을 몸종의 딸에게 장가를 보내겠습니까?

제 아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혜옹주라면 살아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얘기였을까요?

 

사실은 정신옹주의 어머니인 신빈신씨가 원경왕후의 여종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속이 그렇게 무례한 말을 한 거죠

그 말을 들은 태종이 얼마나 극대노 했을지 상상이 가시나요?

태종은 옛날의 킬방원으로 흑화해버렸고

이속에게 곤장 백 대를 때린 것도 모자라 서인으로 강등시켜 버렸죠

 

태종의 성격상 당장 찢어버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보다는 처벌이 약했다고 생각되실 수 있으실 텐데요

그런데 이게 다 영리한 태종의 계략이었습니다

일부러 자신은 관대한 왕이라는 뉘앙스로 약한 처벌을 한 이후에

신하들의 상소를 유도하는 고도의 스킬이었던 거죠

 

태종이 이속에게 약한 처벌을 내린 게

어떤 걸 의미하는지 눈치챈 신하들은 앞다퉈서

이속이 막말한 것은 대역죄와 같으니 더 크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끊임없는 상소를 올렸습니다

결국 태종은 신하들의 상소에 못 이기는 척하며

이속의 전재산을 몰수하고 유배를 보내버렸죠

 

그래도 태종의 화는 가라앉지 않았는데요

그러자 또 쉴 새 없이 상소가 올라왔고

그제야 이속을 노비로 만들어버린 후

그의 아들들이 평생 장가를 못 가도록

금혼령을 내려 대가 끊기게 만들어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속의 막말 사건 이후 태종은 한 가지 아이디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조선 초기이고 나라의 기틀을 잡는 상황에서

자신이 만드는 게 곧 법이 되기 때문에

자신의 후손이자 왕의 후손들을 위해 간택령 제도를 만들게 되었죠

 

자, 그럼 이 간택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요?

먼저 왕실에서 간택을 시작한다고 하면 전국에 혼인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백성 여러분, 오늘부터 양반이든 평민이든

간택 끝날 때까지 혼인하면 안 됩니다"라는 어명을 공표한 거죠

이걸 '금혼령'이라고 불렀는데요

그다음엔 '봉단령'이 내려졌습니다

봉단령은 전국의 명문 가문에서 자기 집안 내의

처녀들 사주와 집안 내력을 적어서 조정에 올리는 거였죠

그러면 전국팔도에서 사기를 쳐서라도 왕과 사돈 맺기 위해 난리였을 거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명문 중의 명문에서만 뽑다 보니

많아 봤자 30명 정도밖에 안 됐다고 하죠

그리고 아무래도 명문가 집안에서는

한 단계 더 신분 상승이 되는 일이다 보니

윗선에서 몰래 내정하고 심사를 진행하는 경우도 많았죠

마치 정략결혼과 비슷하게 말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재미있는 건, 뽑힐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지원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바로 경제적인 부담 때문이었죠

의복, 가마부터 시작해서 유모 등

수행원의 복장까지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명문가 중에서도 재산도 엄청 많아야

그제야 신고서를 올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차피 내정된 집안 딸이 간택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자신의 딸이 들러리로 가는 게 싫었던 집안도 많았다고 하죠

그래서 어떤 집안에서는 혹여나 간택당해서

오히려 집안이 망할 까봐 딸의 나이를 속이거나

이미 다른 집안으로 시집가버렸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신청에 응한 정예 후보들에게는 본격적인 간택 면접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택은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의 순으로 총 3번의 면접을 거쳐야 했죠

1차인 초간택에서는 외모를 봤다고 합니다

외모를 최우선으로 보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요

 

그도 그럴 것이 명색이 왕인데

적어도 조선팔도에서 제일 예쁜 처자들을 데려와야 했을 겁니다

실제로 역사를 보면 '가슴이 너무 커서 탈락',

'미간이 좁아서 탈락' 등의 이유로 탈락한 경우도 있었다고 하죠

 

물론 외모만 본 건 아니고 기품, 인품, 예절 등도 모두 중요했다고 하며

이 초간택을 통과한 5~7명만 통과했다고 합니다

2차 재간택에서는 식사 예절을 봤다고 하는데요

왕실 어르신들과 직접 식사를 하면서 식사 예절을 심사했다고 하는데

보통내기가 아니면 어버버 하면서 실수하고는 탈락했을 거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3명의 후보들이 보게 되는

마지막 면접인 삼간택이 가장 어려웠다고 하죠

그도 그럴 것이 왕족들과의 단독 압박면접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합격한다면 미래의 시누이, 시어머니가 될 사람들과 하는

살 떨리는 압박면접이었던 거죠

얼마나 긴장되었을까요?

그렇게 해서 최종 1등을 한 사람이 세자빈으로 간택되게 되는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세자빈으로 뽑힌다고 해서 바로 혼례를 하는 건 아니었는데요

간택이 끝난 후에 본가로 돌아가지 못하고

약 50일간 왕실의 특별 교육을 받아야 했죠

그렇게 세자빈 교육을 모두 마친 후에 혼례날을 잡았다고 합니다

 

혼례식 날짜는 아들을 임신할 수 있는

최적의 날짜를 엄선해서 정했다고 하죠

드디어 세자와 세자빈의 성대한 혼례식이 끝이 나고

신혼 첫날밤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는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세자의 나이는

고작해야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즘이었을 테고

세자빈 또한 세자보다 조금 나이가 많을 뿐이지 어린 건 매 한 가지였습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그 어린 세자와 세자빈이

첫날밤에 뭐를 어떻게 하는지 알았을까요?

 

바로 왕실에서 세자와 세자빈에게

첫날밤을 위한 조기교육을 시켜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환관과 궁녀들이 각각 전담 마크를 해주었는데

그림이나 글로 알려주면서 가르쳐주었고

심지어 자세를 흉내 내기까지 했다고 하죠

 

하지만 어린 친구들이 그렇게 배운다고 바로 실전에서 가능했을까 싶은데요

그래서 궁녀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제조상궁의 감독하에 여러 명의 숙직상궁들이 첫날밤 내내 코치를 해준 것이죠

그것도 숨소리도 전부 들리는 방 건너편에서 말입니다

 

소리만으로는 상황을 제대로 모르니

문틈 사이로 조심히 지켜보면서 이래라저래라 코치를 해줬죠

세자 저하 그렇게 하시면 아니되옵니다,

그 자세는 임신이 되지 않사옵니다, 자세를 바꾸셔야 하옵니다

 

방 건너편에서 일일이 지시를 하는데

맨 정신으로 첫날밤을 보낼 수 있었을지 궁금하네요

지금으로선 가능이나 한 일이었을까 싶지만

당시 조선시대 왕실에서 그런 체계를 잡은 이유는 다 있었겠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실제로 조선 역사상 가장 빨리 아버지가 된 왕이었던

예종이 대표적인 예가 될 거 같은데요

1460년 당시 세자였던 예종은

11살에 5살 연상이었던 세자빈 한 씨와 혼례를 올리게 되었죠

 

훗날 정순왕후가 되는 한 씨는 16살에 임신한 후

다음 해에 장남 인성대군을 낳았습니다

그렇게 예종은 고작 12살에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순왕후는

산후병으로 사흘 만에 요절하고 말았고

인성대군 또한 3살에 사망하게 되었죠

 

예종도 즉위한 지 1년 만에 갑작스럽게

19살의 나이로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수명이 짧았던 조선시대에서는 왕실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게 매우 중요했던 만큼

간택부터 시작해서 신혼 첫날밤 자세 코치까지 해줬던 게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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