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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인현왕후. 평생 남편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폐비까지 되었다가 오랜기간 투병하며 고통스럽게 죽은 왕비

by 사탐과탐 202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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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남편 숙종 때문에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던 왕비 인현왕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남편의 심한 변덕과 옹졸함으로 인해

최대의 피해자가 되어

평생을 우울하고 비참하게 산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인현왕후 민씨이죠

 

이 인현왕후의 남편이 바로 치졸함의 대명사인 왕 숙종 입니다

 

그녀는 숙종의 괴상한 변덕때문에 왕비 자리에서 폐위되기도 하고

나중엔 다시 복귀되기도 하면서 정말 드라마틱한 생애를 보내게 되는데요

 

오늘은 인현왕후 민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1680년 10월, 숙종의 첫번째 왕비인 인경왕후가 19살의 젊은나이에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인현왕후가 숙종의 두번째 왕비가 된것이죠

 

인현왕후는 1667년 여흥민씨 가문에서 태어났는데요

 

그녀는 어릴적부터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했으며

사람들을 대할때 언제나 화사한 미소로 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은 서인과 남인으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은 서인 세력의 주요 인물 중 한명 이었기에

점점 세력이 강해지던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서

서인 집안 출신인 인현왕후를 간택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런 정치적 고려속에 이루어진 결정은

인현왕후 입장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숙종의 마음속에는 인현왕후의 자리가 전혀 없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때 숙종의 마음을 모두 차지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장옥정 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현왕후는 숙종의 사랑은 전혀 받지 못한채

불행한 결혼생활이 시작된 것이죠

 

장옥정은 당시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로 인해 궁밖으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숙종은 장옥정을 그리워 하고 있었죠

 

그러자 인현왕후는 '왕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민가에 방치하는것은 미안한 일'이라는 이유로

장옥정을 다시 궁궐에 들일것을 숙종에게 먼저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장옥정을 죽도록 싫어한 명성왕후까지 얼마후 세상을 떠났고

아무런 반대하는 사람없이 숙종은 장옥정을 궁으로 불러들일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일은 인현왕후의 크나큰 실수였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는 거들떠 보지않은채 오직 장옥정만 바라보았고

매일밤 장옥정의 처소만 찾았던 것이죠

 

그러면서 점점 인현왕후는 숙종의 머릿속에서 사라져갔고

인현왕후와 장옥정의 관계도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장옥정은 숙종의 총애를 등에업고 온갖 오만방자한 태도를 보였는데

숙종이 장옥정의 처소에만 드나들며 관계를 가지려 하자

장옥정이 인현왕후의 처소로 뛰어 들어오면서

매일 자신만 찾는 숙종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인현왕후가 부르는 것을 쌩까기도한 것이죠.

 

이에 인현왕후는 그녀의 태도를 문제삼아 회초리를 때리는 등

내명부의 기강을 잡으려고 했지만

장옥정의 오만한 태도는 그칠줄 몰랐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인현왕후는 갈수록 안하무인의 모습을 보이는 장옥정을 견제하기 위해

새로운 후궁인 영빈 김씨를 들이기도 했지만

숙종의 마음을 돌릴순 없었죠

 

거기다가 어느날 인현왕후는 숙종을 찾아가

"간밤에 꿈에서 명성왕후가 나타나, 숙원(장옥정)은 전생에 짐승이었는데

주상(현종)께서 쏘아 죽였으므로 원한을 갚고자 태어난 사람이니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으며

"숙원의 팔자에는 아들이 없으므로, 전하께서 가까이 해도 소용없다"

라고 했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인현왕후는 장옥정을 견제하는 동시에 질투하고 있었죠

 

그러던 1688년 10월, 인현왕후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바로 장옥정이 숙종의 아들을 낳고 만것이죠

 

그때까지 후사가 없었던 숙종은 당시 소의였던 장옥정을

후궁 중 가장 품계가 높은 정1품 빈에 봉했습니다

이 장희빈이 낳은 아들 이윤은 훗날 경종이되는 이윤이죠

 

어쨌든 숙종은 아들이 태어난지 3개월만에 그를 원자에 책봉하려고 했는데요

 

이는 숙종이 후궁인 장희빈의 아들을

자신의 공식 후계자로 선언하는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조선의 예법상 원자는 정비인 중전이 낳은 적장자만이 책봉될수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다가 인현왕후는 당시 21살로 언제든지 자식을 낳을수 있는 나이였기에

후궁의 자식을 원자로 삼으려는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죠 

 

만약 이윤을 원자로 삼았는데 훗날 인현왕후에게 아들이라도 태어났을땐

왕위 계승 순서가 꼬이면서 자칫 잘못하면 궁중에 피바람이 불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장희빈도 양반이 아닌 중인 집안 출신이었으니

더더욱 받아들일수 없는 일이었죠

 

이에 서인들은 일제히 반대를 하고 나섰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아직 인현왕후의 나이가 어리다는것을 이유로

원자를 삼는일은 훗날로 미뤄도 된다고 주장했죠

 

사실 서인들의 주장이 당시 조선에서는 너무나도 맞는말이었지만

숙종은 그들의 주장을 개무시 해버리고

태어난지 100일도 안된 이윤을 원자로 책봉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이윤이 원자로 책봉되면서 일이 끝났음에도

송시열은 강경반대를 외치며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숙종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죠

 

그리고 이를 빌미로 1689년, 송시열과 김수흥, 김수항, 민정중을 비롯한

수십명의 서인세력이 줄줄이 사약을 받았고 귀양을 가기도 했으며

파직되기도 했던 것입니다

 

숙종은 이렇게 조정내에서 서인 세력을 축출하면서

남인들을 등용하며 정권 교체를 단행했는데

이 어이없는 사건이 바로 '기사환국' 이죠

 

그러자 서인의 지지를 받던 인현왕후도 아무런 지지세력없이

궁지에 몰리게 되는데요

 

이해 4월 23일 생일을 맞이한 인현왕후에게 청천벽력과 같은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대왕대비였던 숙종의 할머니 장렬왕후가 죽어 국상중이었기에

숙종은 어명을 내려 인현왕후의 생일과 관련된 행사를 금지했고

심지어 문안인사나 선물을 주는것 조차 금지시켰던 것이죠

 

그런데 인현왕후는 친정에서 보내온 음식을 받았고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은 어명을 어겼다며 격분했던 것입니다

 

사실 이건 그냥 적당히 가볍게 넘어갈수도 있는 사안이었는데요

 

그렇게까지 숙종이 화를 낸것을 보고 훗날 많은 사람들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출시키기 위해

꼬투리를 잡을려고 그 난리를 쳤던것 같다고 해석하고 있죠

 

그리고 얼마안가 인현왕후가 투기를 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폐서인 시킨뒤 궁밖으로 내쫓으려 하자

정치적으로 인현왕후와 반대파였던 남인들 조차 반대했을 정도로

인현왕후의 폐출은 명분이 없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이번에도 신하들의 말을 개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인현왕후를 폐출시켜 버렸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그녀에게 물어진 죄는 '자식이 없는 죄',

‘죽은 시부모의 계시를 빙자하여 왕에게 거짓을 고한 죄’

‘왕의 육체를 조롱한 죄’

‘투기로 내전의 일을 조정으로 확대시켜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궁인의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 였다고 합니다

 

사실 인현왕후가 저지른 죄는 그렇게 심하지 않았고

그냥 넘어갈수도 있었지만

숙종의 치졸하기 짝이 없는 결정으로 인현왕후가 피해자가 되어버린것이죠

 

그렇게 1689년 중전으로 책봉된지 8년만에

그녀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궁궐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숙종의 치졸한 행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는데요

 

숙종은 인현왕후의 흔적이 남겨진 물건은

모두 불태워 흔적조차 없애버리라 명했으며

인현왕후가 가례를 올릴때 입었던 옷은 공개적으로 태우도록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례를 올리는 날에 지진이 나서

어쩐지 불길하더라." 라고 말하기까지 했다고 하죠

 

사실 인현왕후도 폐출될것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는지

자신의 생일날 사건으로 숙종이 화냈다는걸 듣고

"다 나의 죄다, 어쩌겠냐, 폐출시키려면 폐출시켜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폐위되고 이듬해인 1690년,

숙종은 장희빈을 중전의 자리에 책봉했고 원자 이윤은 세자가 되었죠

 

야사에 의하면 인현왕후가 궁궐에서 내쳐질때

백성들이 모두 슬퍼하며 울었다고 하는데요

 

이때 그 유명한 "미나리는 사철, 장다리는 한철" 이라는 민요가 불렸다고 하는데

여기서 미나리는 인현왕후를 지칭하고 장다리는 장희빈을 지칭한다고 합니다

 

한철인 장희빈은 결국 쫓겨나고 사철인 인현왕후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의미이죠

 

어쨌든 인현왕후는 쫓겨난뒤 굉장히 힘든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이미 친정 가문도 몰락한 상태였기에

식량이나 땔깜도 부족했을 정도로 궁핍하게 살았다고 하죠

 

또한 그녀의 처소는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마당에 잡초가 무성할 정도였으며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하들이 그녀에게 옷과 식량을 지원해 주자고

숙종에게 요청했지만 숙종은 이마저도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1693년, 숙종에게 새로운 여인이 등장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가 바로 훗날 연잉군(영조)을 낳는 숙빈최씨 입니다

 

숙빈최씨는 궁녀일때 아랫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던 인현왕후를 굉장히 존경했고

인현왕후를 챙기는것이 금기시 되던 궁내에서

인현왕후의 생일상을 몰래 차려 그녀의 생일을 기리고 있다가

숙종에게 들키고 만것이죠

 

그런데 숙종은 따뜻한 숙빈최씨의 성품에 감동했고

결국 숙빈은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었으며

장희빈을 밀어내고 숙종의 총애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1694년 3월, 서인세력이 비밀리에 인현왕후를 복위 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다

남인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남인들은 즉시 숙종에게 모든것을 고해바쳤죠

 

그런데 서인들을 국문하던 와중에 숙종이 갑자기 돌변해

인현왕후 복위 운동에 대한 남인의 고발이 무리한 수사라는 이유를 내세워

남인 세력을 공격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렇게 삼정승을 비롯해 수십명의 사람이 파직되거나 유배형을 받았으며

14명이나 되는 사람은 사형을 당하기 까지 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렇게 숙종은 남인을 몰아내고 다시 서인을 등용했는데

이 사건을 '갑술환국' 이라고 하죠

 

사실 숙종은 남인들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있기도했고

장희빈의 사랑도 식은데다가 최숙빈이 등장하기 까지 했기에

이 기회를 빌어 남인들을 축출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직접 편지까지 써가며 인현왕후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했는데

인현왕후가 폐출될때 대부분의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자신의 독단으로 폐출 시켰으면서

간신들의 농간에 속아서 그랬다는 변명을 늘어놓았다고 하죠

 

그러자 처음엔 인현왕후도 숙종의 돌아오라는 편지를 거절했지만

나중에 진심을 담은 간곡한 편지에 거절하지 못하고

1694년 4월 12일 다시 궁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궁에 도착했을때 숙종은 친히 마중을 나가 인현왕후를 맞이해주었고

이후에도 계속 인현왕후를 아끼고 지극정성으로 대해줬다고 하죠

 

그리고 입궁하고 두달후인 6월에 다시 인현왕후를 중전으로 책봉하고

장희빈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시 중전이 되고 궁으로 돌아왔지만

인현왕후의 삶은 여전히 불행했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세자의 친어머니였던 장희빈의 힘은 여전했으며

인현왕후는 계속 아이를 낳지 못하고 있던 것이죠

 

장희빈은 수시로 궁녀들을 중궁전으로 보내 인현왕후의 동태를 염탐하게 했는데

심지어 감히 궁녀가 중궁전의 창호지 문을 손가락으로 구멍 뚫어

안을 엿보면서까지 염탐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장희빈의 입지는 굳건했고

인현왕후는 중전이었지만 궁내 입지가 탄탄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왕비가 되었지만 숙종의 사랑을 받지못하고, 심지어 궁내에서 쫓겨나기도 했으며

이후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궁궐로 돌아왔음에도 불행한 삶을 살았던 탓인지

너무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던 인현왕후는

결국 병에걸려 굉장히 오랜기간 고통스러운 투병생활을 하게 됩니다.

 

약 1년 6개월 동안 온갖 악성 종기에

참기 힘든 통증, 그리고 오심, 구토, 복통, 설사, 발열 등이

끊임없이 나타나다가 결국 복위 8년 후인 1701년 8월 14일 새벽,

깊은 통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파란만장한 삶을 끝내고 말았죠

 

야사에 따르면 그녀가 죽기직전 숙종에게 마지막 유언으로

"자신이 죽으면 귀인 김씨를 중전으로 맞이해달라"고 부탁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죽고나서 다시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우려했던것 같죠

 

하지만 숙종은 귀인 김씨를 굉장히 싫어해 그녀를 중전으로 삼지는 않았고

장희빈이 죽고나서 후궁은 왕비가 될수 없다는 법을 만든 뒤

새 장가를 들어 인원왕후를 다음 왕비로 삼았죠

 

하지만 숙종은 새 왕비인 인원왕후 역시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현왕후의 삶을 쭉 살펴보면 그녀를 가장 많이 괴롭히고

불행하고 비참하게 만든건

사실 장희빈이 아니라 남편인 숙종이었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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