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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전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충격적인 사생활

by 사탐과탐 2024.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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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의 충격적인 사생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신은 공평하다' 라는말 들어보신적 있으신가요?

 

뭔가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대단한 사람에게도 단점이 있기 마련인데

이러한 점을 재미있게 표현하기 위해 많이 쓰는 말입니다

 

역사를 바꿀정도로 뛰어난 능력을 가지면

그 뛰어난 능력만큼 작은 단점도 훨씬 커보이기도 하죠

 

1905년, 당시 26살에 불과했던 아인슈타인은

3월에 광양자 가설,

4월에 분자 크기의 결정,

5월에 브라운 운동,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

7월에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

9월에 질량 - 에너지 등가원리 등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는데요

 

이 논문들은 공간, 질량, 시간, 에너지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혁명적인 논문 이었으며 현대 물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죠

 

이 1905년을 아인슈타인 한사람이 기적을 일으킨 해라고 해서

'기적의 해' 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이 중 '광양자 가설'로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죠

 

이후 아인슈타인은 여러 나라의 설문조사에서

천년을 통틀어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고

시공간과 우주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주었지만

그의 위대한 업적과 명성에 가려진

엄청난 반전 사생활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은 이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879년 3월, 독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아인슈타인은

어렸을때부터 천재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12살때 이미 대수와 유클리드 기하학을 독학으로 배웠고

피타고라스 정리에 대한 독자적인 증명까지 발견했죠

 

심지어 14살때는 미적분학을 마스터 했다고 합니다

 

수학과 물리학에 빠져든 아인슈타인은

교육과정을 훨씬 뛰어넘어 교사들에게 수많은 질문을 했는데

그러자 교사들 조차 아인슈타인의 질문에 쩔쩔 맸다고 하죠

 

심지어 가정교사였던 막스 탈무드는

12살의 아인슈타인에게 기하학 교과서를 주고나서 얼마후

"아인슈타인은 책 전체를 공부했습니다.

그의 수학적 천재성의 비상이 너무 높아서 따라갈수가 없었습니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하지만 어릴적 그는 굉장히 무서운 기행을 벌이기도 했는데요

 

자신의 여동생이던 '마야'의 목숨이 위태로웠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행을 가했던 것이죠

 

아인슈타인은 화가 났을때

동생 마야의 머리를 향해 볼링공을 던져버리기도 했으며

삽으로 머리를 쳐버린 일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야는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라는 말까지 했었다고 하죠

 

또한 천재소리를 듣던 아인슈타인도

학교 생활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4~5살이 되기 전까지 말을 거의 하지 못했고

이후로도 말을 더듬 거렸기 때문에

정신지체가 아닐지 의심할 정도였으며

그의 부모들 역시 어느정도 포기하고 있었다고 하죠

 

학교에 다니고 나서도 선생님들의 질문에 대답을 잘 못했고

혼자 중얼중얼 거리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다가 혼자 유일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기에

평소에도 조용한 편이었다고 하죠

 

이후 그가 17살이 되었을때 첫사랑을 만나게 되는데요

 

그녀는 바로 자신이 하숙하던 집의 딸인 '마리 빈텔러'였죠

 

그는 스위스에 있던 아라우 주립학교를 다닐때

그곳에서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던 '요스트 빈텔러' 교수의 집에서

하숙을 하게 되었을때 마리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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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은 마리에게

'당신은 이 세상 무엇보다 나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로 그녀를 열렬히 사랑했죠

 

하지만 마리는 평범한 시골소녀였기 때문에

서로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수학과 물리학에 대해서는 말을 잘했지만

공감능력이 좀 떨어졌던 탓인지 일상적인 대화는 어려워했던 것이죠

 

그렇게 둘 사이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는데

아인슈타인이 취리히 공대에 입학하면서

둘사이는 파탄나게 됩니다

 

마리와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도중에

그는 물리학과 동기였던 '밀레바 마리치'를 만나게 되는데요

 

대화가 힘들었던 마리와는 다르게

밀레바 마리치와는 함께 물리학에 대해

토론을 나눌수 있을 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던 여인을 만난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렇게 아인슈타인과 밀레바는 서로 토론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아인슈타인도 지적인 그녀에게 완전히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후 마리에게 보내던 편지도 뜸해졌고 나중엔 찾아가지도 않았죠

 

하지만 마리는 계속해서 아인슈타인을 열렬히 사랑했고

계속해서 사랑의 편지를 보냈지만

이미 아인슈타인은 마리에 대한 사랑이 차갑게 식어있었습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수학, 물리학에 빠져있는 상태였는데

이를 함께 연구하며 토론하던 밀레버와는 다르게

간지러운 사랑의 말만 하던 마리가 굉장히 하찮게 보이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의 구애도 귀찮고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것이죠

 

이후 아인슈타인은 마리에게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렇게 끝낼수 없었던 마리는 계속해서 사랑의 편지를 보냈는데

아인슈타인은 마리의 어머니였던 폴린 빈텔러에게까지

마리에게 연락을 못하게 하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둘 사이는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이때 마리는 그런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으며

그래서인지 둘이 주고받은 편지들 중에는

현재 찢어진채로 발견된 것도 있다고 하죠

 

그러나 마리를 잔인하게 버리면서까지 밀레바와 연애가 시작되었고

훗날 둘은 결혼까지하고 자식까지 낳게 되지만

결혼생활은 굉장히 불행했습니다

 

일단 아인슈타인의 가족들은 빈텔러 가족과 굉장히 친하게 지내왔다보니

밀레버를 굉장히 탐탁치 않게 여겼던 것이죠

 

심지어 아인슈타인이 밀레바와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온갖 구실을 들어 그녀의 단점을 들춰내며

결혼을 격하게 반대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가족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녀와의 교제는 계속되었고

이후 밀레버가 임신하자 너무 기뻤던 아인슈타인은

그녀에게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거라는 말을 하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죠

 

하지만 얼마후 둘 사이는 결국 갈라지고 마는데요

 

임신한 상태로 졸업시험을 치뤘지만 낙제해버린 밀레바는

과학자로써의 꿈을 포기하고

부모님 집으로 돌아가 딸 리제를을 출산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그렇게 아인슈타인과는 별거를 하게 되었죠

 

그러던 어느날, 밀레바는 아인슈타인이 있던 취리히로 돌아왔는데

그녀의 곁에는 딸 리제를이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 딸이 있었다는것은 먼훗날 알려졌기에

아인슈타인의 전집을 출판했던 편집자는

총력을 다해 딸의 행방을 수소문 했지만

그녀의 행방은 커녕 사진 한장 찾을수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딸을 입양 시켰을거라는 주장이 있기도하고

딸이 일찍 요절하고 말았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 주장들은 아무런 증거가 없는 추측에 불과 합니다

 

어쨌든 혼자 아인슈타인에게로 돌아온 밀레바는

그에게 위로 받기를 원했지만

아인슈타인은 또 다시 아무런 위로를 해주지 못하고

연구에만 몰입했다고 하죠

 

또한 1903년에 그들은 아인슈타인의 아버지 헤르만이

죽기 직전에 결혼을 허락해줘서

드디어 결혼식을 올릴수 있었지만

양측 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은채 치뤄진

축복받지 못한 결혼식이었다고 합니다

 

축복받지 못한 결혼식을 한데다가

과학자로써의 꿈이 깨진 밀레바는 점점 성격이 변해갔고

그녀가 하는 잔소리에 아인슈타인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그녀를 멀리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때쯤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 취업하며 생활은 나아졌지만

이 일을 '똥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며

그는 물리학 연구에 더욱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1904년 둘 사이에 한스라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인슈타인은 가정이나 가족에 대한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그래도 연구에 몰두한 덕인지 1905년에 엄청난 논문들을 쏟아내며

물리학계에서 그의 권위는 굉장히 높아져 갔지만

밀레바와의 사이는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의 부부생활도 질렸는지

1910년 밀레바가 둘째아들 에두아르트를 임신하고 있던 와중에

첫사랑이던 마리에게

"나는 매 순간마다 진심 어린 사랑으로 당신을 생각한다.

나는 너무 불행한 남자다." 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죠

 

심지어 밀레바와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

서로 지켜야할 사항에 대해 계약서를 작성하기 까지 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어떠한 애정표현도 하지 않았으며

자식 때문에 같이 사는것일뿐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 까지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던 1912년, 그는 또다른 여성에게 눈을 돌리게 되는데요

 

심지어 그녀는 과부이자 자신의 사촌 누나였던

'엘자 뢰벤탈'이라는 여성 이었습니다

 

엘자는 눈이 나빴지만 예쁘게 보이기 위해 안경을 쓰지 않은채 식사를 하다가

꽃장식이 샐러드인줄 알고 먹어버린 일화가 유명할 만큼

허영심이 가득한 여성이었죠

 

이때 아인슈타인은 엘자에게

'아내인 밀레바를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밀레바를 해고 할 수 없는 직원으로 생각한다'

라는 등의 밀레바를 욕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아인슈타인은 중립국으로 피신하면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고

이때 그는 엘자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또 다시 바람을 피기 시작했죠

 

그리고나서 밀레바와는 노벨상 상금을 전부 주는걸로 합의를 보고

1919년 결국 이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그런 책임감없는 태도로 인해

그의 자식들은 아인슈타인을 평생 미워했는데요

 

밀레바는 이혼 후 피아노 가정교사로 일하며 혼자 아들 둘을 키웠는데

둘째아들인 에두하르트는 심각한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기에

평생 정신병원에 갇혀 살았다고 하죠

 

밀레바는 둘째아들의 병원비를 대다보니 경제적인 어려움에 시달려

아인슈타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해도

아인슈타인은 들어준적이 별로 없었습니

 

첫째아들인 한스는 똑똑했기 때문에

훗날 버클리 대학의 교수를 역임하기까지 했지만

어렸을적 동생의 정신병 때문에 굉장히 힘든 시절을 보냈다고 하죠

 

하지만 어머니와 동생에게 너무나도 무관심했던 아버지를 원망했으며

아버지 취급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아인슈타인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훗날 자식을 낳았을때도 아인슈타인에게 알리지도 않았고

아인슈타인이 죽었을때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장례식장에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하죠

 

그만큼 그는 과학자로써는 최고의 업적을 쌓은 인물이지만

가족들에게는 최악의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쨌든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와 이혼 후 4개월만에

엘자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요

 

이후로도 승승장구 해 세계적인 스타가 된 아인슈타인은

수많은 여인들의 구애 대상이 되기도 했죠

 

심지어 마릴린 먼로의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은 남자 목록에도 들어가 있었다고 하고

실제로 아인슈타인이 먼로에게

연애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엘자와의 결혼생활도 무난하지는 않았죠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엘자의 딸이던 일세(Ilse)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낸것입니다

 

당시 일세는 22살로 아인슈타인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는데

의붓 아버지의 고백 편지를 받고

"나는 어리니까 아이도 낳을수 있으니

엄마보다 나랑 결혼하는게 낫지 않을까" 라며

아인슈타인과의 사이를 심각하게 고민을 했던 기록까지 남아있다고 하죠

 

하지만 양심을 택한 일세는 그의 고백을 받아주지 않았고

훗날 아인슈타인의 전기 작가 루돌프 케이저와 결혼하게 됩니다

 

어쨌든 엘자는 이후 아인슈타인의 재산을 관리하거나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등 아인슈타인의 뒷바라지를 하게 되는데요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아인슈타인임을 자랑하고 다녔다고 하죠

 

심지어 이후 아인슈타인이 23살의 비서 베티 뉴먼과 바람을 피웠을때도

별로 신경쓰지 않았는데

굳이 아인슈타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의 유명세를 이용해 부와 명예를 얻은것으로 만족했기에

아인슈타인의 잘못은 충분히 눈감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이후로도 아인슈타인은 마가레테 레바흐,

에스텔라 카체넬렌보겐, 토니 멘델, 에델 미카노프스키 등

여러명의 여자와 바람을 피울때도 엘자는 그냥 받아들였다고 하죠

 

그리고 이후 1936년, 엘자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둘은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엘자가 사망한 이후, 아인슈타인은

러시아 스파이로 알려진 마가리타 코넨코바와 잠시 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시간이 흘러 1955년 4월

그는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때 떠나고 싶소.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거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갈 때라오."

라고 말하며 수술을 거부했다고 하죠

 

이후 아인슈타인의 부검을 맡았던 토머스 스톨츠 하비는

아인슈타인이나 가족들의 동의도 없이

그의 뇌를 무단으로 적출해서 보관했었는데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엄청난 비난을 받은 하비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것이라는 주장을 했었다고 합니다

 

이때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는데

아인슈타인의 뇌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과학자들이

하비에게 같이 연구하자고 연락을 취해왔고

이 덕분에 비난은 얼마가지 않아 사그라 들었다고 하죠

 

그는 최고의 물리학자이자 위대한 과학자로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지만

가정 생활이나 여성 편력에 있어서는 최악의 낙제점을 받은 인물인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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