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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 탐구

야율아보기. 발해를 멸망시키고 거란족의 국가 요나라를 세운 황제

by 사탐과탐 2024.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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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를 멸망시키고 거란족의 국가 요나라를 세운 황제
야율아보기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클릭하시면 더 재밌고 흥미진진한 영상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은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세운 초대 황제이며

발해가 멸망하는데도 큰 영향을 끼쳤던 인물인 '야율아보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야율아보기가 태어난 9세기말에서 10세기 초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기였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되었고

한반도에서는 신라의 힘이 약해지며 후삼국 시대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만주 지역에서는 거란족이라는 새로운 강자가 등장했는데요

거란족은 동호계 선비족의 한 갈래로,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역사에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몽골 동부를 중심으로 유목 생활을 했으며

8개의 부족이 느슨한 연맹 형태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지내야 했지만

9세기말 주변국들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점점 세력을 넓히려는 시도를 시작했죠

이런 상황에 혜성처럼 나타나 거란족을 통일하고 강대국으로 이끈 인물이

바로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872~926)입니다

그는 거란의 여덟 부족 중 가장 강성했던 질랄부 출신으로,

뛰어난 지도력과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거란을 통일하고 요나라를 건국했죠

그럼 이제 그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까요

 

야율아보기는 872년 거란의 질랄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질랄부를 이끄는 귀족 가문이었지만

그의 어린 시절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하죠

내부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해 질랄부의 부족장이자

그의 할아버지인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이 피살당하고

야율아보기의 아버지 야율살랄적과 삼촌들이 도망자 생활을 하게 되면서

어린 야율아보기는 할머니 손에 몰래 숨겨져 자랐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세월이 흐르면서 키가 9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자란 그는

말 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고 하죠

야율아보기의 아버지 야율살랄적은 훗날 다시 질랄부로 돌아와 부족장이 되었고,

야율아보기 또한 그의 뒤를 이어 901년에 질랄 부의 부족장이 되었습니다

머지않아 그는 거란 연맹군의 총사령관인 우월(于越)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거란 연맹의 2인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죠

 

야율아보기는 부족장이 된 후부터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만드는 한편

거란 부족 전체를 통합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꿈은 단순히 한 부족의 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란 전체를 통일해서 강력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죠

그가 기다리던 기회는 당나라가 힘을 잃기 시작하며 찾아왔습니다

906년 당나라가 멸망하고 오대십국 시대가 시작되면서 중국 대륙은 큰 혼란에 빠졌죠

이 기회를 틈타 야율아보기는 자신의 반대파 부족장들을 잔치에 초대한뒤 모두 죽여버리고는

다른 7개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모든 거란족들을 대표하는 '대가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요

915년에는 일곱 부족장들이 군사들을 끌고 와서는

야율아보기가 가한의 지위에서 물러나기를 요구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 야율아보기는 만약 자신이 싸워서 이긴다 하더라도

동족들끼리 싸우는 것은 결국 거란족 전체의 힘이 약해진다는 판단을 하고는

스스로 가한의 자리에서 물러나며 기회를 기다렸죠

하지만 머지않아 그는 부인인 '술률평'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됩니다

매우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술률평이 남편과 상의한 후

일곱 부족의 장을 초대해 대접한 뒤 몰래 숨겨둔 군사를 동원해

술에 취한 족장들을 제거하면서 마침내 거란의 완전한 통일을 이루어내게 되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거란을 통일한 야율아보기는 916년,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대요(大遼)'라 정했습니다

그렇게 요나라가 탄생했죠

야율아보기는 요하 상류에 있는 '임황'에 도읍을 정했다가

918년에는 내몽골 파림좌기에 수도 상경을 지으면서

떠돌아다니는 유목 국가가 아니라 터를 짓고 사는 정주 국가로의 전환을 시도했습니다

 

요나라의 건국은 단순히 새로운 왕조의 시작을 넘어,

동아시아 역사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

유목 민족이 중국 북부와 만주 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했기 때문이죠

야율아보기는 요나라를 건국한 후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는 먼저 북방의 유목 민족들을 공략해서 후방의 위협을 없애려고 했죠

그래서 북쪽으로는 내몽고 동북부의 실위, 흑룡강 하류의 여진을 공격했고,

서쪽으로는 돌궐의 옛 땅을 빼앗고 '해'를 멸망시켰으며 토욕혼과 탕구트 등도 정복했습니다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절하게 밀고 당기는 모습을 보여줬죠

907년에는 30만 병사를 이끌고 산서성 운주를 공격했지만,

진왕 이극용과 화친을 맺어 형제 관계를 맺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야율아보기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과 중 하나가 바로 발해를 무너트린 일이죠

926년 그는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발해 정벌을 시도해 결국 항복을 받아냈고

발해국을 동단국으로 개편한후 태자 야율배를 그곳의 왕으로 임명했습니다

이로써 요나라가 만주 지역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죠

 

야율아보기는 유목 민족 출신이었지만,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서는

중국의 제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그들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한자를 본떠 거란의 문자를 만들었으며 '일국양제'라는 독특한 통치 체제를 만들어서

거란족에게는 거란 고유의 제도를, 한족을 다스릴 때는 당나라의 법률을 사용했죠

이러한 정책 덕분에 한족과 거란족들의 갈등을 최소화시켰다고 하네요

그는 한족들을 활용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생산성을 높이는 등 농업발전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야율아보기가 갑작스럼게 세상을 떠나면서 요나라가 혼란해지기 시작했죠

926년 7월, 발해 정벌을 마치고 귀국하던 그는 길림의 부여성에서 병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야율아보기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술률평 황후가 권력을 장악했죠

평소 야심이 넘치던 그녀는 남편이 죽자마자 즉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죽은 남편 대신 섭정에 나선 그녀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신하들을 모조리 불러놓고

죽은 선황제가 그립냐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신하들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럼 마땅히 저승에 가서 선황제를 만나야 하지 않겠냐며

그들을 모두 순장해 몰살시켜 버렸다고 하죠

이후 중원의 문화를 숭상하던 장남 야율돌욕 대신 둘째 아들인 야율덕광을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이 사건을 두고 한족 출신인 '조사온'을 비롯한 신하들이

황태후야말로 가장 가까이서 선황제를 모셔야 할 사람이니

술률평 또한 순장을 당하는 것이 맞다는 주장을 했죠

 

그러자 술률평은 아들이 아직 어려서 자신이 국정을 대신 돌봐야 하니 죽을 수는 없다며

자신의 팔 하나를 잘라 선황의 능묘에 바치는 것으로 빠져나갔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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