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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 탐구

유여시. 명나라 최고의 기생이자 명나라판 황진이

by 사탐과탐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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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최고의 기생이자 명나라판 황진이, 유여시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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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여시(柳如是)는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기생이자 여류 시인으로

그녀의 생애는 명말청초 대혼란기와 맞물려 정말이지 파란만장했습니다

마치 조선시대의 황진이가 생각나는 유여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유여시는 1618년 중국 절강성 가흥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양애(楊愛)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웠던 그녀는 가난한 가정 형편으로 인해

10살도 채 되지 않아 소주의 귀가원이라는 기방의 유명한 기생 서불의 하녀로 팔려갔습니다

 

당시 기생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노래와 춤, 시를 가르쳐

고관들의 첩으로 들여보내는 중개인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서불은 어린 유여시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게 됩니다

서불의 가르침을 받으며 시와 서예 그리고 그림에 대한 기초를 익힌 유여시는

학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이후 재상 주도등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게 되었죠

 

주도등은 새로 들어온 어린 하녀가 글과 시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기특하게 여기며

무릎에 앉혀서 시와 학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도등의 아내와 여러 첩들의 질투가 폭발해 분노가 쌓여가는 와중에

하필이면 주도등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죠

유여시는 그렇게 집에서 쫓겨나 다시 기방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기생으로서 유여시는 시, 서예, 그림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는 데다가

빼어난 미모로 강남 지역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금세 유명해졌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무능한 황제와 간신들 때문에 나라가 망해가던 명나라 말 시기의 강남 지역에서는

지식인들이 모여서 정치와 문학 등

온갖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토론하던 모임이 많이 생겨났었는데요

기생 중에서도 학식이 뛰어났던 유여시는 거의 단골로 그 모임에 불려 갔었죠

 

수많은 남자들과 교류를 하게 된 유여시는 그중에서 2명의 남자를 마음에 들어 했는데요

첫 번째 남자는 유여시보다 10살 많았던 유부남 '진자룡'이었고

두 번째 남자는 동갑인 '송징여'였었죠

 

유여시는 유부남인 진자룡에게 더 호감이 있었지만

과거 주도등의 아내와 그의 첩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경험 때문에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죠

그러는 와중에 송징여가 그녀에게 호감을 표시하며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유여시는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면 물속으로 뛰어들어 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송징여는 주저 없이 한겨울 바다에 뛰어들었고 그렇게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죠

 

하지만 송징여와의 사랑은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송징여의 집안에서 젊은 아들이 기생인 유여시와 사귄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난리가 났고

결국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됩니다

 

이후 유여시는 유부남이라서 어쩔 수 없이 멀리했었던 진자룡에게

마음의 문을 열며 다가가게 되는데요

여전히 유여시를 못 잊었던 진자룡은 유여시가 다가와주자

매우 기뻐하며 금세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송강 남루에 살림을 차리게 되었죠

유여시는 학식이 뛰어났던 진자룡에게 다양한 학문을 배우면서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키워나갔습니다

 

진자룡이 가는 곳에 항상 같이 다니면서 다양한 토론장과 술모임에 참석했죠

하지만 달콤했던 시간도 잠시 진자룡의 부인이

남편이 기생을 옆에 끼고 바람을 피우는 걸 알게 되는데요

그러자 진자룡은 유여시를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진자룡의 부인은 물론 모친까지 나서서 반대하며 난리를 피웠죠

그렇게 진자룡의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는 걸 보자 유여시가 먼저 포기하고 떠나게 되었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진자룡과 헤어진 유여시는 1636년에 다시 기방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유여시는 자신의 이름을 유은(柳隱)으로 바꾸고

여시(如是)를 자로 사용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기생 일 대신에 직접 그린 서화를 팔거나

연회나 시회에서 그동안 쌓았던 학식을 뽐내면서 돈을 벌며 살게 되는데요

 

기생 이미지를 탈피해 버리고 시인 유여시의 삶이 시작된 시기였다고 볼 수 있죠

또한 그녀는 일부러 남장을 하고 무술까지 배웠는데요

혼자서 강남을 유랑하고 다니며 생계를 이어갔기 때문에

여자의 몸으로는 위험하다 생각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남장을 해서라도 차별 없이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기 위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유여시는

자신의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 되는 '전겸익'과의 인연이 시작되는데요

전겸익은 명망 높은 정치인이자 당대 최고의 시인이었죠

어느 날 유랑생활을 하다 알게 된 지인이 유여시에게

어떤 사람에게 시집가고 싶은지 물어봤는데

 

유여시는 "저는 전겸익만큼 학문적 재능을 가진 분이 아니라면

결혼은 절대 안 할 거예요" 라며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이후 그 이야기가 전겸익의 귀에까지 들어갔는데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도 유여시만 한 재능이 뛰어난 여자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고 하죠

 

결국 자유분방한 유여시는 남장을 한 채 전겸익을 찾아갔습니다

유여시는 허름한 집에 있던 남자가 전겸익인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는

지나가는 과객인데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한다고 말했죠

 

전겸익 또한 남장을 했지만 금세 여자임을 눈치챘고

그녀가 바로 소문으로만 듣던 유여시인 것을 직감하는데요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늙은이였지만

유여시는 명나라 내에서 손에 꼽히는 덕망 있는 학자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으며 그에게 점점 빠져들게 되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전겸익 또한 무려 36살이나 어리고 예쁜 처자가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하룻밤을 신세 지자고 하니 로또 맞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거기다가 예쁘고 어리기만 한 게 아니라

여느 학자들 못지않게 박학다식하기까지 했으니까요

당시 전겸익은 59세, 유여시는 23세였습니다

 

그렇게 둘은 한 이불을 덮으며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고

금세 두 사람은 서로 이끌리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유여시는 빙 둘러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애첩은 싫고 몇 번째 부인도 좋으니까 유여시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말했죠

 

그때 전겸익은 이미 본처가 있었지만 인생 막바지에 찾아온 행운을 놓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호화 유람선인 부용방에서 정식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죠

비록 육체적으로는 나이차가 36살이나 되었지만

두 사람은 너무나 잘 맞았기 때문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전겸익의 정실부인은 아이도 없었고 불교에 완전히 빠져있어서

남편이 무슨 일을 하든 별로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집안에서도 유여시를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평화로운 부부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렇게 전겸익과 유여시는 함께 시를 짓고 학문을 연구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전겸익은 유여시를 위해 홍두산 기슭에 아름다운 작은 누각까지 지어주며 그녀를 아꼈죠

그 누각의 이름을 아문실(我聞室)로 지었는데

금강경(金剛經)의 서두에 나오는 말인 여시아문(如是我聞)에서

아문을 따서 만든 이름이었습니다

즉 유여시의 이름을 돌려서 표현했던 거라 볼 수 있죠

 

늙은 전겸익과 젊은 유여시는 학문적인 교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궁합이 환상적이었는데요

유여시는 나이 많은 남편을 위해 내조를 엄청 잘했다고 합니다

기생 출신으로 많은 남자들과의 경험이 많았던 것 때문인지 유여시가 적극적으로 리드를 하며 늙은 남편과의 뜨밤을 보냈다고 하는데요

 

전겸익은 그녀와 잠자리를 가질 때마다 회춘을 거듭하며

정신도 더욱 맑아지고 몸도 건강해져 갔다고 합니다

실제로 전겸익은 그 당시 당장 땅에 묻혀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는데

십수 년을 더 살다 8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아마도 아내의 내조 덕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이후 유여시는 1643년에 강남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강운루라는 서고를 지은 후

수많은 인재들과 교류를 하며 학식과 견문을 더욱 넓히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도 잠시 1644년에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해 버리고 청나라가 들어서면서 두 사람의 삶은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되었죠

 

비록 나라가 망했지만 수많은 지식인들은 굴복하지 않으며 반청운동에 나섰고

부패 관료들과 간신배들이 숭정제의 조카를 복왕으로 추대하고는

남경에서 망명 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이때 간신배들 때문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낙향했던 전겸익도 그들에게 합류하게 되는데요

명나라를 부흥시킨다는 대의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겠다는 결심이었죠

 

하지만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도 안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중원을 거쳐 순식간에 남경으로 진군했습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유여시는 청나라에 항복할바에 같이 물에 빠져 죽자고 했죠

하지만 충분히 살만 큼 살았던 전겸익은 덜컥 겁이 났던지

거절하고 혼자 죽으려던 유여시마저 뜯어말렸습니다

 

결국 청나라 군대가 남경에 도착하자

전겸익은 다른 신하들과 함께 나가서 항복하게 되었죠

이후 전겸익은 북경으로 가서 청나라 조정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불필요한 저항을 하지 않은 덕분에 인명피해는 없었지만

목숨을 걸고 반청운동을 하던 당대 최고의 학자가 곧바로 청나라에 항복하고는

신하까지 되었기 때문에 그저 목숨을 연명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처세였죠

그렇기 때문에 이후 역사에도 전겸익을 변절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의 행동에 크나큰 실망을 한 유여시는

전겸익을 따라가지 않고 남경에 남았습니다

전겸익 본인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북경에 간지 몇 달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죠

 

유여시가 다시 돌아온 남편을 적극적으로 설득한 끝에 전겸익은 반청운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다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면서 남편의 반청운동을 도왔죠

1648년 황육기의 반청운동 사건에 휘말려 전겸익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이때 임신한 몸이었던 유여시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남편을 겨우 감옥에서 빼낼 수 있었죠

글의 내용을 돕기 위한 이미지
 

전겸익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반청운동을 했지만

결국 명나라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시간이 흘러 1664년 83살의 나이로 전겸익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겸익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친족들이 재산을 가로채려 눈에 불을 켜고 노리자

유여시는 자신이 죽으면 그들을 고발하라는 유언을 남기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4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후 그녀의 유언장 덕분에 전겸익 친족들의 음모가 드러나면서

그녀는 남편의 명예와 재산을 지켜내었죠

 

 

유여시는 기생이면서도 명말청초의 혼란기에

고국인 명나라에 대한 애국을 행동으로 보여준 여류 시인으로

후대의 사람들은 그녀를 협기, 즉 의로운 기생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20세기초 언론인이자 작가였던 서천소는

"지조의 고결함, 행동의 강경함, 말의 완곡함과 격렬함으로

진실한 애국자가 아닐 수 없다"라고 그녀를 평가했죠

 

무려 10년이라는 시간을 갈아 넣어 마지막 작품으로

'유여시별전'을 남긴 역사학자 진인각은 그녀를

"독립의 정신, 자유의 사상"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유여시는 일부다처제,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시기의 기생이었지만 학식이 뛰어났으며

여류 시인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을 보면

마치 조선시대의 황진이와 비슷하기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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