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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금태종. 강대국이던 요나라와 송나라를 완전 개박살 내버린 인물

by 사탐과탐 2024.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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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국이던 요나라와 송나라를 완전 개박살 내버린 인물이었던 금태종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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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를 세운 완안아골타는

숙적이라 할수 있는 요나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결국 완벽하게 멸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고

아골타의 뒤를 이은 사람이 바로 그의 친동생이던 완안오걸매 였죠

 

그리고 완안 오걸매는 형이 못한 금나라 숙원사업을 해내고야 마는데요

 

오늘은 완안 아골타의 뒤를 이은 금태종 완안오걸매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생각해보면 완안 아골타도 족장이던 형 완안 오아속의 뒤를 이은것이고

오걸매 역시 형 아골타의 뒤를 이은것이죠

 

1113년에 아골타가 족장이 되고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요나라를 정벌할때

오걸매는 조정에 남아 형 대신 국정운영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아골타가 아무런 걱정없이 요나라를 깨부수는데 집중할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믿음직한 동생이 국정운영을 도와줘서 가능했던것 같죠

 

이후 1123년에 금태조 아골타가 회령부로 돌아가는길에 병사하자

그의 뒤를 이어 금태종으로 즉위하게 됩니다

 

그런데 금태종이 황제가 된 이후에 벌어진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요

 

바로 용상에서 끌어내려져 신하들에게 곤장을 맞은 사건이죠

 

아골타가 금나라를 개국했을때 금나라의 재정상황은 좋지 못했습니다

 

이에 아골타는 국고는 전쟁을 할때만 쓸수 있는 걸로 하고

누군가가 이 맹약을 어기면 그가 누구이든간에 20대의 곤장을 치겠다고 한것이죠

 

아골타의 이 명령은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누구하나 어기지않고 잘 지켜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오걸매 역시 형의 뜻에 따라 누구보다 절약하는 모습을 보였죠

 

그리고 이후 오걸매가 태종으로 즉위하고 나서 일이 벌어집니다

 

오걸매는 오랫동안 참아오던 술이 마시고 싶어서

몰래 창꼬에서 약간의 재물을 꺼내서 써버린 것이죠

 

이후 국고를 점검하던 신하가 이를 알아차리고

금나라 대신 중 한명이던 점한에게 말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조회시간에 점한은 이를 다른 신하들에게 말했고 상의를 거친후

상의를 거친 이후 이 낭비와 사치를 일삼는 황제를 처벌하기로 결정했죠

 

그리고 오걸매를 용상에서 내려오게 한뒤

곤장 20대를 쳐버렸고

이후 다시 용상에 그를 앉혀 놓았습니다

 

이후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황제의 곤장을 때린 죄를 처벌해 달라고 한것이죠

 

그러자 오걸매도 어쩔수 없이 신하들의 죄를 사면해줄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은 이후 오걸매는 죽을때까지 사치와 낭비를 하지 않았다고 하죠

 

사실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이런일이 일어날리 없었겠지만

금나라 초기때 까지만해도 중앙 집권이 이뤄지지 않아

부족국가와 같은 상태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일이 있고나서 정신을 차렸던 것인지

1125년에 거란의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를 사로잡고

끝내 요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죠

 

그런데 요나라가 멸망하기 직전

송나라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는데요

 

당시 금나라는 송나라와 '해상의 맹'을 맺어

매년 요나라에 주고 있던 세폐를 금나라에 주기로 약속한 상태였으며

연운 16주를 공략하지 못하고 있던 송나라를 금나라가 도와준것을 이유로

은 20만냥 비단 30만필, 전 100만과 군량 20만석을 요구했던 것이죠

 

막대한 양의 재물을 금나라에 주기가 싫었던 송나라는

끝내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하고 마는데

바로 요나라 천조제와 밀서를 주고 받으며

금나라에 내분을 조장하려는 정치공작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요나라가 멸망하고나서는

아예 금나라의 요구를 하나도 들어주지 않은채

모조리 무시해버렸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이후 천조제와 밀서를 주고받은것도 금나라에 걸리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금태종은 격분해 대군을 동원해

송나라를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연경을 지키던 곽약사도 항복하고 말았고

금군은 눈깜짝 할 사이에 수도였던 개봉을 포위했죠

 

당시 송나라의 황제는 흠종 이었는데

흠종의 아버지이던 휘종도 살아있는 상태였지만

금군이 쳐들어 온다는 소식을 들은 휘종은 깜짝 놀라

아들 흠종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자신은 강남으로 도망을 쳤던 상황이었습니다

 

갑작스레 제위를 이어받은 흠종은 송나라의 많은 영토를 금나라에 할양하고

금 1천만냥, 은 2천만냥, 비단 1천만필의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고

흠종이 금나라 황제를 숙부로 대한다는 치욕스러운 조건을 들어주면서

금나라와의 화의에 성공해 개봉의 포위를 풀수 있었죠

 

이렇게 굉장히 치욕스럽고 엄청난 재물을 빼앗기긴 했지만

송나라는 멸망 당하지 않을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송나라는 이런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다시 반전시키기 위해

금나라에 있던 거란족 장수들을 부추기고

고려에 사신을 보내 함께 금나라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죠

 

그리고 개봉에서는 금나라와 싸우자는 주장이 힘을 얻으면서

결국 흠종도 금나라와의 약속을 파기해버린 것입니다

 

이에 금태종은 또다시 격분하며

이제는 봐주지 않아야겠다 생각했죠

 

그리고 즉시 군대를 보내 포위만 하던 1차 침공때와는 달리

개봉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려고 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에 아차 싶었던 흠종은

황하 이북 땅을 전부 주겠다면서 금나라에 화의를 청했지만

금태종은 송의 제의를 거절했고

결국 1126년 11월, 개봉이 함락되고 말았죠

 

그리고 흠종과 휘종을 비롯한 송나라 황족들과 귀족들,

수천명의 관리들까지 모두 금나라로 압송되었고

기술자와 예술가들 역시 금나라로 잡혀갔습니다

 

그렇게 송나라는 168년만에 멸망하고 말았죠

 

이 사건이 바로 '한족 3대 치욕 사건' 으로 불리는

'정강의 변' 사건 입니다

 

이후 흠종의 동생이던 강왕 조구가 남쪽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웠기에 이전 송나라를 북송이라고 부르기도 하죠

 

그리고 금태종은 휘종과 흠종을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린뒤

평민들의 옷을 입힌채 금태조 완안 아골타의 묘앞으로 끌고갔습니다

 

그리고 묘앞에 꿇어 앉힌 뒤 견양례를 시켰다고 하죠.

 

견양례는 갓 벗긴 양의 생가죽을 뒤집어 쓰고 항복을 시켰던

금나라의 의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금태종은 휘종에게 혼덕공(정신이 혼미하다라는 뜻)이라는 칭호를 내렸고

흠종에게는 중혼후 (혼미가 더욱 심하다는 뜻)라는 칭호를 내리면서

둘을 완전 제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취급을 했던 것이죠

 

얼마전까지만 해도 송나라의 황제였던 인물들이

통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벌어진 처참한 말로였습니다

 

또한 금태종은 고려 인종에게도 사신을 보내

고려가 요나라를 섬긴것처럼 앞으로는 금나라를 섬기라고 말했는데

이에 대다수의 신하들은 여진족이 오랑캐라는 이유로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자 했지만

이자겸과 척준경 등은

"예전에는 여진족의 세력이 작아 고려와 요나라를 섬겼지만

지금은 요나라와 북송을 멸망시킬정도로 강국이다"

"또한 작은 나라가 큰나라를 섬기는 것은 당연한것이니

사신을 보내 예를 지키는것이 좋다"고 말했고

고려 인종은 이자겸의 이 주장을 채택했던 것이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그리고 1126년 4월, 인종은 정응문 등을 금나라에 보내

스스로 신하라고 낮추어 사대의 예로 금나라와 국교를 맺게 되었습니다

 

사실 오아속이 고려와 동북9성을 두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였을때

오걸매 역시 형들과 함께 고려와 싸웠을수도 있었죠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와의 전투에서 마지막엔 승리를 하지만

매번 고전을 면치 못했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20여년만에 고려와의 관계를 180도 뒤집어 놓았던 것이죠

 

한편 휘종의 9남이던 조구가 강남으로 내려가 남송을 세워

고종으로 즉위하자 금태종은 송나라를 뿌리 뽑기위해

군대를 이끌고 남송으로 쳐들어갔는데요

 

이때 금군의 지휘를 맡고있던 총사령관은 완안종필 이라는 인물이었는데

남송의 명장이던 악비, 한세충, 장준 등에 의해 더이상의 진격은 막혀버렸고

이후 여러차례 침공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금나라는 남송을 어쩌지 못하고 있던 상황에

인질로 잡혀있던 진회가 탈출해 남송으로 갔고

1131년 재상이된 진회는

이후 남송과 금나라 간의 화의를 하는데 힘을 썼던 것이죠

 

정강의 변이 일어나기 전에는 진회도 아무런 대책없이

금나라와의 전쟁을 주장하던 주전파였지만

남송에 돌아온 뒤로 금나라를 두려워해 강력한 주화파가 된것입니다

 

그렇게 주전파와 정쟁을 하던 중 주전파이던 명장 악비가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고

그로인해 진회는 지금까지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한간(漢奸)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결국 남송과는 금태종이 죽고나서 금희종 시기에 강화조약을 맺게 되죠

 

금태종의 최대 업적은

숙적이던 요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만주와 내몽고, 그리고 화북지역을 다스리는

대제국 금나라를 만든것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그렇게 금나라는 당시 주변국들중 가장 강한 힘을 가진 나라가 되었죠

 

하지만 금태종의 권력 기반은 확고하지 못했는지

자신의 장남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여진족 부족장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부자 승계는 실패하고 말았고

1135년 형이자 금태조이던 완안 아골타의 아들인 완안단에게 양위를 해주고

이후 얼마안가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금태종은 자식들이 굉장히 많았는데요

안타까운점은 중국 3대 폭군 중 한명인 해릉양왕에 의해

몰살되어버려 금태종의 핏줄은 끊기고 말았다고 하죠

 

금태종은 주위 라이벌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나라의 기반을 잘 다졌기 때문에 평가가 나쁘지 않지만

이후 금나라는 금희종을 비롯해

해릉양왕 대에는 최악의 폭군들이 제위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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