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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소태후. 자신의 아들 요성종을 요나라 최고의 명군으로 만들었던 여인

by 사탐과탐 2024.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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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아들 요성종을 요나라 최고의 명군으로 만들었던 여인이자 오랑캐라고 괄시받던
요나라를 당시 최강국으로 만들어버린 여인 소태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아내였던 마황후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아내인 문덕황후는

뛰어난 남편을 잘 내조했던 훌륭한 황후들이었는데요

 

오늘 이야기할 이 인물은

놀기만 하던 남편을 대신해 직접 나라를 운영했던

최고의 황후로 일컬어지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바로 요나라의 소태후 이죠

 

이 소태후는 이번에 인기리에 방영했던

'고려거란전쟁'에서 나온

요나라 황제 성종의 어머니 이기도 합니다

 

성종이 요나라 최고의 명군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 소태후 덕분이라는 말이 있기도 할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인물이었죠

 

이 소태후는 요나라 최대의 적이던 송나라를

굴복 시켰을 정도로 굉장한 능력을 보여주는데요

 

오늘은 '철마를 탄 여인 소작' 이라고 불리던

소태후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녀는 예지황후 그리고 소태후 라고 불렸고

이름은 바로 '소작' 이죠

 

하지만 어릴적 불렸던 아명은 소연연이었기 때문에

소연연으로 아는 사람들도 많을듯 합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요나라 2대황제인 태종의 딸이었고

아버지는 소사온으로 요나라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인물이죠

 

이런 굉장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작은

어릴적부터 공부하는걸 굉장히 좋아 했다고 하는데

체계적으로 교육까지 받을수 있었던 덕에

엄청 총명한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뿐만아니라 어머니 덕분에 한족의 문화까지 공부했으며

심지어 성품도 굉장히 훌륭했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느날 소사온이 소작을 비롯한 3명의 딸에게 청소를 시켰는데

다른 두명의 자매들은 대충 하는둥 마는둥 했던 반면

그녀는 굉장히 꼼꼼하게 청소를 하자

그 모습을 본 소사온은

그녀가 훗날 큰 인물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미 굉장히 훌륭한 사람 같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죠

 

바로 자랄수록 미모도 너무 아름다워 지면서

당시 사람들은 그녀를 '세낭(빼어난 미인)' 이라고 부를정도 였습니다

 

모든걸 다 갖춘 그녀는 결국엔 당시 여성으로써 가장 높은

황후의 자리에 까지 오르게되죠

 

969년 2월, 요나라 황제였던 목종이

사냥을 하고난 이후 연회자리에서 만취해 행패를 부리다가

주방장에게 죽임당하고 마는데요

 

그러자 소사온은 요나라 경종을 옹립해 그가 황제가 되었는데

이후 경종은 소사온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그의 딸인 소작을 황후로 삼았던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소작의 남편이었던 경종은

정사를 돌보는것보다는 노는것을 더 좋아했다보니

어쩔수없이 소황후가 남편 대신 정치를 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요나라의 상황은 혼란 그 자체였는데요

 

3대 황제 세종과 4대 황제 목종 둘다 재위 도중 살해를 당했으며

서쪽에는 서하, 남쪽에는 송나라, 그리고 동쪽으론 여진과 고려 등

주변에도 무시할수 없는 강대국들이 존재했던 것이죠

 

그렇게 위기의 요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소황후는 겨우 20살의 나이로 엄청난 능력을 발휘 하기 시작합니다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훌륭한 인재가 필요하다 생각한 소황후는

거란족, 한족 할거 없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사람은

후한 대접을 하면서 등용했고

당시 문화의 중심이던 한족의 우수한 제도와 기술들을

적극적으로 도입해 점점 내실을 튼튼히 다져갔죠

 

황제라는 남편은 노느라 바쁘고

어린 여자의 몸으로 대단한 리더쉽을 발휘하다보니

처음엔 어린여자가 정치를 하는것에 부정적이던

요나라의 대신들도 결국 그녀를 인정할수 밖에 없었고

이후에는 더욱 그녀를 지지해주기도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일은 소황후가 직접 도맡아 일을 처리했으며

굉장히 중차대한 일이 있을때는 대신들과 회의를 거쳐

처리하되, 경종에게는 결과만 통보했죠

 

이때까지만해도 일은 소황후가 했지만

그래도 경종도 완전히 손놓지는 못하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얼마안가 경종은 아내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고 자신은 놀기만 하게되죠

 

심지어 경종은 소황후의 호칭도

짐(짐(朕) : 황제가 스스로를 이르는 말) 이라고 기록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그렇게 소황후가 요나라를 완전히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노력이 통했던 덕인지

요나라 백성들의 삶은 점점 풍족해 졌죠

 

만약 놀기만 좋아하는 경종이 통치를 했다면

요나라의 전성기는 오지 못했을수도 있겠네요

 

어쨌든 그러던 982년 9월

사냥을 나갔던 경종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소황후는 태후가 되었죠

 

죽기 직전 경종은 나라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은

소태후의 명으로 처리하라는 조칙을 반포했으며

이후 12살의 어린 나이로 야율융서가 황제로 즉위하는데

그가 바로 요나라 최고의 명군인 성종입니다

이 성종대에 요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바로 소태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 라는 이야기가 있죠

 

아들이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소태후는 요나라를 통치했는데

매우 엄격하게 성종을 키웠던 덕에 그가 똑바로 잘 자랄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성종은 매일 글공부와 무예를 익혀야 했는데

한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술을 마신 성종을

소태후가 직접 매를 들고 훈육하기도 했을정도로

엄하게 교육을 시켰고

덕분에 그는 요나라 전성기를 이끈 명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이죠

 

거기다가 대신들도 소태후를 믿고 잘 따랐으며

그 덕분에 본격적으로 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요나라 조정이 안정이 되려면 많은 인재를 등용해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할수 있도록

다 뜯어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소태후는

민족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한족이던 한덕양 이라는 인물이었죠

 

한덕양은 사실 소태후가 궁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아버지 소사온이 소작의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있던 인물이었는데요

 

하지만 결국 혼사가 성사되기 전에

소태후가 입궁을 하게 되면서 결혼이 무산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어쨌든 한덕양은 자신의 출중한 능력을 바탕으로

소태후를 잘 뒷받침해 훌륭히 정치를 이끌어 나갈수 있었던 것이죠

 

그렇게 한덕양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소태후의 최측근이 되었던 것인데요

 

그러면 대게 권력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챙기고

부패하기 마련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죠

 

사욕을 채우기 위해 권력을 이용하지 않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인재를 등용할땐

그 사람이 만약 자신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인물이거나

정치적으로 자신과 뜻이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능력만 출중하다면 소태후에게 적극적으로 천거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인재들을 고루 등용할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식으로 한덕양은 오직 소태후와 나라에 충성을 했던

충직한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소태후와 한덕양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아지자

서로 내연의 관계가 되었으며

성종 역시 한덕양을 아버지 대하듯 했다고 하죠

 

또한 한덕양의 평소 능력도 뛰어나고

나라를 위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 진정성이 있다는걸 알았던 조정대신들도

소태후와 한더걍의 관계를 인정해 주었고

백성들 역시 그런 그를 칭송했다고 합니다

 

이후 1004년, 소태후는 한덕양에게 황족의 성인 '야율'씨를 하사하고

이름도 융운으로 바꿨으며 대승상에 임명했죠

 

한덕양 외에도 종친중 뛰어난 능력을 가졌던

야율사진과 야율휴가에게도 굉장히 잘해줘

그들 역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세력을 탄탄하게 만든 소태후는

어린 황제를 몰아내고 황제자리를 탐내던 자들을

목숨만은 살려주고 모두 조용히 물러나게 하면서

그렇게 요나라 조정을 완벽하게 장악할수 있었죠

 

그리고 그녀는 당시까지만해도 노예와 같은 취급을 받던 한족을

요나라 백성으로 받아들여야 나라가 더 부강해질수 있다고 믿었고

이후 한족도 거란족과 마찬가지로 평등한 대우를 받을수 있도록 했습니다

 

또한 요나라로 넘어오는 한족에게 먹고 살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해주자

요나라로 오는 한족 유민이 엄청나게 많아졌고

그로인해 요나라 초기에는 얼마 안되었던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해

소태후가 다스리던 때에 인구수는

그전보다 약 3배나 올랐을 정도였다고 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러자 재정 수입도 엄청나게 늘었고

재정적으로 안정이 되자

소태후는 본격적으로 군사력을 강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거란족, 한족 할거 없이 병사들을 모았고

나이 들고 병든 병사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려 보냈죠

 

그리고 강한 정예병 양성을 위해 꾸준히 군사훈련을 이어나갔습니다

 

거기다가 뛰어난 한족의 문화와 제도도 모두 흡수하였으며

누구든 나라를 위한 좋은 아이디어와 의견 등을 자유롭게 올릴수 있도록 했죠

 

그 덕분에 요나라는 점점 안정도 찾고

강력한 군사력까지 갖춰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소태후가 더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직접 병사를 이끌고 전장을 누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소태후를 '철마를 탄 여인 소작' 이라고 불렀던 것이죠

 

당시 송나라는 요나라가 차지하고 있던

연운16주를 다시 빼앗아 오는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그나마 요나라의 위협에서 안전할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다 경종이 죽고 성종이 어린나이에 황제로 즉위하자

송나라 태종은 지금이야말로 절호의 기회라면서

연운16주를 차지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북벌에 나섰습니다

 

이 일을 '옹희북벌' 이라고 부르죠

 

연운16주는 요나라 입장에서도

대륙으로 향할수 있는 관문과 같은 요충지였기에

송나라의 북벌을 막기위해서

소태후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출진하게 됩니다

 

전쟁 초반에는 송나라가 요나라의 성들을 함락시키는 등

분위기가 굉장히 좋았지만

이후 소태후가 이끄는 요나라군이

적의 후방을 기습 공격해 보급을 끊어버리고

모든 병력을 집중한 뒤 빠른 기동력을 이용해

송군 이곳저곳을 깨부수는 전략으로 송나라를 작살내버렸죠

 

그렇게 병력면에서 요군을 압도하고 있던 송군도

점점 병력을 갉아 먹히더니 결국 후퇴를 할수 밖에 없었으며

이후 20여년간 요나라의 강력한 공격을

방어하는데 급급한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1004년, 소태후는 직접 20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송나라를 공격해 들어갔고 불과 2달만에

요군은 송나라 수도 개봉의 코앞까지 진군해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당시 송나라 황제였던 진종은 전혀 싸울의지가 없었는데

결국 사신을 보내 요나라와 화친을 요청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소태후는 화친요청에 응하면서

두 나라는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며

전쟁에서 승자와 같았던 요나라는

이후 송나라로부터 매년 비단 200,000필과 은 100,000냥을 받게 되었죠

 

이로인해 재정이 넉넉해진 요나라는

정치와 군사, 법률, 문화 등을 정비하고

강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고려와 여진족을 압박했으며

서쪽의 서하까지 굴복시키면서

당시 최강국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약 5년후인 1009년 11월,

57살의 나이가 된 소태후는 아들 성종에게 모든 정사를 맡기며

섭정에서 물러났고

다음달인 12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17살 이후 요나라를 직접 통치하면서

당시 가장 강한 나라로 만들었던걸 보면

정말 엄청난 능력을 가진 여걸은 확실한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그녀는 황후나 태후 보다는

황제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릴것 같네요

 

요사에서는 소태후의 개혁이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라는 탈이 없고 백성들은 행복했고,

나라의 기강과 질서가 튼튼해졌으며,

관리들은 제 역할에 충실하고,

사람을 중시하고 법을 지키면서,

내정은 흥성한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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