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 여왕이었지만 정말 기구하고 비참한 삶을 살다가 결국 처형당한 여인 메리 스튜어트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오늘은 16세기 유럽을 뒤흔든 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의 왕비였던 메리 스튜어트입니다.
그녀의 삶은 마치 한 편의 대하드라마처럼 굴곡진 운명으로 가득했죠.
실제로 그녀는 서양에서 많은 드라마와 영화의 주제가 될 정도로 유명한데요
과연 그녀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
1542년 12월 8일, 스코틀랜드의 린리스고 성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바로 그녀가 메리 스튜어트였죠.
그녀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 어머니는 기즈의 마리였습니다.
하지만 운명은 참 예측할 수 없는 법이죠.
메리가 태어난 지 겨우 6일 만에 아버지 제임스 5세가 30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던 겁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이웃 나라 잉글랜드와의 갈등, 그리고 국내의 종교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는데요.
가톨릭교와 개신교의 대립이 정치와 맞물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죠.
그런 와중에 갓 태어난 아기가 곧바로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어린 메리의 운명은 또 한 번 급변하게 됩니다
5살 때 그녀는 비밀리에 프랑스로 망명을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침략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기 위한 결정이었죠.
다행히도 프랑스에서 메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화려한 궁정 생활과 최고의 교육이었습니다.
16세기 중엽의 프랑스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세련되고 화려한 곳이었죠.
그 당시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의 꽃이 만개했기 때문이었는데요.
이런 환경에서 자란 메리는 그야말로 완벽한 왕비감으로 성장했습니다.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물론이고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문예에도 재능이 있었고, 자수나 승마 같은 귀족적인 취미에도 뛰어났다고 하네요.
프랑스 국왕 앙리 2세는 메리를 '작은 여왕님'이라 부르며 아꼈고, 왕비 카테리나 메디치도 그녀를 귀여워했습니다.
앙리 2세는 "이런 완벽한 아이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니, 메리가 얼마나 사랑받았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1558년, 15세의 나이에 메리는 프랑스 황태자 프랑수아와 결혼합니다.
그리고 이듬해, 프랑수아가 프랑스의 국왕이 되면서 메리는 16세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데요
하지만 이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죠.
병약했던 프랑수아가 즉위한 지 1년 반 만에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졸지에 18살 나이에 과부가 된 메리는 고국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561년 8월, 13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메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낯설고 험난한 현실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서 자란 메리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었는데요.
하지만 그 사이 스코틀랜드는 이미 개신교 세력이 우세해진 상태로 변해있었죠.
심지어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있었던 데다가 가톨릭 신자인 메리에 대한 반감이 상당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강인했던 그녀는 왕국 각지를 순회하며 국민들과 소통하기 시작했고
그녀의 젊음과 아름다움, 그리고 씩씩한 모습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여왕의 종교는 환영하지 않으나 여왕은 대환영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메리는 가톨릭 신자였지만, 개신교의 권리도 인정하는 포용력을 보였고 심지어 개신교 귀족인 제임스 스튜어트를 중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스코틀랜드를 순조롭게 통치할 수 있었던 메리에게
큰 전환점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만남이었습니다.
단리 경은 메리와 같은 스튜어트 가문 출신의 잉글랜드 귀족이었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메리는 단리 경에게 마음이 끌려
1565년, 22세의 나이에 그와 재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결혼은 곧 메리에게 큰 시련을 안겨주게 되는데요
사실 단리 경은 오만하고 절제력이 없었으며, 심지어 왕위를 요구하기도 했었죠.
게다가 메리의 시종 다비드 리치오를 질투한 나머지
귀족들과 공모해 리치오를 살해하는 사건까지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메리와 단리 경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죠
그러다 1567년 2월, 또 다른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단리 경이 묵고 있던 저택이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죠
그런데 단리 경은 그 폭발과는 다른 원인으로 사망한 게 밝혀지면서,
메리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됩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메리는 스스로 혼란의 길을 걷게 되는데요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그녀는 단리 경 살해 용의자로 지목된
보스웰 백작과 3개월 만에 재혼해 버린 겁니다.
당연하게도 그녀의 결정은 국내외의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반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1567년 6월, 메리는 반란군에 항복하고 말았죠
"매춘부를 태워 죽여라", "남편을 죽인 자를 태워 죽여라"라는 민중의 매서운 비난 속에서 그녀는 로클레벤 성에 유폐되고 맙니다.
결국 그녀는 퇴위하게 되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고작 1살 된 아들 제임스가 새로운 스코틀랜드 왕으로 즉위합니다.
1568년 5월, 메리는 기적적으로 로클레벤 성을 탈출하는데요.
하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어머니의 나라 프랑스가 아닌 잉글랜드였습니다.
메리는 사촌이자 라이벌인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었죠
하지만 그 결정 또한 메리에게 다른 비극을 안겨주게 됩니다
아군인 줄 알았던 엘리자베스 1세는 사실 메리를 위협적인 존재로 여기고 있었던 거였죠.
메리 역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고,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메리는 19년 동안 잉글랜드 각지의 성에 유폐되어 지내게 됩니다.
한때 세 나라의 여왕이었던 그녀가 죄인처럼 갇혀 지내는 비참한 삶을 살게 된 것이죠.
당연하겠지만 이 기간 동안 메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었습니다.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고 류마티스로 다리가 휘었으며, 30대였지만 머리가 백발이 되었다고 하네요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르고 1586년에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를 암살하려는 계획에 동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됩니다.
당시 메리는 43세였습니다.
그녀는 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사형 선고를 받게 되는데요
사실 엘리자베스 1세도 그녀의 사형 집행을 주저했다고 합니다.
외국의 왕족을 처형한다는 것이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죠.
하지만 결국 1587년 2월 1일,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사형 선고서에 서명하게 됩니다
그렇게 1587년 2월 7일, 메리 스튜어트는 44세의 나이로 처형되고 말았죠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여왕다웠습니다
3시간에 걸쳐 붉은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한 메리는 당당한 태도로 스스로 단두대에 올랐다고 합니다
메리의 죽음 이후 16년이 지난 1603년에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게 되면서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왕위를 계승한 것입니다.
그는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즉위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합하게 되었죠
제임스 1세는 1612년 어머니의 유해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옮겼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웨스트민스터 사원 지하묘지에는 메리 스튜어트와 철천지 원수인 엘리자베스 1세가 나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생전에는 라이벌이었던 두 여왕이 죽어서는 같은 공간에 묻히게 된 것이죠.
메리 스튜어트의 인생은 권력과 사랑, 종교와 정치가 복잡하게 얽힌 16세기 유럽의 축소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 같은데요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여왕이 되었고, 세 나라의 왕관을 쓴 경험이 있는 유일한 여성이었죠.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19년간의 유폐 생활을 겪었고, 결국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와는 상반되는 그녀의 기구한 삶은 권력의 무상함과 운명의 가혹함을 보여주기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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