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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이현로. 타락한 양반의 표본으로 수양대군 반대파였던 안평대군의 책사이자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사였던 인물

by 사탐과탐 2024.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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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대군의 반대파였던 안평대군을 모셨던 책사이면서 조선 최고의 풍수지리사로 능력 있었지만
부정부패 타락한 양반이기도 했던 이현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관상' 은 몰락한 양반집안의 관상가 김내경이

김종서의 수하로 들어가 활약하는 내용의 영화 인데요

 

오늘 이야기 할 '이현로' 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관상의 주인공 김내경과 굉장히 흡사한 느낌을 받을수 있습니다

 

이 이현로라는 인물은 조선 전기에 활동했던 문신으로

수양대군에게 책사 한명회가 있었다면

안평대군에게는 이현로가 있었다 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안평대군의 책사 역할을 했었던 인물이죠

 

그런데 왜 관상가 김내경과 비슷한 느낌을 받을수 있냐면

이현로는 관상가는 아니지만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풍수지리 전문가 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1438년에 과거급제 후 집현전 교리가 되었고

세종때에는 촉망받는 문신이었죠

 

그때부터 풍수를 보는 능력이 탁월했는지

세종은 막내아들인 영응대군의 집터를 정할때

이 이현로를 불러서 터를 보도록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왕궁이 명당을 유지하기 위해서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청계천에 오물을 버리는 것을 금지시켜

물을 맑게 하는것이 좋다고 건의했다고 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의 반대로 그렇게 되지는 못했는데요

 

그런데 훗날 영조대에 오랜기간 청계천에 쌓여온 오물과 퇴적물로

수로가 막히고 악취도 심해져 준천사까지 설치하는등

국가적 사업으로까지 번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의 말대로 깨끗하게 유지를 했다면 훗날 이런일도 없었겠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그의 관직 생활은 부정부패가 넘쳐났습니다

 

그가 병조정랑으로 있을때 내시였던 최읍의 청탁을 받아

매관매직을 한 이유로 탄핵을 받기도 했고

이양무라는 인물에게 뇌물을 받고 대부에서 대장으로 승진 시키다 걸렸으며

하번갑사인 귀화인을 보고하지도 않고 사직에 임명했다가

결국 순창으로 유배되기까지 했던 것이죠

 

당시 그는 '장죄 (贓罪)' 라는 죄를 지은걸로 처벌을 받았는데

‘장(贓)’이란 경제 관계 범죄 행위나 그 행위를 통해 얻은 부당한 재물을 가리키며

이런 경제 범죄를 저지른 관리를 '장리(贓吏)'라고 불렀습니다

 

조선초에 장죄는 국가의 존립과도 관계된 주요 범죄로 여겨져

장리에 대한 처벌을 엄중히 했는데

본인의 처벌과 관직 진출을 막을 뿐만 아니라

자손들의 관직 진출까지도 제한했으며

최대 참형에 처해질 정도로 중죄였죠

 

이런걸 보면 이현로는 능력은 뛰어났을지도 모르지만

양심이나 도덕성에는 문제가 있었던 걸로 보입니다

 

어쨌든 이현로에게서 워낙 이런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니

그를 극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상소가 빗발쳤지만

세종은 그의 아버지 이광후가 원종공신이었으니

극형까지는 면해주었고 유배로 끝을 맺었죠

 

그렇게 그의 인생이 막을 내리는가 싶었지만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그에게 기회가 찾아오게 됩니다

 

어느날 문종에게 평안도 도체찰사로 떠나게 된 김종서가 찾아와

이현로는 재주가 많으니 고신을 돌려주고

관직에 다시 복귀시키는게 좋을것 같다고 말하자

문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고

그렇게 이현로는 다시 관직에 나올수 있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편 그는 지리와 복서를 공부했고

시문과 그림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

심지어 무예솜씨도 뛰어났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관직에 복귀한 이현로는 왕실에서 보관중인

풍수와 관련된 지리서를 공부하고

왕실의 풍수와 지리에 대한 자문을 하는것이 그의 임무였다고 합니다

(복서 : 팔괘ㆍ육효ㆍ오행 따위를 살펴 과거를 알아맞히거나 앞날의 운수ㆍ길흉 따위를 미리 판단하는 일)

 

또한 그는 여러 능력을 십분 발휘해 평소 예술을 좋아하던 안평대군과

시화로 교분을 나누며 친분을 쌓았다고 하죠

 

그러던 어느날, 문종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의 장지를 둘러보는 일에 이현로 역시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때 그는 의미심장한 주장을 합니다

 

인왕산은 한양의 북쪽에 있고 낙산은 동쪽에 있으니

풍수에서 낙산은 좌청룡, 인왕산이나 백악산은 우백호에 해당하는데

그런 인왕산이나 백악산 뒤에 궁궐을 지어 기세를 누르지 않으면

정룡이 쇠하고 방룡이 흥한다고 한것이죠

 

이때 정룡은 왕의 적장자를 의미하는것이고

방룡은 왕의 방계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태종과 세종은 모두 방룡으로서 임금이 되었고

문종은 정룡이라서 일찍 세상을 떠난것이라고 말한것이죠

이현로의 이 말은 왕실에서는 굉장히 예민한 문제 일수도 있었는데

이 말을 들은 수양대군은

이미 이현로가 안평대군의 집에 드나들고

안평대군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현로를 한번 손 봐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조정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세력과

수양대군의 세력이 서로 맞부딪히는 상황이었기에

유능한 인재가 안평대군 밑에 있다면

자신에게는 엄청난 위협이 될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죠

 

또한 당시엔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세력이

수양대군 세력보다 더욱 강했기 때문에

수양대군은 점점 궁지에 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수양대군은 금성대군에게 찾아가

이현로와 엮이지 말라는 경고까지 하기도 했죠

 

그러던 어느날 당시 단종이 왕위에 올랐다는것을 명나라에 보고하고

승인을 받아오는 고명 사은사로 누가 갈것인지 정해야했는데

이때 훗날 명나라와 친분을 쌓는것이 좋다고 생각한 수양대군은

선뜻 자신이 사은사로 가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이현로는 안평대군에게

"수양대군이 사은사로 가면 명예를 날리고 인망을 거두어

후일의 기반이 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며

사은사로는 안평대군이 가야 한다고 말해주었죠

 

이에 안평대군은 영의정이던 황보인에게

자신이 사은사로 갈수있도록 힘을 실어줄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황보인은 안평대군이 사은사로 갈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통해 그를 도왔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고

안평대군과 이현로는 굉장히 분해했다고 하죠

 

또한 수양대군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커지자

이현로는 김종서와 황보인에게 부탁해

대군들이나 높은관직의 신하들의 집으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분경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수양대군의 세력확장을 막으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침내 수양대군은 일을 벌이고 마는데요

 

사은사로 명나라 행을 앞둔 수양대군은

자신이 조선을 떠난 사이 이현로가 무슨일을 벌일지 몰라

그의 기를 확 꺾어 놓을 생각을 하고

1452년 9월, 자신의 부하들을 시켜

이현로를 야산으로 끌고가 두들겨 패버리는 사건을 벌였던 것이죠

 

물론 수양대군이 말한 이현로의 죄는

새치혀를 놀려 형제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사이를 이간질하고

자신에게 대한 태도가 거만하고 방약무인 하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방약무인 (傍若無人) :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태도가 있음)

 

그리고 세조는 단종에게 찾아가 이현로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청을 올렸고

그러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세조의 주장대로

안평대군에게 아부하고 간사한 짓을 일삼은 이현로를 탄핵하기 시작했는데요

 

김종서와 황보인 등이 그를 비호해주긴 했지만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 이현로는 고향으로 내려가 살게 되었죠

 

그리고 이듬해인 1453년 4월, 수양대군이 사은사의 일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오자 뜬금없이 이현로는 수양대군을 찾아 갔습니다

 

이 일을 단종실록에는

이현로가 수양대군에게 아부하고 섬기려고 찾아갔지만

수양대군은 그를 꾸짖으며

"내가 너를 포박하여 사헌부에 보내고자 한다" 라고 했다고 하죠

 

이 일을 들어 많은 사람들은 '이현로가 안평대군을 버리고

수양대군을 섬기려고 간것이다' 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수양대군을 섬기는 척 하면서 수양대군 세력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찾아간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이현로는 수양대군에게

한바탕 꾸짖음을 들은뒤 쫓겨나오게 되었고

그해 10월, 마침내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은 죽임을 당했고

안평대군은 강화도로 귀양을 간후 교동도에서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났죠

 

그리고 안평대군의 책사역할을 했던 이현로 역시

계유정난의 칼날을 피해가진 못했는데요

 

이현로도 반역죄로 참형에 처해져 죽었고

수양대군은 이현로의 집에 있는 수많은 책들과 글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고 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이현로의 처자식들도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데

이현로의 아내는 우의정 이사철의 노비가 되었고

그의 첩의 딸 이생은 좌의정 한확의 노비가 되어버렸죠

 

그렇게 결국 싸움에서 진 안평대군의 세력은

완벽하게 몰락해 버린것입니다

 

먼훗날 정조가 왕위에 오른 이후 단종을 위해 절개를 지킨 자들의 복권을 위해

<어정배식록> 이란것을 만들었는데, 이현로는 별단에 이름이 오르기도 했죠

 

그러나 과거 그가 했던 말 중

'백악산 뒤에 궁궐을 짓지 않으면 정룡이 쇠하고 방룡이 흥한다' 라는 말은

훗날 사실대로 증명이 되는데요

 

세조의 장남(정룡)인 의경세자는 일찍 요절해 버린뒤

둘째(방룡)인 예종이 왕위에 올랐고

예종에게는 후사가 없어서 의경세자의 둘째(방룡) 아들이던 자을산군이

훗날 성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심지어 성종의 장남(정룡)인 연산군은 폭군이 되어 쫓겨나고

둘째(방룡)아들인 진성대군이 중종이 되죠

 

또한 중종의 장남(정룡)인 인종 역시 즉위한지 8개월만에 세상을 떠났고

막내(방룡)인 명종이 왕위에 오릅니다

 

이처럼 이현로의 말대로 왕의 장남들은 일찍 죽어 힘을 못썼던 반면

둘째나 다른 아들들이 오랜기간 왕위를 차지했던 것이죠

 

영화 관상에서도 김종서를 따르던 관상가 김내경이

결국엔 계유정난때 자신은 목숨을 건졌지만 아들을 잃고 말았고

이후 조용히 살아간다는 내용과

오늘 이야기한 이현로의 삶이 굉장히 닮아있는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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