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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밀레바 마리치. 남자 잘못 만나서 꿈을 버리고 비극적인 삶을 산 여자

by 사탐과탐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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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잘못 만나서 꿈을 버리고 비극적인 삶을 산 여자 아인슈타인의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4년, 어느 한 남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 위한 조건을 제시 했습니다

 

1. 내 옷을 세탁하고 깨끗히 수선 정돈 해놓을것

2. 하루 세끼를 식사시간에 맞춰 내방으로 가져올 것

3. 내 침실 및 서재를 깨끗이 정리하며 특히 내 책상은 만지지 말 것

4. 사회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다음과 같은 모든 개인적 관계는 포기한다

- 집에서 내가 당신과 같이 앉아있는것

- 밖에 같이 외출하거나 여행을 다니는 것

 

5. 나와의 관계에서 준수해야 할 사항들

- 내게 어떤 친밀감도 기대하지 않으며,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질책하지 않을 것

- 내가 요구할 때는 언제고 나에게 말하는 것을 중단할 것

- 내가 요구할 때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즉시 나갈 것

 

6. 아이들 앞에서 말로든 행동으로든 나를 비하하는 어떤일도 하지 말것

 

이런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함께 결혼생활을 이어나갈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누가 들어도 이 조건들은 부부로써 애정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그런 조건들로 보여지는데요

 

아내에게 이런 가혹한 조건을 내건 남자는 바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최고의 과학자라고 생각하는 아인슈타인 입니다

 

그리고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여인은

그의 첫번째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였죠

 

밀레바 마리치는 어쩌면 아인슈타인과 만났기 때문에

굉장히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여인 인데요

 

지난번에 이야기 했던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영상을 보신분은

그가 굉장한 바람둥이였고, 나쁜 남편에, 나쁜 아버지 였던걸 알수 있죠

 

그의 이런 사생활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생전 그의 의붓딸이던 마르고트와

1912년부터 1955년까지 주고받은 편지 1300여 통이 공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첫번째 아내이던 밀레바 마리치와

주고받은 편지 역시 많았는데

그 편지 내용에는 마리치의 비극적인 삶에 대해서도 잘 드러나 있죠

 

오늘은 아인슈타인의 첫번째 아내였던

'밀레바 마리치'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밀레바 마리치는 1875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현재 세르비아 티텔)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녀는 태어났을때부터 고관절 탈골로 인해 다리를 약간 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부유한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았던 덕분인지

어릴적부터 수학이나 언어 그리고

음악과 미술에까지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였죠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밀레바가 15살이 되었을때

당시 남학교였지만 명문학교에 입학시켜 주었고

이후 중,고등학교를 명문학교에 다니며

수학과 물리에서 굉장히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최우수 성적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재력으로 그녀는 최상급 교육을 받을수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당시 여성들은 대학에 갈수 없었는데

다행히 얼마안가 그 제한은 풀리게 되면서

21살이 되었을쯤 취리히 연방 공대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여섯명의 동급생들 중에서 유일한 여성이었다고 하죠

 

거기다가 당시엔 먹고살기 바빴기 때문에

여자가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기 위해 대학에 입학 했다는것은

이미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이루어 낸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만큼 밀레바 마리치는 당시 여성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 되어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이때 밀레바는 자신의 삶을 180도 바꿔 놓게 되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아인슈타인' 이었습니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마리 빈텔러' 라는 여성과 사귀고 있었는데

그녀는 평범한 시골 소녀 였기에 똑똑했던 아인슈타인과는

대화가 잘 되지 않았었죠

 

그러나 둘은 열렬히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밀레바를 만나고 나서 아인슈타인은 똑똑한데다가

자신과 물리학에 대해 토론을 나눌수 있을정도로

대화가 잘 통하는 밀레바에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밀레바는 대학에서도 굉장히 우수한 성적을 올리며

하이델베르그에 가서 공부도 할만큼 열성적으로 물리학을 공부하고 있었는데요

 

이때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떨어져 있는 기간동안 서로 편지를 교환하며

밀레바 역시 지적이던 아인슈타인에게 빠져들었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안가 밀레바가 다시 취리히 공대로 돌아왔을때

마침내 둘은 연인사이가 되었고

아인슈타인은 원래 자신의 연인이던 마리를 가차없이 뻥 차버렸죠

 

그런데 문제는 이후부터 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의 부모님이 둘 사이를 적극적으로 뜯어 말렸던 것이죠

 

아인슈타인의 부모님은 그의 전 여친인 마리의 가족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마리와 결혼하기를 바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보다 나이도 많고 (3살차이)

그들이 싫어하던 세르비아인이며

다리 마저 절고 있는 밀레바와의 교제를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심지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반대가 심할수록 밀레바와 아인슈타인 사이는 더욱 돈독해졌는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트레스도 심했는지

장래가 촉망받던 밀레바는 성적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졸업하는데 필요한 성적을 받지 못하면서

졸업하는데 실패하게 되죠

 

그러자 밀레바는 다시 졸업장을 따기 위해 시험준비를 하던 중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게 됩니다

 

밀레바와 아인슈타인은 이태리 코모호수로 휴가를 떠나게 되는데

이때 맺은 관계에서 임신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

 

그리고 당시 혼전 임신과 사생아를 낳는다는것은

수치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밀레바 역시 원하지 않는 임신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은 알지도 못했던 것인지

아인슈타인은 임신을 한것에 기뻐하며

절대 당신을 버리지 않을거라는 말을 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도 했죠

 

하지만 임신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는지

그녀는 다시 친 졸업시험에서도 결국 떨어지고 말았고

낙심한 그녀는 베버 밑에서 준비하고 있던

박사학위 논문도 중단하면서

과학자로써의 꿈을 포기하고

출산을 위해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게 아인슈타인과는 별거를 하게 되었고

1902년에 딸 리제를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리제를은 이후 성홍열이라는 병에 걸리는데

그 뒤로 리제를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죠

 

사람들의 추측으로는 아마 일찍 요절했을것이라는 이야기와

입양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무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받던 밀레바는

그렇게 과학자로써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때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베른에 있는 특허국에 취직을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03년에는 아인슈타인의 아버지가 사망하기 직전에

두사람이 결혼해도 좋다는 허락을 하면서

드디어 둘은 결혼을 할 수 있었죠

 

하지만 양측 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은채 치뤄진

축복받지 못한 결혼식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꿈이 깨져버린데다가

이런 불행한 결혼식을 치룬 밀레바는

이후 점점 성격이 변해가기 시작했는데

그녀가 하는 잔소리에 아인슈타인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그때부터 밀레바를 멀리하기 시작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은 하고는 있었지만

이 일을 굉장히 하기 싫어했으며

일을 하지 않는 남는 시간에도 밀레바와의 시간은 전혀 보내지 않고

오로지 물리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퀴리 부부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밀레바는 자신도 한때는 물리를 공부하며

인생의 목표로 삼으려 했다는것을 생각하면서 우울해 했다고 하죠

 

이듬해인 1904년, 첫째 아들인 한스 알버트가 태어났지만

아인슈타인은 가족과 가정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가족은 나몰라라하고 연구에만 몰두한 덕인지

아인슈타인은 3월에 광양자 가설, 4월에 분자 크기의 결정,

5월에 브라운 운동,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

7월에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

9월에 질량 - 에너지 등가원리 등을 다룬 논문을

독일의 저명 학술지 "물리학 연보"에 발표했죠

 

이때 물리학 연보의 편집자인 뢴트겐의 조수였던 아브람 요페가

아인슈타인의 세 논문 (광전효과, 브라운 운동, 특수상대성이론)의

초고를 보았는데

초고의 원고에는 저자가 '아인슈타인-마리치' 라고 쓰여있었지만

훗날 논문이 최종 출판 될때는 아인슈타인의 이름만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훗날 수많은 사람들은

적어도 이 세 논문은 아인슈타인과 밀레바가

함께 쓴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 어떤 사람은 밀레바가

단독으로 쓴 논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죠

 

또한 일주일에 6일을 특허청에서 일하는 아인슈타인이

어떻게 1905년 한해동안 이런 엄청나게 획기적인 논문들을

연달아 내놓을수 있는것에 의문을 제기 하는 사람도 많았고

특히 특수상대성 이론 논문에 참고 문헌이 전혀 실려있지 않는걸보고

아인슈타인은 많은 물리학자들이 발전시켜온 이론을 표절했고

이 대단한 업적을 혼자 가로챈것이라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하지만 밀레바가 아인슈타인이 쓴 논문들에

학문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볼만한 특별한 증거도 없기에

이러한 주장들을 과장된 해석이라고 보고 있기도 하죠

 

과연 이 위대한 논문들에 밀레바가 도움을 주거나

아인슈타인에게 영감을 주었는지는

현재까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입니다

 

어쨌든 이후 아인슈타인의 명성은 전세계에 뻗어나가면서

그의 권위는 굉장히 높아져 갔지만

밀레바와의 사이는 멀어지고 있었죠

 

이후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대학에 부교수로 임명되면서

특허국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아인슈타인 가족은 취리히에서 살게 됩니다

 

1910년에는 둘째 아들인 에두하르트가 태어났지만

집안일과 가족에게는 전혀 관심없고

오직 물리에만 몰두하고 있는 아인슈타인을 보면서

밀레바는 굉장히 외롭고 비참해했죠

 

자신도 한때는 훌륭한 물리학자를 목표로 달려왔지만

지금은 아들 둘 키우는데 정신이 없다보니

더이상 남편과 물리에 대해 치열하게 했던 토론도 없어졌으며

남편이자 같은 연구를 하는 동지로써의 역할도 없어졌습니다

 

심지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사무실 여비서 등 여러 여자들과 바람을 피고 다녔으며

1912년, 베를린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만나러 간 아인슈타인은

그곳에서 이종사촌이던 엘자 뢰벤탈을 만나게 되죠

 

엘자는 어릴적부터 같이 자랐던 사이인데

둘은 서로 호감이 오갔으며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1913년, 저명한 물리학자이던 막스 플랑크가

아인슈타인에게 베를린 대학의 교수직을 제의 했고

이때 밀레바는 가족들과 함께 취리히에서 살자며 그에게 매달렸지만

아인슈타인은 그냥 베를린으로 떠나버렸죠

 

결국 몇개월후 밀레바도 할수 없이 두 아들을 데리고

아인슈타인이 있는 베를린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의 결혼생활에 더욱 짙은 먹구름이 끼기 시작하는데요

 

이미 사촌누나인 엘자에게 빠져있었던 아인슈타인은

밀레바가 베를린에 따라온것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아인슈타인은 영상 처음에 말했던

어이없는 조건들을 내걸며

결혼생활을 유지하려면 이러한 조건들을 지키라고 강요했던 것이죠

 

굉장히 굴욕적인 조건들이었지만

두 아들들 때문에 밀레바는 받아들일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둘 사이는 애정이나 사랑이 없는 파탄난 관계였고

밀레나 역시 가정부나 다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었죠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더이상 아인슈타인과는

다시 좋은 관계로 돌아갈수 없다고 느낀 밀레바는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취리히로 돌아갔습니다

 

밀레바가 없으니 아인슈타인과 엘자와의 내연관계는 더욱 깊어졌죠

 

밀레바는 취리히로 돌아간 이후 두 아들을 정성스럽게 키웠지만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에게 이혼 해줄것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혼을 해준다면 훗날 노벨상을 타고나서 받는 상금을

전부 주겠다는 제안을 했죠

 

그리고 결국 1919년 둘은 이혼을 하게 됩니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정말로 노벨상을 탔고 상금의 일부를

밀레바에게 줬는데

밀레바는 이 돈으로 집 세채를 구입해

한곳에서는 아이들과 살고 나머지 두 집은 투자를 했던 것이라 하죠

 

하지만 그녀의 비참한 삶은 끝난게 아니었습니다

 

혼자 피아노 가정교사를 하면서 자식들을 키우는 와중에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던 둘째아들 에두하르트가

스무살이 되는 해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켰고

그렇게 정신분열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죠

 

그리고 약 2년후인 어느날

에두하르트는 집에서 갑자기 난동을 부리고

밀레바의 목을 졸라 죽이려 했기에

첫째아들인 한스가 경찰에 신고해 그는 체포되었고

스위스의 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나 에두하르트의 병원비가 워낙 많이 들었던 탓에

결국 투자했던 두채의 집을 팔수밖에 없었고

이후 마리치는 궁핍한 삶을 살게 되죠

 

이때 그녀는 아인슈타인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했지만

들어준 적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자신의 아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도

20년동안 한번도 찾아가보지도 않았고

아들이 그렇게 된 이유는 모계쪽 때문이라며 밀레바를 원망했으며

심지어 에두하르트는 태어나지 말아야 했다고 말했다고 하죠

 

이 때문에 밀레바와 자식들은 평생 아인슈타인을 미워했다고 합니다

 

밀레바는 이후로도 계속 에두하르트를 정기적으로 찾아와 돌봐주었다고 하죠

 

첫째 아들이던 장남 한스는 이후

캘리포니아 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요

 

한스는 아버지 아인슈타인을 평생 원망했으며

아버지 취급도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이 죽었을때 전혀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장례식장에도 찾아가지 않았다고 하죠

 

이후 밀레바는 에두하르트의 병원비를 대면서 매우 곤궁하게 살다가

1948년 취리히에서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또한 아들 에두하르트는 1965년에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하죠

 

밀레바는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뛰어난 여성 물리학자 퀴리부인과

자주 비교되어지고 있는데요

 

노벨상 위원회에서 퀴리와 베크렐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수여한다고 하자

퀴리는 연구를 적극적으로 함께한 아내와 같이 받는거 아니면

노벨상을 받지 않겠다고 진정서를 냈고

결국 1903년 퀴리부부는 함께 노벨상을 받았었죠

 

이들에게도 자식은 있었지만 퀴리 부인을 대신해

시아버지가 두 손녀를 맡아 길러주었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밀레바는 자신의 물리학 재능을 꽃 피우지도 못했고

아인슈타인에게 처참하게 버림받았으며

평생동안 남자하나 잘못 만나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된

불쌍한 여인이었던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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