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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역사 탐구

장보고. 넘사벽 능력을 가졌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비운의 해상왕

by 사탐과탐 2024.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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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사벽 능력을 가졌지만 신분의 벽에 가로막힌 비운의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한반도 해상 무역과 해적 퇴치의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하면 다들 장보고 장군이 떠오르실 텐데요

그가 신라 시대에 동아시아 전역을 주름잡던 무역왕이자

해적 소탕의 선봉장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죠

얼마나 대단했었기에 한국 해군의 잠수함과 남극 기지에 그의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존경받고 있는 것일까요?

장보고는 단순한 역사적 위인이 아닌, 동아시아 해양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했기 때문인데요

지금부터 해상왕 장보고의 놀라운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장보고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그가 활동했던 시기를 봐서 8세기말이나 9세기 초에 태어난 거로 추정됩니다

그의 본명은 이두로 '궁복' 또는 '궁파'로 표기되었으며 우리말로 하면 '활보'로 읽을 수 있죠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장보고는 어릴 때부터 활을 잘 쏘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보고의 고향 또한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완도 출신인 것이 정설인데요

왜냐하면 훗날 그가 완도에서 청해진이라는 기지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바다와 가까운 곳에서 자랐다는 것은 거의 확실합니다.

그의 친구 정연이 장보고는 50리(약 20km)를 헤엄칠 수 있었다고 말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죠

바다 근처에서 살지 않았다면 그렇게 수영을 잘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장보고의 가족 배경도 명확한 정보가 없고 그가 신라의 귀족 출신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죠.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 제도가 있었는데, 장보고는 이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출세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신라를 떠나기로 마음먹게 되는데요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결국 장보고는 친구 정연과 함께 당나라로 떠나기로 결심하죠.

당시 당나라는 신라보다 훨씬 큰 나라였고, 많은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기회의 땅이기도 했지만 목숨이 위험한 곳이기도 했는데요.

당나라는 내부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었고 곳곳에서 전쟁까지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장보고와 정연이 당나라에 도착한 후 그들은 군대에 입대하게 됩니다

당나라는 외국인들도 군대에 받아주는 개방적인 나라였는데 어릴 때부터 연마했던 무예가 빛을 발휘해 장보고는 군대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말을 타고 창을 다루는 데 탁월했는데, 그 덕분에 그는 빠르게 승진해서 '무령군 소장'이라는 높은 직위까지 올랐죠.

 

무령군은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한 부대였는데요.

장보고는 이 부대에서 훗날 더 크게 성장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는 실전 경험을 쌓게 되었죠

그렇게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약 20~30년 정도를 당나라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다 828년에 갑자기 그는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죠

 

장보고가 귀국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설은 그가 당나라에서 신라인들이 노예로 팔리는 것을 보고 분노해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로는 당나라의 정세가 불안해지면서 그동안 쌓아온 무역 기반이 위험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오랜 타국 생활을 접은 장보고는 곧바로 흥덕왕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왕에게 다짜고짜 제안을 하나 했는데요.

"저에게 군사 1만 명을 주시면 제가 당나라의 해적들을 막겠습니다."

흥덕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장보고에게 '대사'라는 특별한 직책까지 주었죠

 

그렇게 해서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립하게 됩니다

청해진은 군사 기지이자 무역 중심지로 거듭나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장보고는 해적들을 물리치고, 한중일 삼국을 오가는 독점무역을 관리하게 되었죠

그래서 그는 '해상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겁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작은 미약했을지 모르나 청해진은 금세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장보고는 뛰어난 무역 감각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장악하기 시작했죠.

그의 배들은 한국, 중국, 일본을 오가며 다양한 물건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비단, 도자기, 향신료 등 당시 귀중했던 물건들이 거의 청해진을 통해서만 거래되었습니다.

 

또한 장보고는 흥덕왕에게 제안했던 대로 해적들을 물리치는 데에도 큰 활약을 했는데요

당시 한반도 인근 바다에는 수많은 해적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배를 약탈하고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팔아넘기곤 했습니다.

장보고의 군대는 이런 해적들을 순식간에 물리쳤고, 덕분에 청해진으로 오가는 바닷길이 훨씬 안전해졌죠

 

장보고는 신라를 넘어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중국 산둥 반도에 '적산법화원'이라는 절을 세웠죠.

이 절은 신라와 일본에서 온 승려들이 머물 수 있는 곳이었는데요

일본의 유명한 승려 엔닌이 당나라를 여행할 때 장보고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한편 장보고가 맹활약하던 시기, 신라는 큰 혼란을 겪고 있었는데요.

왕위를 둘러싼 싸움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인데 839년, 민애왕이 즉위했을 때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때 김우징이라는 사람이 왕위에 눈독 들이고 있었죠

그래서 김우징은 세력이 막강한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요

그는 장보고에게 "내가 왕이 되면 당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겠다" 라며 약속했던 거였죠.

장보고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자신의 군대를 김우징에게 내주었습니다.

 

장보고의 군대는 개인사병이었지만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정말 강했는데요.

반면 신라의 정규군은 오랫동안 전쟁을 하지 않아서 오합지졸에 불과했죠.

게다가 신라군은 피 한 방울 흘린 적 없는 귀족들이 지휘를 맡아 당나라군대만도 못한 수준이었습니다

 

결국 장보고의 군대는 신라 정부군을 손쉽게 물리치고 서라벌(지금의 경주)을 점령해 버렸죠.

심지어 도망친 민애왕을 쫓아 시해해 버리고 김우징은 신무왕으로 새로운 왕이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쿠데타에 성공한 장보고에게 행운의 여신이 반겨주진 않았는데요

왕이 되면 장보고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겠다던 약속을 쌩까버렸던 신무왕은 1년도 채 되지 않아 병으로 죽고 말았기 때문이죠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이 다음 왕위에 오르게 되자 장보고는 문성왕에게도 이전의 약속을 지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문성왕 또한 이를 거절했습니다.

신라 귀족들이 장보고의 출신을 이유로 반대했기 때문이었죠

 

이에 화가 난 장보고는 욱하는 마음에 반란을 생각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요

삼국사기에서는 반란을 일으켰고, 삼국유사에서는 반란 모의만 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죠

어쩌면 진짜로 생각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결국 그의 반란 계획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846년, 신라 조정에서 보낸 자객이자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에게 허망하게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의 죽음과 함께 청해진도 금세 몰락했습니다.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완전히 없애버렸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버렸죠

 

그렇게 장보고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가 남긴 영향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습니다.

해적을 소탕함으로써 안전한 바닷길을 열어 한국, 중국, 일본 사이의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을 크게 발전시켰죠

 

장보고가 청해진을 중심으로 펼친 무역 활동은 나중에 고려청자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청해진이 있었던 강진, 해남 지역에서 중국 도자기 제작 기술이 전해졌고, 이것이 고려청자의 기초가 된 것이죠

 

또한 장보고의 활동은 한국 불교의 발전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요.

그가 만든 해상 루트를 통해 많은 승려들이 당나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특히 '선종'이라는 불교 종파가 한국에 전해지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는 비록 귀족 출신이 아닌 낮은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큰 성공을 이뤄낸 자수성가의 대표적인 아이콘이죠

또한 국내에서만 활약했던 인물이 아니었고 동아시아 전체를 무대로 삼아 맹활약했던 거의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생전에 그렇게 많은 활약을 할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결국 신분의 벽을 넘을 수 없었던 당시 신라 사회의 민낯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보고에 대한 평가 또한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달랐다고 하는데요.

고려 시대에는 그를 뛰어난 무장이자 상인으로 높이 평가했지만, 충신이라고까지는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조선 시대에 와서 장보고의 평가가 더 좋아졌죠.

그를 반란을 진압하고 해적을 소탕한 충신으로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의 역사책인 '동국사략'과 '동국통감'에서는 장보고를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죠

현대에 와서 장보고는 '해상왕'이라는 별명과 함께 한국 해양사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장학금도 있고, 드라마나 영화의 주인공으로도 자주 등장했죠.

완도에는 장보고를 기리는 기념관도 있으니 한번 가보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만약 장보고의 딸이 약속대로 정말 왕비가 되어서 그의 권세가 더욱 오래 지속되었다면 신라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넘사벽의 능력을 가졌지만 끝내 신분의 벽에 가로막혔던 비운의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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