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드디오 조국으로 돌아오던 중 생긴 너무나도 비극적인 사건
우키시마호 침몰사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일본은 강제징용 되어 일본에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이 조선인 노동자들을 처리해야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비슷한 시기에 우키시마호라는 화물선에 명령이 내려 지는데
조선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을 데려오라는 명령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명령이 바뀌는데요
일본의 북부지방에서 강제노역을 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우키시마호에 태우고 부산으로 보내라는 명령으로 바뀐것이었습니다
이에 일부 일본 해군은 이 명령에 항의하기도 했지만
어쩔수 없이 1945년 8월 22일, 조선인 노동자들 약 8천여명을 태운뒤
홋카이도의 오미나토 항구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죠
그렇게 항해를 이어나가던 8월 24일
우키시마호는 갑자기 방향을 틀어 부산이 아닌
교토의 마이즈루항으로 향했고
다시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간다며 기쁨과 환희에 찬
수천명의 조선인들은 결국 조국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마이즈루 앞바다에서
여러번의 엄청난 폭음과 함께 우키시마호는 폭발해
침몰해 버렸기 때문이죠
오늘은 광복 직후 벌어진 정말 석연치 않았던 사건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우키시마호의 가장 의문스러운 것은 바로 항로 인데요
우키시마호는 일본 북부의 홋카이도 근처에 있던
오미나토 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는데
상식적으로 가장 빠르게 부산에 가는 방법은 바로
동해를 가로질러 부산을 향해 직선으로 가는것입니다.
그러나 의아스러운 점은 우키시마호가
계속해서 일본 땅의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직진하면 부산이었는데 갑자기 좌회전 해서
마이즈루 항으로 향했던 것이죠
이에 일본은 배의 연료가 떨어지기도 했고
그날 오후 6시까지 부산에 들어가는것은 무리이기도 하며
당시는 전시 상황이라 일본 근해에 기뢰도 많고
소련 해군의 잠수함도 근처를 다닐수도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근처 항구에 입항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기뢰는 미국이 일본 근해에 많이 깔아놓았었기 때문에
오히려 동해를 가로질러 부산으로 가는것이 가장 빠르기도 하면서
안전하기도 한 루트였죠
상황이 이런데 갑자기 더 위험할수도 있는 마이즈루로
방향을 틀라고 한것이 정말 이상한 점인것입니다
거기다가 일본은 우키시마호가 침몰한 이유는
미군이 부설한 기뢰에 접촉하면서 폭발이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요
이에 대한 근거로는
배 밑바닥과 선체 하부쪽에만 폭발한 흔적이 있다는 점
폭발로인해 선체 일부가 뜯겨져 날아가거나
선체에 큰 폭발로 인해 만들어진 구멍이 없다는 점,
그리고 폭발 이후 바다 밑바닥 흙이 흩어지면서 바다속이 탁해진 점,
또한 사망자들의 사체에서 화상을 입었거나
신체가 산산히 흩어진 흔적이 없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고 있었죠
또한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조선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이었으며
이 중 조선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 라고 공식 발표했으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승조원과 탑승자 대부분을 배의 갑판으로
모이라고 했던 덕에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발표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키시마호 사건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굉장히 수상한 정황들이 많았기에
당시 우키시마호에 탑승했던 조선인 생존자들은
'이 배가 폭발한 것은 일본의 계획된 범죄'라고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죠.
그러면서 일본인 승조원들이 만약 배가 부산에 도착하게 되면
분노한 조선인들에 의해 보복을 당할것이 두려워
처음 우키시마호에 조선인들을 탑승시켜 부산에 보내주라는 명령에
강하게 항의를 하기도 했으며
당시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을 일본에 두자니 폭동을 일으킬것이 무섭고
살려두자니 일제가 저지른 추악한 만행들이 만천하에 드러날것이 두려웠기에
폭발사고로 위장해 조선인들을 바다에 수장시킨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죠
또한 폭발이 있기전 승조원과 탑승자들을
갑판으로 모이라고 했다던 일본의 주장과는 달리
생존자이던 채길영씨의 주장에 따르면
승조원들이 조선인 탑승자들을 갑자기 배 안으로 내려가도록 지시했고
이후 승조원들은 우키시마호에 있던 작은 보트를 타고 배를 빠져나갔으며
그뒤에 얼마안있어 배가 폭발했다고 증언했던 것이죠
또한 다른 생존자 강이순씨도 당시 배에 있던 승조원들의 수가 계속 줄었고
배가 폭발하기 직전에는 승조원들이 다같이 기관실에 몰려가더니
얼마후 모두 사라졌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였던 정기영씨는
폭발이 있기전에 일본 승조원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젖을 먹고있는 아기를 보면서 "저 불쌍한 아기가 꽃봉오리도 피우지 못하고
가게 생겼으니 큰일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죠
또한 많은 생존자들의 일치된 증언은
폭발전에 승조원들이 온갖 문서들과 물건들을 바다에 버리고
보트를 타고 배를 떠났다고 증언했으며
모두가 하나같이 폭발음이 세네번 들렸다고 했는데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한번 이겠지만
세네번 폭발음이 들린것은 정말 이상한 점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수십 미터나 되는 물기둥이 솟구쳐 올라야 하는데
그 물기둥을 본 사람 역시 단 한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1954년에 일본에서 우키시마호 선체를 인양했을때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고 하죠
만약 배 밖에서 충격을 받아 선체가 구부러졌다면
배의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되겠지만
우키시마호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으로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폭발이 배의 내부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할수 있는 것이죠
이후 일본 정부는 뭘 숨기기라도 하는것인지
사건 처리 역시 빠르게 진행 시키기 시작하는데요
연합군 사령부에 이 사건을 보고할때는
공식 발표에서 말했던 사망자 524명을
256명이라고 줄여서 보고한 뒤
기뢰 맞고 침몰한 것이라며 넘어가버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1954년 우키시마호의 선체를 인양하면서도
재일 조선인들의 사건 진상조사 요구를 묵살해 버렸으며
그렇게 인양된 선체는 아무런 조사도 없이
고철로 팔아 넘겨버리면서 사건을 덮어버렸죠
심지어 우키시마호의 사망자 유골이라면서 300여구의 유골을 반환했지만
여러 사람의 유골이 뒤죽박죽으로 뒤섞인것으로
조사결과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992년,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의 희생자들과
유족들이 일본 법원에 국가의 배상청구 소송을 제소 했는데
9년이나 지난 2001년 8월이 되어서야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엔(한화 약 3000만원)의 위로금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이 위로금 지급 판결마저 2003년에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되어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죠
또한 현재까지도 이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와
일본 정부의 제대로 된 사과,
그리고 배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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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제. 자신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 아들은 역사상 최악의 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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